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장터는 옥천닷컴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고객 여러분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현재 옥천신문과 옥천닷컴 사이트 간 게시판 정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나은 정보 교류와 장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할것을 약속드립니다.
더 좋은 서비스로 보답하겠습니다.

옥천닷컴 바로가기
여론광장
옥천박물관(博物館 建立) 시동에 박차를 가 하시기를(성씨마을(만성보감:萬姓寶鑑) 절실).
 참옥천사랑
 2019-03-26 20:25:00  |   조회: 1593
첨부파일 : -
지역 역사 문화담을 박물관 건립 시동에 무엇을 진열할것인가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옥천의 산 역사인 역대 옥천군수 명단 결코 빠질수 없습니다,
옥천출생 독립군 의병장 역사 진열 입니다,
가산박물관은 너무 외지므로 신축 박물관으로 옳겨야 합니다.

신라시대 관산성군주(管山城 軍主)각간 우덕 (角干 于德)과 이찬 탐지(伊飡 耽知)
김무력(金武力) 대극지 (大克之 ) 고우도도(高于都刀)
좌군주(左軍主) 水路將軍(수로장군) 박이종(朴伊宗) 이 497년 6월에 관산성주(管山城主)로 신라의 관직을 하사 받다.

명종 임인12년(고려명종 1182년 2월) 管城縣( 沃川)을 廢하였다,
공민왕14년(1365 을사년) 5월 경진일 부원군 이녕(李寧)을 옥주(沃州:沃川)로 유배 보내고 모두 그 가산을 몰수했다.

옥천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관성농민(管城農民)의 반란(反亂)


고려명종 12년(1182) 임인년 2월
옥천농민의 봉기 1182년 충청도의 관성(管城 : 지금의 옥천)에서 수령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관성의 경우는 현령의 착취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주모자와 현령을 처벌해 해결했다.
옥천군 관련 자료 모아 '동학농민혁명사' 발간 류제구 향토사학자

○ 관성현령(管城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백성을 학대하며 침탈하고 음탕하고 거칠기가 한도가 없었으므로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아전과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이 총애하는 홍언의 애기(愛妓: 기생 )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홍언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담당 관원이 하여 해당 관청에서 진상을 조사(안찰신문)한 뒤 사태의 주모자 대여섯 명을 유배(귀양)보내고 홍언도 관직을 박탈해 종신(종신금고)토록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조치했다. 또 부성현령(富城縣令)은 현위(縣尉)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피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온 현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위 휘하의 남녀 관비들을 살해한 후 현령과 현위의 관아를 폐쇄해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해당 관청에서, 관성현과 부성현의 하극상(下剋上)이 심각하니 관직의 명칭을 없애 현령과 현위를 두지 말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신분제 타파 민중운동 !
계룡산 산적으로 불리였던 공주 명학소(鳴鶴所:대전서구 탄방동 남선공원에 망이 망소이 동상)‘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 (망이 망소이가 공주함락 예산현 함락 아주함락, 청주관내 군현 함락, )일어났다 . ...망자(望)를 망(亡)자로 바꾸었다고 생각된다.
순창조씨세보에는 망이를 망금, 망소이를 망학 (淳昌趙氏世譜: 亡金, 亡鶴)으로 이망금(伊亡金:伊望金), 이망학(伊亡鶴:伊望鶴)이다.
智證大師의 어머니 伊氏
미조이(味助伊)

충주이씨시조(忠州(太原)伊氏始祖) 이단취(伊丹取:912년)는 철원 사람으로 궁예의 참모장수로 왕건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고려태조 왕건당시(高麗王建때)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 伊昕巖)이 있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김흔(金忻: 1251년~ 1309년)의 장인이었던 이단취(伊丹取)는 원주(原州) 이씨(伊氏)였다.
후손 - 1930년대 이일보(伊日甫) 2000년도 860명

은천이씨(銀川伊氏) 고려중엽 귀화(高麗中葉 歸化) 총 137가구 411명

고려우왕시대 (禑王時代) 경남고성(固城)에 사는 伊金(이금)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태봉국의 군주며 국왕으로 관심법의 궁예(金弓裔)처럼 힘있는 부족의 이금 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유혹(惑)하여 말하기를 “나는 능히 석가불(釋迦佛)을 모시고 올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 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내가 한 번 작용(作用)하면 풀에서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서는 알곡 열매가 맺힐 것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곡물을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의 말을 믿고 쌀, 비단, 금, 은을 그에게 시여(施與)하였는데 서로 뒤질세라 빨리 갖다 바치느라고
분주하였다.
또 말, 소가 죽어도 먹지 않고 내버렸으며 돈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조리 다 나눠 주었다.

이금(伊金)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을 내려 산천의 귀신들을 파견하게 된다면 왜적은 다 붙잡을 수 있다”라고도
하였다. 무격(巫覡-남녀 무당)들이 그를 더욱더 존경하고 신임하여 성황사묘(城隍祠廟-토신‘土神’의
사당)를 헐어 버렸으며

이금을 부처님처럼 섬기고 그에게 복리를 달라고 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덩달아 따라 나서서 이금(伊金)의 제자라고 자칭 하면서 서로 거짓말로 속이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지방 수령(守令)들도 나와서 맞이하고 객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청주에 오자 권화는 그 무리들을 유인 하여다가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다 급히 보고하니
도당(都堂)에서는 여러 도(道)에 공문을 띄워서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판사 양원격(判事 楊元格)이 그 교설(巧說)을 믿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를 수색하여 붙들어다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내었더니 그는 도중에서 죽어 버렸다.

