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大王은 檀君祠堂을 세웠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성군으로 유명하지만, 세종 7년, 평양에 단군사당을 세웠다. 이어 세조는 歷代 임금 最初로 檀君殿에 參拜했다.
1425년 정척(鄭陟)은 단군이 기자묘에 배향된 데 문제를 제기했다.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해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논의 끝에 1429년(세종 11)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가 건립됐다.]
세조는 단군전 참배에 나섰다. 1460년 10월 4일 한양을 떠나 파주를 지나 개성을 거쳐 15일 평양에 도착했다. 17일 단군사당에서 친히 제사를 거행했다. 신주를 ‘조선시조단군’이라고 썼다. 김성환 박사(경기도박물관)는 “단군이 국조임을 공인한 것”이라며 “(친제는) 자신의 왕위계승이 고조선 단군과 이를 이은 고구려 동명왕을 계승했음을 승인받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檀君은 곰의 아들 아니다,
환웅의 환은 예로부터 환수(桓水)·환씨(桓氏) 등 지명 혹은 성씨(姓氏) 또는 오환국(烏桓國)과 같이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檀君은 실재 인물이다
又烏桓氏 改桓氏 魏姓也”여기서 우리는 春秋시대 까지만 해도 桓族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특히 春秋시대 宋나라는 東夷의 先民이 세웠던 殷의 후예로서 東夷族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桓氏典
高句麗 建國(BC37년 朱蒙)의첫都邑地는 現在 中國 遼寧省 桓仁縣 五女山城 城郭 古朝鮮땅인 中國에 桓氏들이 많다.
환온(桓溫, 312년 ~ 373년)은 五胡十六國時代의 東晉의 정치가, 군인, 재상. 자는 元子). 군사적 성공을 거듭해 東晉을 좌지우지하며 황제의 자리까지 넘봤지만 주변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아버지는 桓彝), 동생은 桓雲, 桓豁, 桓祕, 桓沖. 아들은 桓玄.
김무력(金武力(金庾信의 할아버지) 대극지 (密陽大克之 ) 고우도도(高于都刀)
좌군주(左軍主) 水路將軍(수로장군) 박이종(朴伊宗) 이 497년 6월에 관산성주(管山城主)로 신라의 관직을 하사 받다.
명종 임인12년(고려명종 1182년 2월) 管城縣( 沃川)을 廢하였다,
공민왕14년(1365 을사년) 5월 경진일 부원군 이녕(李寧)을 옥주(沃州:沃川)로 유배 보내고 모두 그 가산을 몰수했다.
沃川 民主化運動의 導火線, 관성농민(管城農民)의 반란(反亂)
고려명종 12년(1182) 임인년 2월
옥천농민의 봉기 1182년 충청도의 관성(管城 : 지금의 옥천)에서 수령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관성의 경우는 현령의 착취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주모자와 현령을 처벌해 해결했다.
옥천군 관련 자료 모아 '동학농민혁명사' 발간 류제구 향토사학자
○ 관성현령(管城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백성을 학대하며 침탈하고 음탕하고 거칠기가 한도가 없었으므로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아전과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이 총애하는 홍언의 애기(愛妓: 기생 )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홍언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담당 관원이 하여 해당 관청에서 진상을 조사(안찰신문)한 뒤 사태의 주모자 대여섯 명을 유배(귀양)보내고 홍언도 관직을 박탈해 종신(종신금고)토록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조치했다. 또 부성현령(富城縣令)은 현위(縣尉)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피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온 현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위 휘하의 남녀 관비들을 살해한 후 현령과 현위의 관아를 폐쇄해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해당 관청에서, 관성현과 부성현의 하극상(下剋上)이 심각하니 관직의 명칭을 없애 현령과 현위를 두지 말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충주이씨시조(忠州(太原)伊氏始祖) 이단취(伊丹取:912년)는 철원 사람으로 궁예의 참모장수로 왕건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고려태조 왕건당시(高麗王建때)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 伊昕巖)이 궁예(弓裔) 말년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웅주(熊州:公州)를 습취(襲取)하여 인하여 이에 진(鎭)치고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김흔(金忻: 1251년~ 1309년)의 장인이었던 이단취(伊丹取)는 원주(原州) 이씨(伊氏)였다. 伊盖,
후손 - 1930년대 이일보(伊日甫) 2000년도 860명
은천이씨(銀川伊氏) 고려중엽 귀화(高麗中葉 歸化) 총 137가구 411명
고려우왕시대 (禑王時代) 경남고성(固城)에 사는 伊金(이금)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태봉국의 군주며 국왕으로 관심법의 궁예(金弓裔)처럼 힘있는 부족의 이금 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유혹(惑)하여 말하기를 “나는 능히 석가불(釋迦佛)을 모시고 올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 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내가 한 번 작용(作用)하면 풀에서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서는 알곡 열매가 맺힐 것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곡물을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의 말을 믿고 쌀, 비단, 금, 은을 그에게 시여(施與)하였는데 서로 뒤질세라 빨리 갖다 바치느라고
분주하였다.
