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옥천역사박물관(沃川歷史博物館 建立) 시동에 박차를 (姓氏마을(만성보:萬姓譜) 절실).
 金東熙
 2019-03-26 20:25:00  |   조회: 2995
첨부파일 : -
沃川歷史博物館 萬姓마을
지역 역사 문화담을 박물관 건립 시동에 무엇을 진열할것인가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옥천의 산 역사인 역대 옥천군수 명단 결코 빠질수 없습니다,
옥천출생 독립군 의병장 역사 진열 입니다,
가산박물관은 너무 외지므로 신축 박물관으로 옳겨야 합니다.

新羅 提那部 于素의 딸 高句麗男武王太后-伊湌于老-于訖解-代使者 于漱-
신라시대 관산성 군주(管山城 軍主)각간 우덕 (角干 于德:司令官)과 이찬 탐지(伊飡 耽知)
管山城大捷 管山城軍主 角干于德(519 ~ 580년 前後)
于德-于勒(540年代)木川于氏始祖于邦寧-于學儒,于述儒,權知閤門祗侯 于光儒 -于邦宰-于承慶-于琔-于承志-于龍奕-于必興-于宗柱-于贊-于叔昆-于希燮-于仲生-于起漢.于起海,于起星-于伯仁-
于必興-우영상- 우관호- 우정도- 우찬민- 우돈식- 于仁幹-

김무력(金武力(金庾信의 할아버지) 대극지 (密陽大克之 ) 고우도도(高于都刀)
좌군주(左軍主) 水路將軍(수로장군) 박이종(朴伊宗) 이 497년 6월에 관산성주(管山城主)로 신라의 관직을 하사 받다.
명종 임인12년(고려명종 1182년 2월) 管城縣( 沃川)을 廢하였다,
공민왕14년(1365 을사년) 5월 경진일 부원군 이녕(李寧)을 옥주(沃州:沃川)로 유배 보내고 모두 그 가산을 몰수했다.

옥천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관성농민(管城農民)의 반란(反亂)
고려명종 12년(1182) 임인년 2월
옥천농민의 봉기 1182년 충청도의 관성(管城 : 지금의 옥천)에서 수령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관성의 경우는 현령의 착취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주모자와 현령을 처벌해 해결했다.
옥천군 관련 자료 모아 '동학농민혁명사' 발간 류제구 향토사학자

○ 관성현령(管城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백성을 학대하며 침탈하고 음탕하고 거칠기가 한도가 없었으므로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아전과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이 총애하는 홍언의 애기(愛妓: 기생 )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홍언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담당 관원이 하여 해당 관청에서 진상을 조사(안찰신문)한 뒤 사태의 주모자 대여섯 명을 유배(귀양)보내고 홍언도 관직을 박탈해 종신(종신금고)토록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조치했다. 또 부성현령(富城縣令)은 현위(縣尉)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피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온 현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위 휘하의 남녀 관비들을 살해한 후 현령과 현위의 관아를 폐쇄해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해당 관청에서, 관성현과 부성현의 하극상(下剋上)이 심각하니 관직의 명칭을 없애 현령과 현위를 두지 말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신분제 타파 민중운동 !
계룡산 산적으로 불리였던 공주 명학소(鳴鶴所:대전서구 탄방동 남선공원에 망이 망소이 동상)‘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 (망이 망소이가 공주함락 예산현 함락 아주함락, 청주관내 군현 함락, )일어났다 . ...망자(望)를 망(亡)자로 바꾸었다고 생각된다.
순창조씨세보에는 망이를 망금, 망소이를 망학 (淳昌趙氏世譜: 亡金, 亡鶴)으로 이망금(伊亡金:伊望金), 이망학(伊亡鶴:伊望鶴)이다.
智證大師의 어머니 伊氏
미조이(味助伊)

충주이씨시조(忠州(太原)伊氏始祖) 이단취(伊丹取:912년)는 철원 사람으로 궁예의 참모장수로 왕건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고려태조 왕건당시(高麗王建때)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 伊昕巖)이 궁예(弓裔) 말년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웅주(熊州:公州)를 습취(襲取)하여 인하여 이에 진(鎭)치고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김흔(金忻: 1251년~ 1309년)의 장인이었던 이단취(伊丹取)는 원주(原州) 이씨(伊氏)였다. 伊盖,
후손 - 1930년대 이일보(伊日甫) 2000년도 860명