고려 정부에서까지 논할 만큼 큰 규모 였음을 잘 알수있다.
승려 찬영(僧 粲英)이 말하기를 「이금(伊金)이 말한 바는 모두 황당무계하고 그 말에 해와달(日月)이 빛이 없으리라 함은 더욱 가소(可笑) 로우니 국인(國人)들이 어찌 이같은 것을 믿으리요」라고 하니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이금석가(伊金釋迦)는 그 말이 다름없으나 다만 석가(釋迦)는 멀리 타생(他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이 그 허망(虛妄)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伊金)은 가까이 3월(三月)의 일을 말하니 허망(虛妄)함이 곧 나타날 뿐이라」하니 승려찬영(粲英)이 말문(黙然)이 막혔다.
고려말기(高麗末期) 일반 하층민들의 기아로 부터의 해방, 괴로움의 대상이 되는 왜구의 격퇴와 같은 희망(希望)을 읽을수 있으며,
그것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 부응하는 신앙형태인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고려말 (공민왕시대)왜구의 침입(倭寇의 侵入)

일부 왜구는 육지로 간신히 도망쳐 옥주(沃州:沃川)로 몸을 피했으며,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터이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 당했다. 

동학운동(東學運動)의1883년 충북 옥천에서 간행된 목판본(木版本) 용담유사(龍潭遺詞)
옥천은 동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닌 고장입니다.
동학 제2대 교주이자 1894년 당시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촉구하며 재기포령을 내린 곳이 바로 우리고장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옥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분지가 옥천군의 중앙에 버티고 있고 능선이 조밀하게 둥근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으며 그 바깥으로 금강의 지류가 다시 한 번 둘러싸고 있다. 옥천읍구역의 실개천은 금강본류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 옥천(沃川)은 의연(依然)이 산수기려(山水奇麗)하고 민속순후(民俗淳厚)한 충북(忠北)의 낙지(樂地).

유독 옥천(惟獨 沃川)은 타지방(他地方)의 부호(富豪)들이 모여든다, 현재(現在)에 옥천(沃川)의 수부(首富人)인이 충북(忠北)의 거부(巨富)라 가위(可謂)할 오윤묵군(吳允黙君)도 경성(京城)에서 이래(移來) 하였고 오씨는 원래 함경도인으로 이용익 시대에 부자가 되었다(吳氏는 元咸鏡道人으로 李容翊時代에 猝富가 되었다)

근일(近日)에도 진주갑부(晋州富豪)로 경향간(京鄕間)에 문제(問題)가 다(多)한 김기태군(金琪邰君)이 역시 이주(亦是 移住)하려고 7천여원(七千餘圓)의 거금(巨金)으로 광대(廣大)한 기지(基地)를 매수(買收)하고
경성(京城)의 명공명장 40여인(名工明匠 四十餘人)을 모집(募集)하야 가지고 8만원(八萬圓)인가 10만원 예산(十萬圓 豫算)으로 굉걸(宏傑)할 신아방궁(新阿房宮)을 건축(建築)하는 중(中)이다

이것이 장래 옥천인(將來 沃川人)의 복(福)이될지 화(禍)가될지 부지(不知) 하거니와 사방(四方)의 부호(富豪)들이 자주 모여 드는 것은 사실(事實)이다. ]

만성관(萬姓館)을 두어 3백가지가 넘는 성씨(姓氏)들을 모두 진열하면 누구나 애착과 공감이 갈것입니다.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군수500년사 (郡守 五百年史),옥천 (沃川)에 뿌리내린 성씨집대성 제안(姓氏 集大成 提案 )

충북옥천에 뿌리내린 성씨
옥천김씨(沃川金氏)/옥천유씨( 沃川柳氏)옥천육씨(沃川陸氏)/옥천이씨(沃川李氏)
옥천장씨(沃川張氏)/옥천정씨(沃川鄭氏)/옥천한씨(沃川漢氏)/옥천유(沃川劉氏)
옥천황씨(沃川黃氏) 옥천임씨(沃川林氏) 옥천전씨(沃川全氏)/옥천박씨 (沃川朴氏) 청산박씨 (靑山朴氏)

尙州 雄州典故 ( 상주웅주전고 )金寧金氏 ( 김녕김씨 )편 3. 현조 顯祖 의 행적行跡 및 사례事例 등 2곳에 기록이 등제 되어 있다.
청산김씨(靑山金氏) 시조 김치제(金致濟)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그는 조선조 예종 1년 추장문과(秋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선교랑(宣敎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적(事蹟)이 없어서 확실한 세계(世系)와 본관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상고할 길이 없다. 선교랑(宣敎郞)은 조선시대 종육품(從六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육품의 상계(上階)로서 선무랑(宣務郞)보다 상위 자리이다. 처(妻)에게는 의인(宜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한편 시조 김치제(金致濟)의 후손들은 후에 청산(靑山-옥천군에 속해 있는 면)을 본관으로 삼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후손 가운데 만산(晩山) 김유수(金裕壽)는 영조 3년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결국 산야에 은거하며 독서를 즐겨 많은 문집을 남겼다. 뒤에 나라에서 추천하여 영릉참봉을 제수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청산김씨(靑山金氏)는 김사한(金士翰)의 후손 또는 신라 김씨(新羅 金氏)와 동원(同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청산김씨(靑山金氏)는 조선시대에

김주(1627 丁卯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김보(金輔, 1615 乙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희경(金喜慶, 1726 丙午生) : 음양과(陰陽科) 영조30년(1754) 증광시 등 모두 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분야별로는 무과 2명, 음양과 1명이다.