또 말, 소가 죽어도 먹지 않고 내버렸으며 돈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조리 다 나눠 주었다.
이금(伊金)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을 내려 산천의 귀신들을 파견하게 된다면 왜적은 다 붙잡을 수 있다”라고도
하였다. 무격(巫覡-남녀 무당)들이 그를 더욱더 존경하고 신임하여 성황사묘(城隍祠廟-토신‘土神’의
사당)를 헐어 버렸으며
伊金을 부처님처럼 섬기고 그에게 복리를 달라고 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덩달아 따라 나서서 이금(伊金)의 제자라고 자칭 하면서 서로 거짓말로 속이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지방 수령(守令)들도 나와서 맞이하고 객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청주에 오자 권화는 그 무리들을 유인 하여다가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다 급히 보고하니
도당(都堂)에서는 여러 도(道)에 공문을 띄워서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판사 양원격(判事 楊元格)이 그 교설(巧說)을 믿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를 수색하여 붙들어다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내었더니 그는 도중에서 죽어 버렸다.
고려 정부에서까지 논할 만큼 큰 규모 였음을 잘 알수있다.
승려 찬영(僧 粲英)이 말하기를 「이금(伊金)이 말한 바는 모두 황당무계하고 그 말에 해와달(日月)이 빛이 없으리라 함은 더욱 가소(可笑) 로우니 국인(國人)들이 어찌 이같은 것을 믿으리요」라고 하니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이금석가(伊金釋迦)는 그 말이 다름없으나 다만 석가(釋迦)는 멀리 타생(他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이 그 허망(虛妄)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伊金)은 가까이 3월(三月)의 일을 말하니 허망(虛妄)함이 곧 나타날 뿐이라」하니 승려찬영(粲英)이 말문(黙然)이 막혔다.
고려말기(高麗末期) 일반 하층민들의 기아로 부터의 해방, 괴로움의 대상이 되는 왜구의 격퇴와 같은 희망(希望)을 읽을수 있으며,
그것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 부응하는 신앙형태인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高麗末 (공민왕시대)왜구의 침입(倭寇의 侵入)
일부 왜구는 육지로 간신히 도망쳐 옥주(沃州:沃川)로 몸을 피했으며,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터이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 당했다.
景宗 14권, 4年(1724 甲辰 3월 23일(丁酉)...우리나라 총인구수=157萬 6千1百38戶
忠淸道 沃川郡에 불이 나서 軍糧米 1千 2百 石과 公廨 84칸, 그리고 人家 3百 50戶가 타버리고 사람 3명이 죽었다.
憲宗14 (1848)戊申年 6월 2일 甲辰 沃川郡의 불탄집에 恤典을 내리다,
동학운동(東學運動)의1883년 충북 옥천에서 간행된 목판본(木版本) 용담유사(龍潭遺詞)
옥천은 동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닌 고장입니다.
