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正史)의 사육신, 야사(野史)의 사육신
정사(正史)의 사육신, 야사(野史)의 사육신
[오늘의 역사 43]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옥천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3.11.29 00:00
  • 호수 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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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난 백촌 김문기 선생에 대한 사육신(死六臣) 논란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예민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문중간 대결 양상을 띠면서 국사편찬위원회도 어느 한 쪽 편을 든다는 의혹을 받는 복잡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고장 사람들은 백촌 김문기 선생이 세조 때 단종복위를 꾀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유응부 선생 대신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으로 현창했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아직까지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본 김문기 선생의 공적은 인정하지만 지금까지 김문기 선생 대신 유응부 선생이 사육신으로 정해져 왔던 만큼 쉽게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사육신과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 현창에서 빠지게 된 계기를 살펴 사육신 논쟁의 허와 실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사(正史)의 사육신, 야사(野史)의 사육신
단종복위를 꾀한 사건은 수양대군인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데 대해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등 문신인 집현전 학자를 중심으로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시도였다. 즉 박팽년, 성삼문 등 중심 세력과 모의해 세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56년 6월1일 중국(명나라)사신을 맞는 연회장에서 임금 옆에서 모시는 운검(임금의 옆에서 칼을 차고 지키는 구실을 한 무신)인 성승(성삼문 선생의 아버지)과 유응부, 박쟁으로 하여금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을 정사로 보았을 때 정사에서는 김문기 선생을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6명과 함께 별도로 단종 복위를 꾀한 이유를 달아 설명하고 있고 단종복위를 꾀한 중심이 문신이었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곧 왕조실록에는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을 규정하고 있지만 후에 남효온이 개인적으로 쓴 문집인 추강집의 `육신전'에서는 김문기 선생 대신 무신인 유응부 장군이 사육신이라고 전하고 있다. 실록과 육신전 사이에는 적지 않은 부분에서 기록의 차이가 발견된다. 유영박씨가 쓴 `사육신'(동방도서)에서는 그 차이점을 조목조목 밝혀 놓았다.

우선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2년(1456년) 6월8일자에는 백관들을 군기감에 모이게 하고는 사육신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수레로 찢어죽이는 형을 가하고 목을 효수해 3일 동안 매달아 놓았다. 또 여섯 명의 사육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왜 단종복위를 모의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성삼문은 오래도록 벼슬이 제학과 참의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에, 박팽년은 사위 이전의 연고로 항상 화가 미칠까 두려워했고 하위지는 세조에게 견책을 받은 것을, 이개와 유성원은 벼슬이 낮은 것에 불평불만을 했다. 김문기는 박팽년과 족친이었고 친밀히 교제했으며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기로 모의했다고 적고 있다.

이밖에 다른 이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육신전에서 사육신으로 지목한 유응부 장군에 대한 내용은 없다. 따라서 실록에서 이미 여섯 신하를 사육신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종복위를 꾀한 세력들이 어떤 세력들이었는가는 실록에 기록이 보인다. 사육신 등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처형된 다음날 세조는 사면령을 반포하고,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이 주동이 되고 무신인 성승·유응부·박쟁 등을 우익(羽翼·보좌하는 사람)으로 삼아 거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정사에 나오는 사육신 기록 뿐만 아니라 육신전에 보이는 유응부 장군의 벼슬 이름이다. 육신전에는 유응부 장군의 벼슬이 재상이고, 함길도절제사를 지냈으며 거사 당일 성승과 함께 운검으로 지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유 장군은 벼슬이 일종의 대기발령직인 동지중추원사(종 2품,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였고, 함길도 경흥도호부사(종3품)였던 점에서 일단은 틀린 기록이다. 오히려 사육신 중에서 당시 공조판서로 가장 벼슬이 높아 재상을 지냈고, 함길도절제사를 지낸 사람은 김문기 선생 혼자 뿐이라는 점에서 육신전의 사육신 기록은 혼동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육신전에는 유응부 장군이 끝내 고문에 불복해 인두를 불에 달구어 배를 지지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록에는 끝내 고문을 거부하고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이 김문기 선생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국사편찬위에서는 육신전 기록에 의해 사육신 규정
실록과 남효온의 육신전에 나오는 기록이 다른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 선생이 단종복위사건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아직까지 유응부 장군을 사육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지난 1977년 사육신 현창논란에 이어 1982년에는 서울시에서 사육신 묘소에 김문기 선생을 모심으로써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김문기 선생도 사육신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많아졌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의 말로도 김문기 선생이 정사에서는 사육신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사육신으로 현창되지는 않았다며 그 동안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국사편찬위가 이 시점에서 유응부 선생 대신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으로 바꿀 경우 입장의 어려움은 물론 또다시 사육신 논쟁에 휘말리지는 않을까 하는 다분히 정치적 우려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록과 야사인 육신전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해 이제라도 사육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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