본관 청산(靑山)은 현재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의 지명이다. 본래는 신라 굴산현(屈山縣)이었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6) 기산현(嗜山縣)으로 고치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청상현으로 개칭하여 상주(尙州)에 속하게 하였다. 1414년(태종 14) 황간현(黃澗縣)과 합하여 황청현(黃靑縣)이라 하였으나, 후에 다시 분리해서 청산현으로 복구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청산군으로 승격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동면의 가지, 의동, 한곡, 효림, 목동, 판수, 인정의 7개리와 북면의 내례곡, 외례곡, 가삼, 사방, 명월, 척치, 법곡, 화동, 성촌, 대사전, 월남, 상만월, 하만월 등13개 동리와 군내면의 국화동을 병합하여 청산군의 이름을 따서 청산면이라 하여 옥천군에 편입시켰다. 1895년 의지, 효목, 판수, 한곡, 인정, 교평,백운, 지전, 예곡, 삼방, 명티, 법화, 대성, 만월리 등 18개리로 개편 오늘에 이른다.

청산(靑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청산김씨(靑山金氏), 청산박씨(靑山朴氏), 청산신씨(靑山申氏), 청산심씨(靑山沈氏), 청산정씨(靑山鄭氏) 등이 있다.
옥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옥천김씨(沃川金氏), 옥천유씨(沃川劉氏), 옥천육씨(沃川陸氏), 옥천이씨(沃川李氏), 옥천장씨(沃川張氏), 옥천전씨(沃川全氏), 옥천정씨(沃川鄭氏), 옥천한씨(沃川漢氏), 옥천황씨(沃川黃氏) 등이 있다.

족보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보니 어느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그 지방에 뿌리내린 입향조에서 부터 빠짐없이 조사하여 책을 만들었음 을 보았습니다,
옥천에서도 향토사연구 차원에서 세세하게 자료를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각마을 마다 비치하면 온고이지신이 되고 잃어버리기 쉬운 옛 역사를 결코 잊지 않을것입니다,
교동 삼정승댁만 하드라도 누군가 자료를 찾아서 만들어 놓았다면 전설처럼 어느때 이름 모르는 정승이 살았다고 하드란다 라고는 하자 않았을 것입니다,

옥천군 지명 연구, 충북대(교석론) 오상학 규장각의 '옥천읍지' 한글로 문화 문화연재 옥천의 도서 규장각의 '옥천읍지' 한글로충북과학대 김종구 교수, 국역사업 완료 황민호 기자
▲ '옥천읍지' 표지 대락 170여년 전 옥천의 모습은 어땠을까? `동안리는 옥천관문...문화원 - 옥천읍지 한글번역사업 옥천읍지 한글번역사업 추진 이안재 기자
▲ 지난 18일 문화원 임시총회 현장. 옥천문화원(원장 이인석)이 옥천읍지를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문화원에서는 지난 18일 50여명의...호서읍지(규12176)_옥천 규장각 소장『호서읍지』(奎 12176) 6권에 수록된 충청도 옥천군의 그림식 지도다. 옥천군은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고을이었던 이산현․안읍현․양산현을 병합하여 큰 고을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옥천의 역사 인물
정지용, 송건호, 정순철 선생 충절의 역사인물인 송정 전팽령, 전식, 전유 선생 경재 남수문, 괴정 오상규 선생 유학자 수옹 송갑조, 입재 송근수, 고암 정립 선생,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동천 이충범, 김현구, 김철수, 허상기 선생, 옥봉 이숙원, 육정수, 전형, 이은방 정구삼, 신각휴, 육인수, 청람 정구영, 박준병 등의 정치인. 하동철, 석전 육지수, 소정 정구충 교육자와 검도개척자 이교신, 권투세계 챔피언 이열우.  