동학 제2대 교주이자 1894년 당시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촉구하며 재기포령을 내린 곳이 바로 우리고장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鄭奭采等이 宋秉璿이 남긴 上疏文을 올리다.고종43년 2월 3일(1906년 대한 光武10년) - '沃川儒生鄭奭采等進卒祭酒宋秉璿遺疏'
옥천의 모습을 한눈에
옥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분지가 옥천군의 중앙에 버티고 있고 능선이 조밀하게 둥근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으며 그 바깥으로 금강의 지류가 다시 한 번 둘러싸고 있다. 옥천읍구역의 실개천은 금강본류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것이 장래 옥천인(將來 沃川人)의 복(福)이될지 화(禍)가될지 부지(不知) 하거니와 사방(四方)의 부호(富豪)들이 자주 모여 드는 것은 사실(事實)이다. ]
만성관(萬姓館)을 두어 3백가지가 넘는 성씨(姓氏)들을 모두 진열하면 누구나 애착과 공감이 갈것입니다.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군수500년사 (郡守 五百年史),옥천 (沃川)에 뿌리내린 성씨집대성 제안(姓氏 集大成 提案 )
高麗中期 禮安 入鄕祖 金尙
玉川金氏始祖 金錕
大輔公 金閼智의 後裔로 禮安金氏始祖 金尙의 15世孫 金得先의 셋째 아들 金錕 그의 字는 子珍, 號 劒岩이며 醴泉에서 살았다.
1648년(仁祖26) 式年 文科 丙科 及第, 縣監·監察 등을 歷任했다. 分貫된 緣由는 알수 없으나 後孫들이 醴泉에서 分籍한후 本貫을 玉川으로, 그를 始祖로 하게 된것 같다. 그 외에 進士 金天益을 始祖로 하는 文獻도 있다.
雲峰金氏始祖 金淡
新羅 大輔公 金閼智의 後裔로 전하는 禮安金氏始祖 金尙의 10世孫 縣令 金小良 둘째 아들이다. 그를 始祖로 本貫을 雲峰으로 하게 된 緣由는 詳考할수 없으나 그는 字가 巨源, 號 撫松軒이며 1435년(世宗17) 式年文科 及第 集賢殿正字로 뽑혀 王命으로 李純之와 함께 回回歷을 參考로 朝鮮歷學의 基本이된 七政算外篇을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基準으로 한 最初의 歷法이다. 1447년(世宗29) 吏曹正郞으로 重試文科乙科 1등으로 及第 忠州牧使, 安東府使, 慶州府尹등을 歷任한뒤 吏曹判書에 이르렀다고(諡號 文節) 事蹟에 나온다.
아마 後孫들이 本貫을 雲峰으로 그를 始祖로 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또 文獻에 中樞院事中樞府事로도 전한다.
金榮立 乙巳1605년 [무과] 仁祖14년(1636) 丙子 別試 丙科父金馨
백제십제공신(百濟十濟功臣)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聶), 조성(趙成),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마려(馬黎)는 마(馬)씨의 시조,
漢氏都始祖 백제십전공신(百濟十全功臣) 한세기장군(漢世奇將軍), 高句麗 建國功臣 漢素
百濟開國功臣: 天安全攝, 稷山趙成 木川,長興 馬黎, 郭氏都始祖 郭忠(百濟溫祚王 1대:B.C.18년)~文周王(재위기간 475~477년):王后郭氏), 漢世奇, 笵昌
한(漢)은 楚漢時代 吳, 越, 楚 地域 民族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漢나라의 國號이기 때문에 中國 姓氏라는 認識이 있지만, 中國에서는 使用되지 않는 姓氏.
한씨가문 후손들이 이글을 보신다면 新羅史와 高麗史 百濟史를 자세히 찾아보면 잃어버린 先代祖를 찾아낼수 있습니다,
韓半島에서 日本으로 건너간 氏族 아야씨(漢氏( 5세기 漢職 ), 古代에 日本으로 건너간 한씨(漢氏)의 紀錄이 보여 觀心을 끌었다 日本人 祖上은 韓半島서 건너가 [매일경제] 2009년 12월 11일(금) 오전 08:18),
後三國人物傳에;신라말고려초; 百濟將軍 漢丈이 있습니다.
百濟將軍 한장(漢丈)등이 3천여 명의 軍師를 거느리고 쫒아와 청주(靑州:中國땅)를 侵攻하였다. 이때 유금필(庾금弼)은 명을 받들고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았다.
