<마을탐방(60)안내면 인포리>오가는 사람 모여들던 교통 중심 인포리 이야기
<마을탐방(60)안내면 인포리>오가는 사람 모여들던 교통 중심 인포리 이야기
상주·보은·안내·안남·옥천읍 이어지는 삼거리 위치
고령화에도 새로운 소득창출 시도로 새 미래 꿈꿔
  • 권오성 기자 kos@okinews.com
  • 승인 2013.11.08 11:51
  • 호수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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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리는 안내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일부 주민들은 안남면으로 오해할 정도로 두 면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포리는 안남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다 한때 안남면 소속이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포리는 안내·안남면은 물론 보은이나 상주, 옥천읍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그렇다보니 예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곳입니다.

인포리는 옥천읍에서 보은 방면으로 37번 국도를 지나다보면 안내면과 안남면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세 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교통의 중심지로 명성이 높습니다. 마을을 지나는 버스가 하루 40회 가량 있을 정도입니다.

1일 부지깽이도 덤빈다고 할 정도로 바쁜 수확철, 안내면 장계교를 지나 대청호변에 자리 잡은 인포리를 찾아가봤습니다.

▲ 인포리 마을 전경
▲ 한때 7개나 있었던 상가가 지금은 인포상회 하나로 줄었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하루의 시름을 이곳에서 풀었다.
 

■ 화인·걸포·관곡 자연마을로 이뤄진 인포리

인포리는 화인과 걸포, 관곡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당초에는 이 세 마을 외에 '삼거리'라는 마을이 있었지만 대청호가 생기면서 수몰돼 자취를 감췄다. 화인은 안내중학교가 있는 마을로 세 자연마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재 25가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사실상 마을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화인은 원래 '휀'이라 불렸다. 휀을 한자로 바꾸면서 화인으로 변했다는 것. 화인은 과거에도 화인역과 화인원이 있었을 정도로 교통의 중심이었다. 역원은 관리나 사신, 주민들이 이동하거나 여행 중 말과 함께 쉬어가는 곳으로, 역과 원이 있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인포리를 오갔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를 증명하듯 1970년대만 해도 화인마을에만 7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인포리 유일의 상점인 인포상점을 운영하는 김복내(74)씨는 30년 전 활발했던 인포리를 기억했다.

▲ 마을 이름의 연원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이병로씨.
"그때는 정말 엄청났죠. 화인에만 180호 600명이 살았어요. (면소재지인) 현리보다 여기가 사람이 더 많아 수몰만 안됐으면 여기가 면소재지가 됐을 거예요. 그때는 막걸리가 하루에 한 말씩 팔리고 했어요.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가니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점차 인구가 줄면서 이제는 저만 장사를 하네요. 그래도 가게가 주민들 모임장소로 이용되고 자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20가구가 사는 관곡은 과거 벼슬을 했던 인물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8가구가 거주하는 걸포는 걸개천이라는 도랑이 안내면 현리에서 흘러와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한데다 포구가 자리하고 있어 붙여졌다고. 마늘을 심고 있던 이병로(73)씨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술술 풀어냈다.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김종훈 이장이 귀뜸을 해줬다.

▲ 68세 나이에도 마을 부녀회장으로 활동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구정순씨.
"이 동네가 예전에는 사는 사람도 참 많았고 들르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던 곳이에요. 화인과 걸포를 합쳐 인포리가 되었는데요, 지금도 하루 버스가 40대나 지나갈 정도로 안내·안남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동네 사람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 활력은 예전만 못해요. 좋은 땅이 참 많았는데 수몰로 다 없어져 농사를 짓기가 힘드니까요."

■ 80명 인구에 65세 이하 8명, 초고령 마을
 

현재 인포리에는 8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 중 노인의 기준연령인 65세 이하 주민은 불과 8명에 불과할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황이다. 실제 마을에서 만난 주민의 대부분이 70대 노인들이었다. 마을의 살림꾼인 구정순(68) 부녀회장도 내일모레 일흔을 바라볼 정도다. 구 씨는 마을의 고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었지만 마을의 정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 동네가 노인이 많아 그렇지 살기는 진짜 좋아요. 요즘 마을에 가면 빈집이 엄청 많잖아요. 근데 인포리에는 빈집이 거의 없어요. 외지인들이 마을이 좋다며 들어오고 싶어 하는데 집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갈 정도예요. 마을에 일이 있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은 주민이라도 발 벗고 나서고 도와주는 곳이라 사람 사는 정이 살아 있죠. 다들 부지런해서 나이가 많아도 마을이 깨끗하잖아요."
 