歷代 沃州,沃川郡守 五百年史 (성씨별 11명 현감, 107명.역대 옥주.옥천군수 500년사 )

가, 管城縣令 洪彦 홍언 (고려명종시대)
나, 管城縣令 方得世 방득세( 고려충선왕시대)

1. 沃川縣監 郭 詩 곽 시
2. 沃川縣監 金정 김 정
3. 沃川縣監 權乙均 김을균
4. 沃川縣監 趙興賓 조흥빈
5. 沃川縣監 景閔 경 민
6. 沃川縣監 李景閔 이경민
7. 沃川縣監 延井潔 정정결
8. 沃川縣監 延懿男 연의남
9. 沃川縣監 申洬 신 속
10. 沃川縣監 韓有良, 한유양
11. 沃川縣監 韓德及, 한덕급

조선(朝鮮) 초(初) 군사(郡事)는 군수(郡守)에 해당(該當)하는 관직(官職).
1. 沃川郡守 高孟英 고맹영
2. 沃川郡守 權慶男 권경남
3. 沃川郡守 權 慜 김 민
4. 沃川郡守 權希仁 권희인
5. 沃川郡守 權希仍 권희잉
6. 沃川郡守 金承璿 김승선
7. 沃川郡事 金 畝 김 무
8. 沃川郡守 金 政 김 정
9. 沃川郡守 金永錫 김영석
10. 沃川郡守 金錫弼 김석필
11. 沃川郡守 金炳始 김병시
12. 沃川郡守 金炳基 김병기
13. 沃川郡守 金命洙 김명수
14. 沃川郡守 金蓋國 김개국
15. 沃川郡守 金履基 김이기
16. 沃川郡守 金映璧 김영벽
17. 沃川郡守 金禧年 김희년
18. 沃川郡守 金悌甲 김제갑
19. 沃川郡守 金得男 김득남
20. 沃川郡守 金東敏 김동민
21. 沃川郡守 南 祚 남 조
22. 沃川郡守 宋國澤 송국택
23. 沃川郡守 宋 欽 송 흠
24. 沃川郡守 宋秉一 송병일
25. 沃川郡守 徐命孚 서명부
26. 沃川郡守 徐希呂 서희려
27. 沃川郡守 徐應麟 서응린
28. 沃川郡守 成彛鎬 성이호
29. 沃川郡守 申鉉九 신현구
30. 沃川郡守 申彦裕 신언유
31. 沃川郡事 李 敢 이 감
32. 沃川郡守 李世晟 이세성
33. 沃川郡守 李自新 이자신
34. 沃川郡守 李斗陽 이두양
35. 沃川郡守 李弘幹 이홍간
36. 沃川郡守 李興瑞 이흥서
37. 沃川郡守 李興老 이흥로
38. 沃川郡守 李啓弼 이계필
39. 沃川郡守 李景珍 이경진
40. 沃川郡守 李景潤 이경윤
41. 沃川郡守 李舟臣 이주신
42. 沃川郡守 李錫珪 이석규
43. 沃川郡守 李鳳朝 이봉조
44. 沃川郡守 李 泓 이 홍
45. 沃川郡守 李 著 이 저
46. 沃川郡守 李彦憬 이언경
47. 沃川郡守 李仁老 이인노
48. 沃川郡守 李亨正 이형정
49. 沃川郡守 李 選 이 선
50. 沃川郡守 李 逢 이 봉
51. 沃川郡守 李 褆 이 제
52. 沃川郡守 李敦相 이돈상
53. 沃川郡守 李逢之 이봉지
54. 沃川郡守 李憲儒 이헌유
55. 沃川郡守 閔 漬 민 지
56. 沃川郡守 閔元鏞 민원용
57. 沃川郡守 朴之謙 박지겸
58. 沃川前郡守 朴鳳夏 박봉하
59. 沃川郡守 朴成健 박성건
60. 沃川義兵將前郡守 朴正彬 의병장 박정빈
61. 沃川郡守 朴星漢 박성한
62. 沃川郡守 兪廷煥 유정환
63. 沃川郡守 兪 泓 유 홍
64. 沃川郡守 柳克恭 유극공
65. 沃川郡守 柳壽長 유수장
66. 沃川郡守 柳德新 유덕신
67. 沃川郡守 林世謙 임세겸
68. 沃川郡守 任喆宰 임철재
69. 沃川郡守 禹克進 우극진
70. 沃川郡守 尹 抗 윤 항
71. 沃川郡守 延嗣宗 연사종
72. 沃川郡守 安允升 안윤승
73. 沃川郡守 安駉壽 안경수
74. 沃川郡守 吳允默 오윤묵
75. 沃川郡守 吳在文 오재문
76. 沃川郡守 趙 倓 조 담
77. 沃川郡守 趙秉文 조병문
78 .沃川郡守 趙尙紀 조상기
79. 沃川郡守 趙性憙 조성희
80. 沃川郡守 趙公瑾 조공근
81. 沃川郡守 趙鍾淳 조종순
82. 沃川郡守 趙駿九 조준구
83. 沃川郡守 趙裕壽 조유수
84. 沃川郡守 鄭士偉 정사위
85. 沃川郡守 鄭基豊 정기풍
86. 沃川郡守 鄭忠弼 정충필
87. 沃川郡守 鄭道源 정도원
88. 沃川郡守 洪祐奭 홍우석
89. 沃川郡守 洪祐慶 홍우경
90. 沃川郡守 洪在昇 홍재승
91. 沃川郡守 洪鍾英 홍종영
92. 沃川郡守 黃演秀 홍연수
93. 沃川郡守 黃鍾林 황종림
94. 沃川郡守 黃有定 황유정
95. 沃川郡守 沈仲良 심중양
96. 沃川郡守 沈 鏞 심 용
97. 沃川郡守 沈 攸 심 유
98. 沃川郡守 張麒禎 장기정
99. 沃川郡守 張世哲 장세철
100. 沃川郡守 張 陸 장 육
101. 沃川郡守 洪益大 홍익대
102. 沃川郡守 崔善門 최선문
103. 沃川郡守 崔汝澣 최여한
104. 沃川郡守 韓善一 한선일
105. 沃川郡守 韓弘裕 한홍유
106. 沃川郡守 韓有良 한유양
107. 沃川郡守 韓 詮 한 전

옥천의 문화유산(沃川의 文化遺産)
교동리비석군 16기의 비석들.대체로 관찰사 및 군수들의 선행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로서 바닥에 기단을 만들고 2열로 비석을 배열하고 있다.