大將軍 漢世奇 百濟開國功臣
日本의 百濟系 漢氏는 古代 韓半島에서 渡來한 氏族이다, 百濟溫祚王을 祠堂에 모신 百濟系, 윤공은 分散政策으로 各地에 흩어져 있는 秦民 : 中國의 秦氏族이 아님. 응신14년 弓月國의 君이 데리고 온 己國120縣 즉, 百濟國의 사람들)들을 모아 그들의 組織을 180부로 編成, 그 頭領인 秦酒公의 統制下에 두고 그들에게 우두머리(禹豆麻佐)라는 성(姓)을 주었다. 웅략왕은 百濟人들을 優待 乃至 地位向上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漢部의 사람들 卽, 倭國(日本)에 들어와 居住하는 百濟人들을 모아 漢氏 姓을 下賜했다, 漢氏들이 大巨 日本으로 건너간 것이다 ,
漢氏는 (中國 姓氏) 중국 동완(東莞:광동성 월해도에 있던 唐나라 때 地名)에서 계출(系出)된 姓氏로 문헌(文獻)에 傳해지며, 경북 영일군(迎日郡)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살고 있었다.
漢書 王莽錢에 劉氏의 始祖는 堯임금의 아버지 帝嚳 高辛氏로 부터 비롯 되었다. 라고 紀錄되어 있는데 漢나라와 高句麗는 한 뿌리에서 나온것이 아닌가!
漢書註釋에 依하면 漢高祖 劉邦은 諱號劉準이라 하였다.
民族이라는 말은 1902년 以前에는 存在하지도 않았다. 民族이란 말은 19世紀 以後 生成된 것이다.
漢族은 劉邦이 漢나라를 세운 이후 漢族이라 했으나 오늘날 漢族은 우리民族과 混合하고 融和되어서 存在하지 않는다.
또한 劉邦은 東夷族의 한 가지로 갈려나간 것이지 漢族도 아니다. 劉邦도 우리의 東夷族으로 漢族이 될수 없는 것이다.
蔓姓統譜에 堯임금의 後孫이, 范氏.尹氏.唐氏.韋氏,劉氏의 다섯 姓으로 갈라졌다는 紀錄이 있다,
慶州에서 中原小京으로 徙民되어 내려온 中央貴族, 6頭品 즉 落鄕貴族 出身의 豪族
高麗王室과의 姻戚關係
太祖妃: 神明순성왕태后 劉氏 忠州 劉兢達 父 贈太師內史令
景宗妃: 獻懿王后 劉氏 宗室 文元大王 貞의 딸
成宗妃: 文德王后 劉氏 光宗의 딸
穆宗妃: 宣正王后 劉氏 宗室 弘德院君 圭의 딸
劉吉權 高麗太祖 元年(元年)(918)에 設官 分職할 때에 타고난 性品이 端正하고 일을 處理함이 公平하고 誠實하여 創業한 始初부터 王을 推戴 하는데 功勞가 있었던 사람들에게 官職을 除授하였는데 劉吉權에게는 徇軍郞中을 除授 하였다.
涵虛( 己和)大師(1376년(우왕2)~1433년(세종15)
忠州劉守伊 號 得通, 堂號 涵虛. 첫 法名 守伊, 첫 法號 無準. 法名 己和. 父親 典客寺事 劉聽이고, 母親 方氏. 1396년(태조5) 관악산 義湘庵으로 出家,
1397년에 檜巖寺로 가서 無學王師에게 法要를 들은 뒤 여러곳을 다니다가,
1404년(태종 4) 다시 檜巖寺에 가서 修道에 精進.
1406년 功德山 大乘寺에서 4년 동안 『般若經』을 說했고,
1410년 開城의 天摩山 觀音窟에서 禪을 크게 진작.
1411년부터 절을 重修하고 僧俗들을 指導.
1414년 黃海道 平山의 慈母山 烟峯寺의 작은 방을 涵虛堂이라 命名, 『金剛經五家解說誼』 講義.
1420년(세종 2) 五臺山에 들어가 오대의 여러 聖人들에게 供養하고,靈鑑庵에 있는 懶翁의 眞影에 祭祀한 뒤 잘 때, 꿈에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으로 지어주어 이후 그것을 사용.