은천이씨(銀川伊氏) 고려중엽 귀화(高麗中葉 歸化) 총 137가구 411명

고려우왕시대 (禑王時代) 경남고성(固城)에 사는 伊金(이금)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태봉국의 군주며 국왕으로 관심법의 궁예(金弓裔)처럼 힘있는 부족의 이금 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유혹(惑)하여 말하기를 “나는 능히 석가불(釋迦佛)을 모시고 올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 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내가 한 번 작용(作用)하면 풀에서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서는 알곡 열매가 맺힐 것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곡물을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의 말을 믿고 쌀, 비단, 금, 은을 그에게 시여(施與)하였는데 서로 뒤질세라 빨리 갖다 바치느라고
분주하였다.
또 말, 소가 죽어도 먹지 않고 내버렸으며 돈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조리 다 나눠 주었다.

이금(伊金)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을 내려 산천의 귀신들을 파견하게 된다면 왜적은 다 붙잡을 수 있다”라고도
하였다. 무격(巫覡-남녀 무당)들이 그를 더욱더 존경하고 신임하여 성황사묘(城隍祠廟-토신‘土神’의
사당)를 헐어 버렸으며

伊金을 부처님처럼 섬기고 그에게 복리를 달라고 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덩달아 따라 나서서 이금(伊金)의 제자라고 자칭 하면서 서로 거짓말로 속이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지방 수령(守令)들도 나와서 맞이하고 객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청주에 오자 권화는 그 무리들을 유인 하여다가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다 급히 보고하니
도당(都堂)에서는 여러 도(道)에 공문을 띄워서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판사 양원격(判事 楊元格)이 그 교설(巧說)을 믿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를 수색하여 붙들어다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내었더니 그는 도중에서 죽어 버렸다.

고려 정부에서까지 논할 만큼 큰 규모 였음을 잘 알수있다.
승려 찬영(僧 粲英)이 말하기를 「이금(伊金)이 말한 바는 모두 황당무계하고 그 말에 해와달(日月)이 빛이 없으리라 함은 더욱 가소(可笑) 로우니 국인(國人)들이 어찌 이같은 것을 믿으리요」라고 하니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이금석가(伊金釋迦)는 그 말이 다름없으나 다만 석가(釋迦)는 멀리 타생(他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이 그 허망(虛妄)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伊金)은 가까이 3월(三月)의 일을 말하니 허망(虛妄)함이 곧 나타날 뿐이라」하니 승려찬영(粲英)이 말문(黙然)이 막혔다.
고려말기(高麗末期) 일반 하층민들의 기아로 부터의 해방, 괴로움의 대상이 되는 왜구의 격퇴와 같은 희망(希望)을 읽을수 있으며,
그것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 부응하는 신앙형태인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高麗末 (공민왕시대)왜구의 침입(倭寇의 侵入)

일부 왜구는 육지로 간신히 도망쳐 옥주(沃州:沃川)로 몸을 피했으며,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터이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 당했다.

동학운동(東學運動)의1883년 충북 옥천에서 간행된 목판본(木版本) 용담유사(龍潭遺詞)
옥천은 동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닌 고장입니다.
동학 제2대 교주이자 1894년 당시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촉구하며 재기포령을 내린 곳이 바로 우리고장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옥천의 모습을 한눈에

옥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분지가 옥천군의 중앙에 버티고 있고 능선이 조밀하게 둥근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으며 그 바깥으로 금강의 지류가 다시 한 번 둘러싸고 있다. 옥천읍구역의 실개천은 금강본류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 옥천(沃川)은 의연(依然)이 산수기려(山水奇麗)하고 민속순후(民俗淳厚)한 충북(忠北)의 낙지(樂地).

유독 옥천(惟獨 沃川)은 타지방(他地方)의 부호(富豪)들이 모여든다, 현재(現在)에 옥천(沃川)의 수부(首富人)인이 충북(忠北)의 거부(巨富)라 가위(可謂)할 오윤묵군(吳允黙君)도 경성(京城)에서 이래(移來) 하였고 오씨는 원래 함경도인으로 이용익 시대에 부자가 되었다(吳氏는 元咸鏡道人으로 李容翊時代에 猝富가 되었다)