1. 趙秉文 不忘碑(조병문 불망비) - 전면 중앙에 “郡守趙侯秉文永世不忘碑”(군수조후병문영세불망비)라 적고 있으며, 후면에 “同治元年 壬戌 ○月日”동치원년(1862년, 청나라 목종)임술○(元자 뚜렷하게 남아있음)월일 이라 적고 있다.전고 127㎝, 비폭 48㎝, 두께 23㎝의 화강암으로 조성했으며 별다른 조식은 없다.

2. 李敦相 不忘碑(이돈상 불망비) - 전면에는 “郡守李侯敦相永世不忘碑”(군수이후돈상영세불망비)라 적고, 후면에는 “同治二年 正月日”동치이년(1863년, 청나라 목종) 정월일 이라 적고 있다.(향지에는 李相敦으로 되어있음) 전고 165㎝, 비폭 46, 두께 23㎝에 폭 83㎝, 두께 52㎝, 높이 34㎝의 이수를 얹었다.

3. 宋秉一 善政碑(송병일 선정비) - 전면에 “郡守宋侯秉一愛民善政碑”(군수송후병일애민선정비)라 적고, 후면에는 : 咸豊十一年 辛酉 七月日“함풍십일년(1861년, 청나라 문종) 신유 칠월일 이라 적고 있다. 전고 147㎝, 비폭 50㎝, 두께 24㎝에 폭 80㎝, 두께 52㎝, 높이 36㎝의 이수를 얹었다.

4. 韓善一 淸謹明政碑(향지에는 淸勤明政碑勤자로 되어있음)(한선일청근명정비) - 전면에 “郡守韓侯善一淸謹明政碑”(군수한후선일청근명정비)라 적고, 후면에는 “崇禎十三年 ○○ 十二月日(日자 누락)”숭정십삼년(1640년, 명나라 의종) ○○ 십이월일 이라 적고 있다. 전고 143㎝, 63㎝, 21㎝에 이수나 비갓은 없다.

5. 朴鳳夏(향지에는 朴鳳愛로 되어있음) 不忘碑(박봉하 불망비) - 전면에 “郡守朴侯鳳夏永世不忘碑”(군수박후봉하영세불망비)라 적고, 후면에는 “同治六年 九月日”동치육년(1867년, 청나라 목종) 구월일 이라 적고 있다. 전고 165㎝, 비폭 54㎝, 두께 22㎝에 폭 92㎝, 두께 73㎝, 높이 42㎝의 이수를 얹었다.

6. 趙裕壽 善政碑(조유수 선정비) - 전면에 “郡守趙侯裕壽淸簡善政碑”(군수조후유수청간선정비)라 적고 있다. 전고 143㎝, 비폭 55㎝, 두께 23㎝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

7.(15번) 吳允 頌德碑 (향지에는 訟德碑로 되어있음)(오윤묵 송덕비) - 전면에 “道評議員吳允40665;頌德碑”(도평의원오윤묵송덕비)라 적고 있으며, 전고 145㎝, 비폭 43㎝, 두께 22㎝에 폭 72㎝, 두께 55㎝, 높이 32㎝의 이수를 얹었다. 전고 170㎝, 비폭 44㎝, 두께 24㎝에 폭 75㎝, 두께 56㎝, 높이 42㎝의 이수를 얹고 있다.

9.(7번) 黃鍾林 不忘碑(황종임 불망비) - 전면에 “郡守黃侯鍾林永世不忘碑”군수황후종임영세불망비)라 적고 있다. 전고 137㎝, 비폭 51㎝, 두께 23㎝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

10.(8번) 金命洙 惠德碑(김명수 혜덕비) - 전면에 “○○○○○觀察使金公命洙惠德碑”(○○○○○관찰사김공명수혜덕비)라 적고, 후면에 “光武八年 十一月日”광무팔년(1904년, 조선 고종) 십일월일 이라 적고 있다. 전고 105㎝, 비폭 42㎝, 두께 20㎝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이 없고, 좌측 상부가 일부 파손된 상태이다.

11.(9번) 金炳始(향지에는 金炳治로 되어있음) 不忘碑(김병시 불망비) - 전면에 “觀察使金公炳始永世不忘碑”(관찰사김공병시영세불망비)라 적고 있다. 전고 121㎝, 비폭 44㎝, 두께 23㎝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

12.(10번) 成彛鎬(향지에는 成鎬彛로 되어있음) 不忘碑(성이호 불망비) - 전면에 “觀察使成公彛鎬永世不忘碑”(관찰사성공이호영세불망비)라 적고 있다. 전고 145㎝, 비폭 45㎝, 두께 20에 폭 70㎝, 두께 52, 높이 26㎝인 이수를 얹었다.