1421년 세종의 청에 의하여 開城大慈寺에 머물면서 왕의 어머니를 위해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을 위해 說法.
1424년 吉祥山,功德山,雲岳山 등을 遍歷하면서 一乘의 眞理를 說破.
1431년 聞慶 曦陽山 鳳巖寺를 重修하고 그곳에서 머물다가,
1433년 입적. 著書 『圓覺經疏』 3권, 『金剛經五家解說誼』 2권 1책, 『綸貫』 1권, 『涵虛和尙語錄』 1권. 그 밖에도 『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鳳巖寺에 碑가 있고 加平 懸燈寺에 浮屠가 있다.
劉兢達, 劉權說, 忠州劉氏, 忠州人物
1. 忠州 아홉 토박이성의 하나
2. 劉兢達과 劉權說, 큰 스님(涵虛大師)의 碑石을 세우다.
3. 高麗 王室의 忠州劉氏 王妃
4. 光宗, 돌아가신 어머니 忠州劉氏를 위하여 崇善寺를 創建하다.
5. 劉徵弼 그리고 劉羲와 劉冲基 父子, 文狀으로 이름을 드러내다.
6,蘂城을 터 삼아 살아온 忠州劉氏
7. 紀錄은 많지 않으나 끊임없이 이어진 忠州劉氏의 歷史
高句麗 27대 營留王 5년(서기 622), 우리나라에 있는 中國人들을 全部 찾아 모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1萬餘名에 達하였다. 唐나라의 高祖가 크게 기뻐하였다.
韓國姓氏의 中國渡來-
三國史記 原本–제49편 唐遣道士叔達等八人(唐道士 叔達등 8명을 보내고) 兼賜道德經(겸하여 道德經도 보내주었다). 世宗實錄과 東國輿地勝覽 에서는 唐遣才者八人이라 하였을 뿐이다.
陸氏往來 및 歸化歷史
○694년 4월 29일 新羅 金仁問(629~694)이 죽었을때 則天武后가 哀悼하며 靈柩(遺骸)를 大醫署令 陸元景에게 命하여 新羅 本國으로 傳送하였다(太醫署令 陸元景등이 新羅 派遣 兩國間에 醫學의 交流가 活潑 했었다).
○宋人 邵珪 陸廷俊 劉伋 來投 王 召試于文德殿 竝授八品官。廷俊 賜名廷傑。
1101년(肅宗6년) 봄 正月 庚辰日 宋나라 邵珪· 陸廷俊· 劉伋이 投降해 왔다
○高麗忠烈王 戊子14년(1288) 戊申日 宋나라 商人 顧愷, 陸淸 등이 와서 土産物을 바쳤다.
○高麗顯宗2년(1011) 10월 中國 장쑤성 화이안 商人 陸世寧等이 特産物을 바쳤다.
927年 3月(太祖 9년) 渤海 工部卿 吳興 高麗로 亡命 하였으며,
高麗太祖10年 927年 唐나라 明宗이 新羅에 儒敎를 傳播하기 爲해 8學士를 派遣하였을 때, 唐나라 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중 文學典禮之臣 宣敎師 陸普가 文章과 功積이 뛰어나,敬順王의 寵愛를 받아 駙馬가 되고 管城君(管城伯 沃川)에 封해졌다.
923년 新羅는 倉部侍郞 金樂등을 보내 後唐에 朝貢하고 方物을 바치고 있으며,
924년 後唐에 使臣을 보내 朝貢하고 있다. 이 해에는 泉州節度使 王逢規 역시
使臣을 보내 土産物을 바쳤다고 紀錄되어있다.
927년 新羅는 兵部侍郞 張芬등을 보내 後唐에 朝貢을 하고 있으며,
932년 執事侍郞 金昢 등을 보내 朝貢하고,933년 後唐의 明宗(李嗣源(867년 ~ 933년)이 使臣을 보내 策命을 내리는 등
新羅도 江南의 帝國 特히 後唐과 끊임없이 交易하고 있다.
1011년 (高麗顯宗2년) 10월 中國 장쑤성 화이안 商人 陸世寧等이 特産物을 바쳤다.
