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비야리] 고리산 정기 받은 '약샘' 마을의 보배
[군북면 비야리] 고리산 정기 받은 '약샘' 마을의 보배
<1993년 4월 3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3.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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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비야리

해발 5백81m의 고리산. 이 고리산은 옛부터 군북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 아흔아홉 봉우리를 거느리며 산기슭에 24개 마을을 형성시켰다. 옥천의 영산이라고 불리우는 고리산(보통 환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주민들은 고리산이라고 부른다)은 이렇게 여러 마을을 거느리면서도 비야골을 산 아래 첫마을로 꼽았다.


"옛날부터 이 근동에서는 옥천이 제일 높고 그 옥천 중에서도 비야골이 가장 높다는 거여" 유효길(74) 노인회장이 비야골의 유래와 더불어 '배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다 하여 고리산이라고 불리웠던 유래에 대해 설명해준다.

배를 댈 고리가 있다 하여 고리산이라고 명명되었다는 이 설명은 옛날에 이미 이곳이 대청호가 형성되어 배가 내륙 깊숙히까지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해줘 선조들의 예지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한 고리산의 정기가 골짝으로 흘러 탄생시킨 비야골의 '약샘'은 가히 마을의 보배로 통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는 물.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차가운 이 약샘물은 인근 2∼3만평의 논에 충분한 물을 댄다.

이따금씩 방향을 돌리려는 차량들로 인해 상처를 입긴 했어도 바위 틈에서 자라난 향나무는 이 마을 최고령 노인이 어렸을 때에도 크기가 똑같았다고 전해져 적어도 2백년은 되었을 것이라는 주민들의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23가구. 노인인구가 대부분인 비야골 인구는 1백명이 채 안된다. 군북면에서도 증약리를 지나 감노골을 거쳐 비포장길 1km여를 달려야 보게되는 비야골인지라 우선은 교통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다. 이곳에서부터 중약리 국도까지의 거리가 4km가 넘으니 자연 주민들의 소득과도 연관이 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통학에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비야리까지의 옥천버스가 들어온다고는 하지만 날씨가 나쁘다거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면 안들어 오는 일수가 많아 주민들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민들은 두가지 지역개발 소식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 하나가 증약-대정간 도로확포장. 이 도로가 완공될 경우 대정리, 항골리 주민들은 물론 비야골 주민들도 교통편의를 제공받게 돼 더욱 지역개발이 촉진되게 되었다. 감노골까지는 포장이 되었으나 비야골까지 포장이 안돼 불편을 겪던 주민들로서는 청량제였던 셈. 이와 함께 비야골 일대의 관광휴양지 개발소식이 주민들에게 희소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법정주소가 중약리 산 1-1 번지인 이곳에는 한 때 계광건설(대표 육동진)에서 골프장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환경보전과 관련, 무산되고 만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 계획되고 있는 종합관광휴양지는 수렵장, 식물원, 유기장, 수영장 등을 갖출 것으로 알려져 주민들이 대환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최근들어 마을의 분위기가 이렇게 형성되자 주민들은 이를 계기로 도시로 나가 있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을 갖는다.

이 마을의 현재가 있기까지는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상추, 꽈리고추 등의 근교농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논보다는 밭이 더 많은 마을 형편상 주민들은 좀 더 소득이 높은 작물을 선택하게 되었고 상추를 뜯고, 고추를 따 한짐 한짐 대전역 등에 내다 팔아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기를 10여년. 현재까지도 15가구 이상이 이 소득농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근교농업 또한 교통편만 좋으면 더욱 확대될 전망이나 현재로서 특작을 한다 해도 출하수단 등 편의시설이 좋지 않아 특작물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키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의 분포도는 문화유씨와 옥천육씨 문중이 가장 먼저 마을의 터전을 닦은 후 별달리 많은 가구수가 거주하는 성씨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20여가구에 이르는 주민들이 모두들 한 가족같이 살고 있을 뿐. 이 마을에는 시어머니, 아니 친정 어머니 한 분이 계시다. 올해 예순아홉의 오명세 할머니.

젊은 시절부터 상추 등 나물장사를 시작해 5남매를 훌륭히 키웠는가 하면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마을 가구마다 해다 먹일 것 있으면 음식을 해서 나눠주고 아프면 함께 걱정하는 23가구의 집일을 돌봐주면서 어느덧 마을 일이 모두 오 할머니의 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91년 11월 남편인 김문기(38)씨와 함께 비야골로 들어온 부녀회장 김미경(33)씨는 누가 봐도 억척스런 농군이다. 비육우 13마리를 키우며 농어민 후계자이기도 한 김씨는 몸이 편치 않은 시어머니를 비롯, 시부모를 모시며 마을 일에도 열심인지라 주민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류재성 이장이 비육우 40두를 키우며 전업농으로 성장한 비야골은 한겨레신문을 일으킨 송건호씨를 비롯, 많은 출향인들이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현재 비야회(회장 육영환)와 비야향우회(회장 김홍준) 등 출향인 모임이 속속 결성되고 있어 좀 더 활기찬 비야리를 위한 노력이 기대되는 등 전망을 밝게 해준다. '오염'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야리의 봄날이 확포장되는 도로를 달리는 희뿌연 연기속에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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