13.(11번) 洪在昇 不忘碑(홍재승 불망비) - 전면에 “行郡守洪侯在昇(昇자가 아닌 것 같음)永世不忘碑”(행군수홍후재승영세불망비)라 적고 있다. 전고 118㎝, 비폭 40㎝, 두께 18㎝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

14.(12번) 趙鍾淳 不忘碑(조종순 불망비) - 전면에 “行郡守趙侯鍾淳永世不忘碑”(행군수조후종순영세불망비)라 적고 있다. 전고 112㎝, 비폭 35㎝, 두께 17㎝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

15.(13번) 趙駿九 不忘碑(조준구 불망비) - 전면에 “行郡守趙侯駿九永世不忘碑”(행군수조후준구영세불망비)라 적고 있다. 전고 114㎝, 비폭 40㎝, 두께 24㎝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

16.(14번) 金履基 不忘碑(김이기 불망비) - 전면에 “郡守金候履基永世不忘碑”(군수김후이영세불망비)라 적고, 후면에는 “乾隆 丙午(1786년, 청나라 고종) 十月日”(건륭 병오 십월일)라 적고 있다. 전고 119㎝, 비폭 50㎝, 두께 22㎝로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은 없다.0. 高孟英 1551년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가, 1553년 옥천군수로서 선정을 베푼 공으로 명종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충북 음성 전 유엔사무총장 생가방문 돌에 족보를 새긴 석보(石譜)를 보았습니다, 요즘 전시되는 다양한 옛적 족보처럼 아래 성씨들을 전시관에 전시하면 누구나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소문이 나면 많은이들이 방문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 우리가족 (우리나라 성씨(姓氏) 성씨 마을 (만성대:萬姓臺)

가 (賈) 가(價) 간 (簡) 간(干) 갈 (葛) 갈(碣) 감 (甘) 강 (姜) 강 (康) 강 (强) 강 (彊) 강 (剛) 개 (介) 개(蓋) 건(騫) 견 (堅) 견 (甄) 경 (慶) 경 (景) 경(卿) 경(敬) 경(庚) 경(耿) 결(決) 겹(袷) 계 (桂) 계(季) 계(溪) 계(啓) 고 (高) 고(顧) 고(固) 곡 (曲) 곡(谷) 공 (孔) 공 (公) 공(貢) 공(空) 공(恭) 공(功) 공(龔) 공손(公孫) 골(骨) 과(瓜) 괴(槐) 귀(歸) 곽 (郭) 곽(霍) 관(寬) 관(官) 광(光) 광(廣) 구 (具) 구 (丘) 구 (邱) 구(裘) 국 (鞠) 국 (國) 국 (菊) 군 (君) 궁 (弓) 궁(宮) 궉 (鴌) 권 (權) 근 (斤) 금 (琴) 기 (奇) 기 (箕) 기(起) 기(祈) 길 (吉) 금(黔) 극(克) 김 (金)

나/라 (羅) 남 (南) 남궁 (南宮) 낭/랑 (浪) 나(那) 내(乃) 내(奈) 노/로 (盧) 노/로 (魯) 노/로 (路) 뇌/뢰 (雷) 뇌 (賴) 누 (樓) 능(能) 녕(寗)

단 (段) 단 (單) 단 (端) 담 (譚) 당 (唐) 대 (大) 대(對) 대(戴) 도 (都) 도 (陶) 도 (道) 도(刀) 독(獨) 독고 (獨孤) 돈 (頓) 돈 (敦) 돈(豚) 동 (董) 동(童) 동(東) 동(董) 동방 (東方) 두 (杜) 덕(德) 돌(突) 등(登)

류 (柳) 림(林) 렴씨/廉 렴씨/濂 랑씨/浪 로씨/路 로씨/蘆 락씨/絡 량씨/良 량씨/凉 래씨/來 력씨/力 륙씨/六 례씨/禮 록씨/綠 률씨/律 리씨/離

마 (馬) 마 (麻) 만 (萬) 만(漫) 망절 (網切) 매 (梅) 맹 (孟) 명 (明) 모 (牟) 모 (毛) 몽(蒙) 묘 (苗) 목 (睦) 목(木) 묵 (墨) 문 (文) 문(門) 물(物) 미 (米) 민 (閔)

박 (朴) 반 (潘) 반 (班) 방 (方) 방 (房) 방 (龐) 방(芳) 방 (邦) 배 (裵) 백(栢) 백(白) 범 (范) 범 (凡) 범(泛) 변 (卞) 변 (邉) 별(別) 보(甫) 복 (卜) 봉 (奉) 봉 (鳳) 부 (夫) 부(傅) 부(斧) 부(部) 부(附) 북(北) 비(丕) 빈 (賓) 빈(彬) 빙 (氷)