○1101년(肅宗6년) 봄 正月 庚辰日 宋나라 사람 邵珪· 陸廷俊· 劉伋이 歸化해 왔다 ,
陸右의 寧古塔 遷都 建議 陸右 (古朝鮮時代)
西紀前1280년 辛丑年에 臣智 陸右가 上奏하여 아뢰기를 “吉林은 千年 동안 都邑할 땅인데 大運은 이미 다 가고 寧古塔(지금 滿洲 牧丹江 아래의 寧安은 王氣가 서려 있으니, 寧古塔으로 都邑을 옮기는것 보다 못합니다.” 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람을 시켜 寧古塔에 城을 쌓았다,
沃川陸氏始祖 陸普 管城伯은 忠北 沃川郡 安內面 仁浦里에 隱居하면서, 每日 山에 올라가 新羅의 復興을 祝願하다가 숨졌다고 한다, 仁浦里에 沃川陸氏齋室이 있고 每年 11월 첫째 日曜日에 享祀,
新羅敬順王 墓 1973년 이곳 防禦하던 陸軍將兵에 의해 發見, 永芬公 慶州君 金鳴鍾 墓 失墓에서 찾았다,
반드시 失傳 始祖墓를 찾아야 합니다.
이는 한家門의 일이 아닌 沃川의 歷史입니다.
管城君의 墓는 沃川郡 安內面 化仁里(化仁里 傑浦里) 뒷산에 있다管城君墓가 本始 沃川化仁驛 뒷山 기슭에 있었다고 하나 失傳 되었다,
沃川陸氏家乘遺事考.
『雜草茂盛한 山기슭 雙墳墓를 包含한 큼직한 古墳群 發見 있었고 雜草속에 넘어져있는 雙墳墓의 墓碑 嘉善大夫 陸成元과 配 慶州氏의 墓, 그 밖에도 將軍石과 床石등이 여기저기 雜草속 묻혀 있는 荒墟의 殘在,
또한 그곳에서 若干의 距離가 있는 구시박골 에서도 역시 같은 古墳群, 모두가 陸氏 古冢이라고 口傳되어 온다 그곳 아래쪽 陸氏祭閣 터라고 하는 곳에 無數한 기와장 조각이 흩어져 그 속에 묻혀 있는 廢墟의 遺蹟, 여기가 祖上들이 살던 옛터전,
아래위로 잃어버린 先系를 모두 찾아야 完璧한 先系가 定立됩니다.
宋나라時代 陸綸 浙江 湖州府 歸安縣人 曾祖陸坦;祖父陸肇;父陸瑞
管城(沃川)陸氏系譜및 先系 - 잃어버린 훌륭한 祖上(陸右(臣智) 古朝鮮時代 ) -
沃川陸氏 中始祖 尙書右僕射 陸肇
始祖陸普(新羅敬順王의駙馬)-陸廷俊(賜名廷傑)-陸肇-陸永儀-陸子襄-陸仁瑞(端)-陸希賈-陸巨遠-陸麗-陸鴻-
陸尙山(命山)-陸石仝-陸菑-陸龜,陸黿---
【沃川 全氏】
始祖는 全以甲의 12代孫으로 高麗 忠肅王때 管城君에 봉해진 全侑.
後孫으로는 朝鮮 端宗 때 上將軍으로 있다가 端宗이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빼앗기자 落鄕하여 죽은 全希哲, 柳成龍 ·張顯光의 門下生으로 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켰고 후에 吏曹參判 ·大司憲 등을 지낸 全湜 등이 있으며, 이 밖에 仁祖 때 道學과 文章에 뛰어났던 大司憲 全命龍, 鳳山 ·善山 郡守 등을 지내며 善政을 베푼 全益禧등이 있다.
沃川全氏始祖 全侑
沃川全氏始祖 全侑는 都始祖 全聶의 27世孫. 高麗忠肅王 때 奉翊大夫‧密直府使‧版圖判書‧上護軍 등을 지냈고, 管城君(옥천의 옛 地名)에 봉해졌다. 그후 後孫들이 그를 始祖로 삼고 沃川을 本貫으로 하여 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안내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신라시대임이 밝혀졌다
등잔아래가 어둡다고 했던가 옥천사람 이라도 아무도 옥천육씨시조가 옥천에 있으리라 생각못한다.