▲ 마을 최고령 주민인 김대순 어르신
마을 초고령 주민인 김대순(95)씨도 부지런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귀와 눈이 좀 어둡지만 항상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깨끗한 옷을 입고 생활해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고령의 어르신이 일을 하는 게 다칠까 걱정되어 집에서 쉬라 만류하지만 잠시도 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 김대순 어르신은 "집에 드러누워 있으면 벌써 자식들 힘들게 했을 것"이라며 "운동 삼아 일하는 거다. 건강하게 일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 '밭작물이 주력 소득' 이젠 옛말

인포리는 예전부터 벼농사보다 밭농사가 주력이었다. 들깨나 고추, 콩 등 다양한 밭작물을 재배했었지만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사실상 주력 작물이란 게 없어져버린 상황이다. 현재 육원근(58)씨가 느타리버섯과 고사리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을 뿐 대다수 주민들은 자가 소비할 정도의 농사만 짓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에서 주장하는 농업의 규모화가 고령화가 진행되는 대다수 농촌마을에서는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이며, 고령 소농가를 위한 정책이 시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 김종훈 이장

규모화 농업이 사라진 빈자리를 지키기 위해 농사를 짓지 않는 주민들이 대안을 찾고자 나섰다. 농촌에서 농업이 아닌 관광이나 상업에서 미래를 찾는 시범사례를 인포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관골에서 캠핑장 '오지빌리지'를 운영하는 조한재(33)씨나 식당을 하고 있는 김종훈(56)이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특히 조한재씨는 인포리가 교통의 요지인 점을 활용해 외지에서 관광객을 불러들여 주말이면 성수기를 이룬다. 조 씨는 "예전에 부모님께서 숲속가든을 관골에서 15년간 하셨는데 3월부터 제가 캠핑테마레스토랑을 시작했다"며 "서울에서 오가며 사업을 하지만 교통요지라는 마을의 장점을 잘 살려내려고 한다. 고령화로 쇠퇴하는 마을을 살려보고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 상시적 교통사고 위험 해결, 인포리 숙제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로 미래를 꿈꾸는 주민들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안내중학교도 있는 화인마을을 지나는 도로 때문이다. 안남면 방면에서 오는 차들이 내리막에서 가속해 빠른 속도로 마을을 지나다보니 교통사고 위험이 크다고. 주민들이 수차례 건의해 안내중학교 정문 양쪽에는 과속방지턱이 설치되었지만 여전히 과속차량이 있는 상태다. 특히 인포삼거리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에는 인도가 없어 주민들과 안내중 학생들이 항시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김종훈 이장의 말이다.

"주민들은 연세가 많으시고, 학생들은 아무래도 조심성이 없다보니 아찔한 상황이 자주 생겨요. 안남면에서 나오는 방면에 과속방지턱을 하나 더 설치하고, 인포삼거리에서 마을까지 인도가 만들어지기 힘들다면 버스가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노선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매년 군수 연두순방 때 이 이야길 하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앞으로 꾸준히 이야기하고 바꿔나갈 생각입니다."

▲ 인포리에는 안내중학교가 있다. 주민들은 학생들과 주민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과속방지턱과 인도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바위가 안보여야 마을이 평안해요'
인포리 서당바위

여느 마을에 가더라도 마을의 전설과 연관된 이야기가 있다. 장군이 지나가 생겼다는 장수둠벙이나 선녀가 목욕하고 갔다는 식의 이야기, 위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의 단골메뉴이기 마련인데 인포리의 전설은 약간 살벌하다.

화인마을 대부분의 집에서 창문을 열면 보이는 바위산 '서당'. 예전에 서당이 있어 서당바위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 명칭이 서당인 이유는 정확치 않다. 주민들은 이 나지막한 바위산이 집에서 안보이도록 하기 위해 열성을 다해 나무를 심는다. 바위밖에 없는 통에 나무를 심을 만한 곳이 없음에도 바위틈마다 나무를 심고 길렀다. 서당바위와 이어지는 산능선에는 조림사업을 한 듯 나무가 띄엄띄엄 자라지만 희한하게도 이곳에만 크고 작은 나무들이 뒤섞여 자라 있었다.

김종훈 이장은 바위가 집 안에서 안보여야 마을이 평안해 주민들이 나무를 기르는 것이라 설명했다. 집 안방에서 문을 열고 바라봤을 때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주민들은 선대가 당부한 사항을 지키고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사실여부를 떠나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위해 나무를 키우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 보였다.

"저 바위가 보이면 안 된다는 건 마을 주민들 모두 알고 있고 정말 신경을 많이 써요. 주민들이 신경 써서 나무를 키워서인지 마을에 나쁜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 말로는 서당바위가 나쁜 건 아니고 풍수적으로 바위를 가려야 좋다고 해요. 앞으로도 나무 잘 길러 마을의 평안을 이어나가야죠"
 

▲ 서당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주민들은 바위 곳곳에 나무를 심고 가꿨다. 집 안에서 바위가 보이면 우환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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