사 (史) 사(佘) 사(舍) 사(謝) 사(沙) 사(思) 사마(司馬) 사공 (司空) 산(山) 삼 (森) 상 (尙) 상(常) 상(相) 상(桑) 상(象) 상(嘗) 쌍(雙) 서(徐) 서 (西) 서문 (西門) 서(書) 서(瑞) 섭(聶) 석 (昔) 석 (石) 석(釋) 석(碩) 석(席) 석말(石抹) 선 (宣) 선(先) 선(善) 선(鮮) 선우 (鮮于) 설 (薛) 설 (卨) 설(偰) 설(雪) 설(楔) 섭 (葉) 성 (成) 성 (星) 소 (蘇) 소 (邵) 소(肖) 소씨(素) 소(逍) 소(召) 소(㸴) 소봉 (小峰) 손 (孫) 송 (宋) 송 (松) 수 (水) 수 (洙) 수(輸) 수(守) 수(隨) 수(壽) 수(輸) 숙(叔) 순 (荀) 순(洵) 순 (舜) 순 (淳) 순 (順) 승 (昇) 승 (承) 승(乘) 승(勝) 시 (柴) 시(時) 시 (施) 신 (申) 신 (辛) 신 (愼) 신(莘) 심 (沈) 심(尋) 십 (辻) 색(索) 색리(穡籬)

아 (阿) 안 (安) 악(岳) 앙(仰) 애 (艾) 야 (夜) 양/량 (梁) 양 (楊) 양 (樑) 양 (陽) 양(揚) 어 (魚) 어(於) 어금(魚金) 엄 (嚴) 여 (呂) 여 (余) 여(汝) 여(斾) 연 (延) 연 (連) 연 (燕) 염 (廉) 염(閻) 엽(葉) 영 (永) 영(英) 영(泳) 영(榮) 애(艾) 예 (芮) 예(乂) 예(倪) 예(藝) 오 (吳) 오 (伍) 오(吾) 오(午) 요(要) 옥 (玉) 온 (溫) 옹 (邕) 옹 (雍) 옹(翁) 왕 (王) 요 (姚) 용 (龍) 우 (于) 우 (禹) 우(牛) 우(祐) 우(遇) 우(芋) 우(芋) 욱(郁) 운(芸) 운 (雲) 원 (元) 원(原) 원(袁) 위 (魏) 위 (韋) 위(爲) 유 (劉) 유 (兪) 유 (庾) 유 (柳) 육 (陸) 윤 (尹) 은 (殷) 음 (陰) 응(應) 이 (李) 이 (伊) 이 (異) 일(日) 인 (印) 임 (任) 임/림 (林)

자(柘) 자 (慈) 장(長) 장 (張) 장(將) 장 (蔣) 장 (莊) 장 (章) 장(場) 장(庄) 전 (全) 전 (田) 전 (錢) 전(專) 점 (占) 정 (鄭) 정 (丁) 정 (程) 정(井) 정(廷) 정(貞) 적(狄) 제(第) 제(堤) 제 (諸) 제갈 (諸葛) 조 (趙) 조 (曺) 종 (鍾) 종(種) 종 (宗) 주 (周) 주 (朱) 주(珠) 준 (俊) 즉(則) 증(曾) 즙 (汁) 지 (池) 지 (智) 지(遲) 진 (陳) 진 (晋) 진(晉) 진 (眞) 진 (秦) 진(震) 좌 (坐) 좌(左) 좌(佐) 재(才)

차 (車) 창 (昌) 창 (倉) 채 (蔡) 채 (菜) 채 (采) 책(翟) 책(冊) 척 (拓) 천 (千) 천 (天) 천(遷) 초 (肖) 초 (楚) 초 (初) 촉(燭) 최 (崔) 추 (秋) 추(追) 춘 (椿) 충(忠)

파(巴) 판 (判) 판(板) 팽 (彭) 편 (片) 편 (扁) 평 (平) 포 (包) 표 (表) 표(標) 풍 (馮) 풍(酆) 피 (皮) 필 (弼)

하 (河) 하(何) 하 (夏) 하(賀) 학 (郝) 한 (韓) 한 (漢) 함 (咸) 합(合) 합호(合狐) 향(香) 해 (海) 해(解) 행(幸) 허 (許) 현 (玄) 현(縣) 형 (邢) 혁(赫) 협(俠) 호 (扈) 호 (胡) 호 (鎬) 호(好) 후(后) 홍 (洪) 홍(弘) 화 (化) 화(花) 화(華) 환 (桓) 황 (黃) 황보 (皇甫) 혜(嵆) 흔(昕) 환(桓)

한글로 적어서는 분간을 할수 없다.
이 경우 漢字는 밝히지 않고 한글로만 쓰도록 내버려두면, 머지 않아 뿌리를 잃어버린〈한글종씨〉판이 되고 만다.

또 複姓(복성)인 경우도 한글로만 쓰면 남궁(南宮)씨는 남(南)씨와, 동방(東方)씨는 동(董)씨와, 사공(司空)씨는 사(史) 사(謝) 사(舍)씨와, 서문(西門)씨는 서(徐) 서(西)씨와, 선우(鮮于)씨는 선(宣) 선(先)씨와, 제갈(諸葛)씨는 제(諸)씨와, 황보(皇甫)씨는 황(黃)씨와 헷갈리기 쉬운 성씨이다.