沃川陸氏始祖 陸普 管城伯은 忠北 沃川郡 安內面 仁浦里에 隱居하면서, 每日 山에 올라가 新羅의 復興을 祝願 하다가 숨졌다고 한다,
仁浦里에 沃川陸氏始祖墓가 있고 每年 11월 첫째 日曜日에 享祀,
옥천육씨 그동안 기나긴 세월속 몰랐던 훌륭한 조상들이 밝혀지고 있다.
관성육씨족보 새로 다시 써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신라시대를 뛰어넘어 고려및 조선시대를 거치고 2019년의 오늘날 관성인으로서 관성육씨의 잠든 조상님들을 찾아드리니
제 마음이 너무나도 흡족하며 대부분 없는 조상에 없는 벼슬을 하였다고들 족보에 써놓는데 관성육씨는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야속하리 만큼 길었습니다,
저는 누가 시켜서 하는일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서 자율적으로 하면서 남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게 된것입니다,
기쁘고 고맙습니다.
孝子門 金寧金氏의 자취와 韓末 有力人物 - 송근수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석탄리는 丙子胡亂 때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정호가 난리를 피해 들어왔다. 丙子胡亂(1636년) 때 金海金氏들 동이면 석탄리로 이주.
金寧金氏 後孫의 口傳에 의하면 金寧金氏 金政丞이 1600년대 교동리 陸英修 生家地에서 살다가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안터로 移徙갔다고 전해온다,
洪原金氏始祖 金泰巖 察訪
新羅敬順王-鑑(殷說)-泰華(深)-正矩-繼蔘(苓)-漢公-景輔-世麟-鳳毛-台瑞-慶孫-信-天瑞-需(雨須)-韜(革邊)-湜-希逸-文道-傑遉-之衍-汾(玢)-築-仁通-致敬-遂-復恒-稷孫-調陽-金泰巖-
始祖 金泰嚴은 大輔公 金閼智의 後孫으로 傳해 오는 商山金氏始祖 需의 17世孫이며 郡守를 지낸 調陽의 아들이다. 그의 字는 卓爾요, 號는 希菴, 學行으로 薦擧되어 江原道 察訪이 되었다가 1519년(중종14) 己卯士禍에 緣坐되어 削職, 故鄕에서 餘生을 마쳤다는 文獻이 傳해지고 있다. 그를 始祖로 하고 本貫을 洪原으로 한 緣由는 밝혀지지 않으나 《商山金氏譜》에도 그의 系統이 있다, 後孫들이 汾(玢)의 아들 代에서 分籍하였다.
金泰巖은 洪原金氏始祖로 報恩金氏가 아니다
울산김 홈에서 청산김종국님이 질문하신 내용을 보고서
청산김문의 자료는 시조 金士翰은 조선씨족통보(1924년간)에 고려예종때 선교랑 벼슬을 지낸 김치재(金致齋)의 後裔로 기록되였고,
신라삼성연원보(1934년간)에도 고려예종시 문과에 급제한 김치재(金致齋)의 後裔로 기록이 보이며, 최근에 신라문화보존회에서 발간한"경순대왕 약사"에서는 나주김씨계보에 지금까지 알려진 始祖 金士翰 과는 별개의 계보 자료가 보이는 바 이유는 알수가 없고 역사적 오류가 아닌기 사료됩니다.
0 文科榜目을 살펴 보았다면 - 朝鮮睿宗때와 金致濟 宣敎郞公을 제대로 알았을 것입니다,
0 敬順大王 略史" 羅州金氏系譜에 아무 관계 없는 人物을 系代로 하겠습니까
0 始祖 金士翰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不確實 합니다.
옥천군민 모두 대동 단결로 잊지 맙시다.
고려말 우왕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진포에서 패배한 왜구들의 상당수가 퇴로를 잃고 내륙으로 이동하여
현 충북 옥천인 옥주(沃州)까지 도망쳤다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양민들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