근일(近日)에도 진주갑부(晋州富豪)로 경향간(京鄕間)에 문제(問題)가 다(多)한 김기태군(金琪邰君)이 역시 이주(亦是 移住)하려고 7천여원(七千餘圓)의 거금(巨金)으로 광대(廣大)한 기지(基地)를 매수(買收)하고
경성(京城)의 명공명장 40여인(名工明匠 四十餘人)을 모집(募集)하야 가지고 8만원(八萬圓)인가 10만원 예산(十萬圓 豫算)으로 굉걸(宏傑)할 신아방궁(新阿房宮)을 건축(建築)하는 중(中)이다

이것이 장래 옥천인(將來 沃川人)의 복(福)이될지 화(禍)가될지 부지(不知) 하거니와 사방(四方)의 부호(富豪)들이 자주 모여 드는 것은 사실(事實)이다. ]

만성관(萬姓館)을 두어 3백가지가 넘는 성씨(姓氏)들을 모두 진열하면 누구나 애착과 공감이 갈것입니다.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군수500년사 (郡守 五百年史),옥천 (沃川)에 뿌리내린 성씨집대성 제안(姓氏 集大成 提案 )

충북옥천에 뿌리내린 성씨
옥천김씨(沃川金氏) 시조명 김희철(金希哲)
옥천목씨(沃川睦氏)
옥천문씨(沃川文氏)
옥천박씨(沃川朴氏)
청산박씨 (靑山朴氏)
옥천이씨(沃川李氏)
옥천유씨(沃川柳氏)
옥천유씨(沃川劉氏)
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명 육보(陸普)
옥천임씨(沃川任氏)
옥천임씨(沃川林氏)
옥천장씨(沃川張氏) 시조명 ​​​​장식(張栻)
옥천전씨(沃川全氏) 시조명 ​전유(全侑)
옥천정씨(沃川鄭氏)
옥천조씨(沃川趙氏)
옥천한씨(沃川漢氏)
옥천황씨(沃川黃氏)/관성황씨(管城黃氏) 시조명 황수(黃粹)

尙州 雄州典故 ( 상주웅주전고 )金寧金氏 ( 김녕김씨 )편 3. 현조 顯祖 의 행적行跡 및 사례事例 등 2곳에 기록이 등제 되어 있다.

沃川金氏始祖 金希哲 司寺僉正 通政大夫
新羅敬順王-大安君金鑑(殷說)-金深(泰華)-金重矩-金元槪-金之恭-金麗生-金弼孫-金彦輔-金益精-金德生-金秀-金將有-金仁臣-金仲南-金乙湜-金滸-金處中-金曾孫-金碧-金天富-金可晦-沃川金氏始祖金希哲-

沃川金氏始祖 金希哲은 敬順王의 第4子 大安君金殷說의 後裔로 慶州金氏 版圖判書公派祖 金將有의 12世孫이다. 그는 武科及第 司圃署別提를 지내고, 1583년(宣祖1) 司寺僉正 通政大夫가 되었다. 딸이 宣祖의 後宮(恭嬪)이 되자 司團로 特進되고 王의 寵愛를 받았다.
1592년 壬辰倭때 義兵將 趙憲의 麾下에서 裨將으로 出戰, 錦山 싸움에서 戰死했다. 1814년(순조14) 式年文科에 及第한 金輦의 本貫이 沃川이고, 平北 宣川에 居住한 事實로 보아 後孫들이 宣川으로 移居한 후 先代의 居住地였던 沃川을 本貫으로 삼은듯하다.

인구: 2000년도 723명

옥천김씨(沃川金氏)의 人物들
金希哲

[옥천김씨(沃川金氏)의 科擧및 取才 合格者]
金輦 丙午1786년 [문과]純祖14년(1814)甲戌 式年試 丙科父金時再 祖金直千 曾祖金德秋
金大圭 己亥1779년 [음관] 文蔭縉紳譜 父金輦
金啓奕 戊寅1758년 [무과]正祖 8년(1784)甲辰 庭試 丙科 父金麗淵
金士男 癸卯1603년 [무과]仁祖15년(1637)丁丑 別試 丙科 父金應進
金聖基 丁卯1747년 [무과]正祖11년(1787)丁未 庭試 丙科 父金萬億
金琬 甲寅1674년 [무과]肅宗21년(1695)乙亥 別試 丙科 父金成海 宣略將軍
金以誠 己亥1599년 [무과]仁祖2년(1624) 甲子 增廣試 甲科 父金千喜 行律學敎授
金正泰 癸酉1753년 [무과]正祖8년(1784) 甲辰 庭試 丙科父金進恒
金孝敦 丁酉1777년[무과]純祖9년(1809)己巳增廣試 丙科 父金致鈺
金啓塾 庚午1750년 [생원] 英祖 49년(1773) 癸巳 增廣試 父金麗觀
金燁 [생원] 中宗38년(1543) 癸卯 (式年試 父金彭齡
金五倫 [생원] 中宗 23년(1528) 戊子 式年試 父金自溫 筭學別提
金在萬 乙酉1645년 [생원]肅宗16년(1690)庚午 式年試 父金好泰
金必銶 己巳1689년 [생원]英祖2년(1726) 丙午 式年試 父金壽山 生員
金彭壽 [진사]中宗5년(1510) 庚午 式年試 父金應卿
金弘泰 甲子1804년 [진사] 純祖27년(1827) 丁亥 增廣試 父金仁鈺