1975년 인구 조사에서는 影(영)氏와 松(송)氏가 새로 나타났고,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960년에 있었던 濂(염) 碩(석) 先(선) 閻(염) 恩(은) 應(응) 鮑(포) 旁(방)氏 등 8姓은 없어지고,
苗(묘) 秏(학) 橋(교) 傅(부) 潭(담) 榮(영) 齊(제) 欒(난) 候(후) 梒(집) 鎬(호) 桓(환) 頭(두) 樓(누) 邸(저) 初(초) 椿(춘) 興(흥)氏 등과, 複姓으로 魚金(어금) 網切(망절) 岡田(강전) 長谷(장곡) 小峰(소봉)氏 등 23姓이 새로 생겨났다.

오늘날 세계는 바로 뿌리의 시대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 (民族)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초 (雜草)와 무었이 다르랴.
그래서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에 누구나 자손(子孫)을 가족 (家族)을 정확하게 알 수 있고 .또 한 가족(家族)이 없어지면 무리를 해서라도 찿 으려 한다.

하물며 짐승도 자기 뿌리는 안다 하여 인간이 어이없는 짖을 하면. 짐승만도 못 하다 하지 않던가. 옛 어른들 말씀인 즉 천(千)가지 성(姓) 과 민(萬)가지 본(本)이라 하던데. 정말로 많 습니다.

여기 문헌(文獻)에는 있고 나타나 있지 않은 본관(本貫)을 더하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구인가

뿌리가 없으면 꽃도 못 피우고 열매도 맺지못한다
씨없이 뿌려져 뿌리가 박힌 나무가 없듯이
성씨없이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나의 뿌리는 무엇이며
시조는 누구인가
무슨파 누구의 자손인가
뿌리를 알면 조상을 알고
조상을 알면 유적을 알고 유적을 알면 역사를 안다

뿌리를 바로 알고 조상의 업적을 기리며
충효로 삶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굵은 뿌리 멀다하고 잔 뿌리만 가깝다고 일가이랴
뿌리깊은 나무가 가지가 많으며

가지많은 나무 바람잘날 없어도
꿋꿋이 지켜온 가문의 역사!
2019-03-26 20:25:00
112.xxx.xxx.1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과객이 2019-04-15 17:18:49 121.xxx.xxx.104
옥천군민 모두 대동 단결로 잊지 맙시다.
고려말 우왕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진포에서 패배한 왜구들의 상당수가 퇴로를 잃고 내륙으로 이동하여
현 충북 옥천인 옥주(沃州)까지 도망쳤다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양민들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

나그네 2019-04-03 13:11:21 119.xxx.xxx.147
충절의 고장 옥천, 역사의 고향 옥천에
박물관 건립은 전국의 박물관과 비교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도록 탄생 되었으면 합니다.

지나는이 2019-03-27 12:36:27 223.xxx.xxx.216
처음몇줄빼고는 복사해서 같다붙인글인거같네요

123123123 2019-03-26 21:20:42 220.xxx.xxx.241
항상 글쓰실때 한문 쓰시는분인줄은 모르겠는데
혹시 기록지 같은겁니까?

나중에 두고 보시려고 한자로 쓰시는겁니까?
제가 무식한건지 뭔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글쓴이분 대단한 학식이 있다는건 알겠는데...

이제 우리나라에 한자가 거의 없어졌지 않습니까???
글쓰시는건 좋지만, 알아볼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냥 읽다가 막혀서 저 혼자 너무 화나요 ㅠㅠ

여론광장
#번호 제목 닉네임 첨부 날짜 조회
공지 옥천신문 게시판 운영원칙 (8)HOT 옥천신문 - 2006-11-18 530843
15719 썩어빠진 새마을기 좀 그만 답시다!NEW 적폐청산 - 2019-05-26 5
15718 비밀 도시재생사업 본격 추진NEW 우리고장의 꿈 - 2019-05-26 71
15717 청소년수련관 앞 사거리 유턴 (1) 옥천인 - 2019-05-24 338
15716 네티즌장터 이건 무슨 꼼수인가? (1) 옥천인 - 2019-05-24 448
15715 네티즌장터 무슨코미디인지 (2) ㅇㅇ - 2019-05-23 579
15714 네티즌장터 (1) 궁금 - 2019-05-23 422
15713 또 교체해요? 보도블럭 (4) 보도블럭 - 2019-05-21 763
15712 '알립니다'로 이동합니다 김주현 - 2019-05-15 399
15711 제32회 지용제를 돌아보면서 (2) 이리님 - 2019-05-14 919
15710 지용제에 대한 느낌 군민 - 2019-05-14 691
15709 지용제 왜 이러나? (3)HOT 허허실실 - 2019-05-14 1148
15708 돌람산 체력단련기구 수리해 주세요 박범수 파일첨부 2019-05-14 340
15707 네티즌장터 (1) 아지매 - 2019-05-13 470
15706 지용제너무비싸요 (2) 이사님 - 2019-05-12 939
15705 박정희 사망공작 일지 (1) 박한수 파일첨부 2019-05-12 462
15704 지용제 홍보 제안 합니다. (1) 옥천인 파일첨부 2019-05-12 538
15703 옥천 볼만한 관광지 (2) 보zl건빵 - 2019-05-09 809
15702 제발 도로 개선 좀 해주세요 옥천직장인 - 2019-05-08 741
15701 해병대전우회의 무료보트타기 체험과 관련하여 이리님 파일첨부 2019-05-07 546
15700 어린이날 행사 옥천군민 - 2019-05-07 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