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손외숙 부부
정종태, 손외숙 부부
함께사는 세상 [31]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4.21 00:00
  • 호수 5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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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장애인인 정종태(좌)씨와 장애인인 손외숙(우)씨가 결혼식을 올린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보금자리를 틀고 세상을 헤처나간지 10년이 넘어서고 있다.
99년 11월 어느 날 명가 웨딩홀. 이날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6쌍의 부부 중에 처음으로 입장을 하게된 정종태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케를 들고 휠체어에 다소곳이 앉은 아내 손외숙씨의 웨딩드레스가 자꾸만 휠체어바퀴에 말려 들어가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손씨가 앉은 휠체어를 밀며 입장을 하는 정씨 부부에게 하객들은 힘찬 박수를 보내며 축하해 주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손씨의 웨딩드레스에만 신경이 쓰였다. 정씨가 기억하고 있는 2년 전 `장애인 동거부부 합동결혼식'의 풍경이다.

비장애인인 정종태(47)씨와 장애인인 손외숙(47)씨는 그렇게 결혼식을 올린 지 2년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함께 보금자리를 틀고 세상을 헤쳐 나간지는 10년이 넘어서고 있다.

때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고 때로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행복에 겨웠던 10년. 그 10년 동안 둘은 힘들게 장만한 옥천읍 서정마을 꼭대기 집 한 채와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 현주(삼양초 4)를 얻었다.

▶17살에 닥친 `불행', 35살에 만난 첫 인연
휠체어를 타고 결혼식장에 입장한 손외숙씨는 청성면 묘금리가 고향이다. 17살이 되던 해인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아파서 병원도 찾고 한약도 먹어보았지만 결국 원인도 모른 채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다리 내 놓으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죠.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원인이 뭔지도 모르겠다는데 그냥 살아야죠."

그렇게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던 손씨가 작대기에 의지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누워 있은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다시 일어난 손씨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건강했던 손씨가 신체 장애를 얻으면서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상심이야 이만 저만이 아니었겠지만 여하튼 손씨는 잘 적응하면서 세상을 살아갔다.

그리고 35살이 되던 해 외할아버지에게서 한문 공부를 했던 한 아저씨가 빨리 선을 봐서 시집을 가라는 말에 "말로만 하지말고 중매 한번 서보라고"고 장난처럼 던진 말이 정씨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마자 아저씨가 저이를 데리고 왔더라구요. 하지만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불쑥 저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도 별다르지는 않았어요."

▶35살 노총각에게 다가선 `운명'
"현주 엄마 만나려고 그랬나? 여하튼 30살 넘기고 나니까 금방 35살이 되버리더라구요. 그렇게 살고 있는데 아는 아저씨 한 분이 청성 가는 길에 같이 가자고 했죠."

전부터 얘기는 들었지만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아저씨를 따라 찾아간 곳에서 손외숙씨를 만났다. 몸 성한 사람한테 어떻게 딸을 주겠느냐며 없었던 일로 하자고 등을 떠밀기도 했고 딱히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찾아간 곳도 아니었기에 정씨는 그렇게 돌아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끝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손씨의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머리도 복잡하고 해서 서울로 올라간 후 얼마가 지났을까 우연히 생각이나 전화를 한 것이 `100년 가약'이라는 인연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인연인가 봐요... 고향에 내려온 후 봉급을 받으러 다니던 직장을 찾았더니 전화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며 봉급에서 10만원을 제하고 주더라구요.(웃음)" 그렇게 정씨는 전화를 통해 손씨와의 정을 쌓아가며 인연의 두께를 넓혀갔지만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화수 떠놓고 올린 결혼식...
1년의 전화 연애(?)를 하다가 결국 정씨는 손씨를 찾아 청성으로 들어갔다. 손씨도 정씨를 만난 후 주변의 성화로 몇 번 맞선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머릿속에서 정씨의 모습이 떠나지 않더라는 얘기를 하며 `사랑'이라는 말을 아끼고 `인연'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정씨 집안의 반대도 문제였지만 손씨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이야 함께 살겠다고 하지만 혹여 결혼생활을 하다가 손씨가 버림받기라도 하면 그 상처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씨의 다짐과 약속(혼인신고)으로 힘들게 처가에서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둘의 결합을 천지신명에게 고했다. 지금이야 모두들 두 사람의 행복을 마음 깊이 빌어주지만 당시만 해도 둘의 결합을 정씨의 가족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인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결혼생활의 어려움은 둘의 결혼을 인정해주지 않는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만이 아니었다. 정씨 스스로 극복해야 할 부분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현주 낳고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현주 엄마가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예방 접종하고... 신경 쓸 일이 많았거든요."

정씨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손씨를 보살피는 일과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을 함께 해내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 세상도 정씨를 힘들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됐다.

은행이건 병원이건 손외숙씨 혼자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만큼 정씨의 손길이 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냥 행복했다면 거짓말이죠. 힘들 때는 정말 어려웠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정씨의 얘기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앞만 바라보고 달리다보니 심한 피곤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활훈련'이라도 받아봤으면...
"지금이야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어요. 좋지는 않지만 여하튼 집도 마련했고 현주도 티 없이 착하게 잘 자라 엄마에게도 큰 힘이 되니까요."

순탄하지 않게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맺은 인연이라서 그런지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부부로서 갖는 애정을 넘어서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얼마전 사회복지법인 삼육재활센터를 찾았을때 재활훈련을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경기도 광주에 있는 그곳까지 찾아다닐 여건이 되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다는 손씨의 얼굴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재활의 의지를 가진 그녀에게 최소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 두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얻은 따뜻한 가슴을 덮으며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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