玉川金氏金得喜(善)-金錕 司憲府監
新羅敬順王-大安君金殷說(鑑)-金淑-金習敦-金相國-金正林-金僅-金富倫-禮安(宣城)金氏金尙-金存誠-金敦富-金希寶-金成世-金紐-金方軾-金輅-金小良-金淡(雲峰金氏金淡-金馨-金榮立)-金萬鈞-金佐-金士熙-金允安-玉川金氏金得喜(善)-金錕-金兌
------------ ----------------------------------------------------------------------------金佑-金士文-金功 河東金氏-金福-金信吉-金枝英-金益精

高麗中期 禮安 入鄕祖 金尙
玉川金氏始祖 金錕
大輔公 金閼智의 後裔로 禮安金氏始祖 金尙의 15世孫 金得先의 셋째 아들 金錕 그의 字는 子珍, 號 劒岩이며 醴泉에서 살았다.
1648년(仁祖26) 式年 文科 丙科 及第, 縣監·監察 등을 歷任했다. 分貫된 緣由는 알수 없으나 後孫들이 醴泉에서 分籍한후 本貫을 玉川으로, 그를 始祖로 하게 된것 같다. 그 외에 進士 金天益을 始祖로 하는 文獻도 있다.

禮安(宣城)金氏 科擧及第者 名單
金潧 校理 [文科] 世宗17년(1435) 乙卯 式年試 同進士 父金小良 縣令 祖金輅 曾祖金方軾
金淡 吏曹判書 文節公 丙申生1416년 [文科] 世宗17년(1435) 乙卯 式年試 同進士 父金小良

金玏 大司憲 庚子1540년 [文科] 宣祖9년(1576) 丙子 式年試 丙科父金士文 刑曹佐郞 祖金祐 曾祖金萬秤
金友益 黃海都事 辛未1571년 [文科]光海4년(1612)壬子 式年試 丙科父金允誼 司贍寺僉正 祖金澤民 曾祖金佐

金鋈 丙申1596년 文科 仁祖 (1625년)別試 丙科 及第 父金首善 承仕郞 祖金勗
金鎛 辛酉1621년 [進士] 仁祖26년(1648) 戊子 式年試 父金從善 將仕郞

金錕(琨) 丙申1596년 司憲府監察[문과]仁祖26년(1648)戊子 式年試 丙科
[문과]仁祖13년(1635)乙亥 增廣試
金兌一 丁丑1637년(仁祖15) 司憲府掌令[문과]顯宗1년(1660)庚子 式年試 丙科
金汝柱 司譯院奉事 (1643 癸未生) : 譯科 肅宗4年(1678) 增廣試 父金萬翼 祖金胤景
金汝鼎 主簿 (1660 庚子生) : 譯科 肅宗7年(1681) 式年試
金世鎰 僉正 (1674 甲寅生) : 譯科 肅宗19年(1693) 式年試 父金昌翼 祖金義男
金德禧 (1703 癸未生) : 譯科 景宗1年(1721) 增廣試 父金汝鼎司譯院直長
金重國 惠民署敎授 (1730 庚戌生) : 醫科 英祖32年(1756) 式年試父金鳳鳴 祖金世鎭縣監 曾祖金昌翼 僉節制使
金麗河 (1747 丁卯生) : 譯科 英祖41年(1765) 式年試 父金重國 惠民署主簿 祖金鳳鳴 曾祖金世鉉 縣監

雲峰金氏始祖 金淡
新羅 大輔公 金閼智의 後裔로 전하는 禮安金氏始祖 金尙의 10世孫 縣令 金小良 둘째 아들이다. 그를 始祖로 本貫을 雲峰으로 하게 된 緣由는 詳考할수 없으나 그는 字가 巨源, 號 撫松軒이며 1435년(世宗17) 式年文科 及第 集賢殿正字로 뽑혀 王命으로 李純之와 함께 回回歷을 參考로 朝鮮歷學의 基本이된 七政算外篇을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基準으로 한 最初의 歷法이다. 1447년(世宗29) 吏曹正郞으로 重試文科乙科 1등으로 及第 忠州牧使, 安東府使, 慶州府尹등을 歷任한뒤 吏曹判書에 이르렀다고(諡號 文節) 事蹟에 나온다.
아마 後孫들이 本貫을 雲峰으로 그를 始祖로 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또 文獻에 中樞院事中樞府事로도 전한다.
金榮立 乙巳1605년 [무과] 仁祖14년(1636) 丙子 別試 丙科父金馨

河東金氏
金信吉 兼司僕 己亥1599년 [무과] 仁祖15년(1637) 丁丑 別試 丙科父金福
金益精 戊辰1688년 [무과] 英祖1년(1725) 乙巳 庭試2 丙科父金枝英


백제십제공신(百濟十濟功臣)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聶), 조성(趙成),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마려(馬黎)는 마(馬)씨의 시조,
漢氏都始祖 백제십전공신(百濟十全功臣) 한세기장군(漢世奇將軍)
百濟開國功臣: 天安全攝, 稷山趙成 木川,長興 馬黎, 郭氏都始祖 郭忠(百濟溫祚王 1대:B.C.18년)~文周王(재위기간 475~477년):王后郭氏), 漢世奇, 笵昌
한(漢)은 楚漢時代 吳, 越, 楚 地域 民族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漢나라의 國號이기 때문에 中國 姓氏라는 認識이 있지만, 中國에서는 使用되지 않는 姓氏.
한씨가문 후손들이 이글을 보신다면 新羅史와 高麗史 百濟史를 자세히 찾아보면 잃어버린 先代祖를 찾아낼수 있습니다,
韓半島에서 日本으로 건너간 氏族 아야씨(漢氏), 古代에 日本으로 건너간 한씨(漢氏)의 紀錄이 보여 觀心을 끌었다 日本人 祖上은 韓半島서 건너가 [매일경제] 2009년 12월 11일(금) 오전 08:18),
後三國人物傳에;신라말고려초; 百濟將軍 漢丈이 있습니다.
百濟將軍 한장(漢丈)등이 3천여 명의 軍師를 거느리고 쫒아와 청주(靑州:中國땅)를 侵攻하였다. 이때 유금필(庾금弼)은 명을 받들고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았다.

大將軍 漢世奇 百濟開國功臣
日本의 百濟系 漢氏는 古代 韓半島에서 渡來한 氏族이다, 百濟溫祚王을 祠堂에 모신 百濟系, 윤공은 分散政策으로 各地에 흩어져 있는 秦民 : 中國의 秦氏族이 아님. 응신14년 弓月國의 君이 데리고 온 己國120縣 즉, 百濟國의 사람들)들을 모아 그들의 組織을 180부로 編成, 그 頭領인 秦酒公의 統制下에 두고 그들에게 우두머리(禹豆麻佐)라는 성(姓)을 주었다. 웅략왕은 百濟人들을 優待 乃至 地位向上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漢部의 사람들 卽, 倭國(日本)에 들어와 居住하는 百濟人들을 모아 漢氏 姓을 下賜했다, 漢氏들이 大巨 日本으로 건너간 것이다 ,
漢氏는 (中國 姓氏) 중국 동완(東莞:광동성 월해도에 있던 唐나라 때 地名)에서 계출(系出)된 姓氏로 문헌(文獻)에 傳해지며, 경북 영일군(迎日郡)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살고 있었다.

漢氏系譜 家系圖
漢氏都始祖 漢世奇-始祖漢丈(漢文)- 中間失傳-中始祖漢管寧-漢守元-漢後得-漢聖佑-漢鐘旭-漢南洙-漢南䆠-漢德運-漢東錫-漢成俊-漢翼-漢浩-漢河洙-漢慶洙-漢景澤-漢賢悳-漢銀星- 漢泰貴-漢龍希-

漢氏都始祖 漢世奇 大將軍
忠州漢氏始祖 漢丈 將軍(伊昕巖 ?~918년과 切親)=고려태조 왕건당시(高麗王建時)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 伊昕巖)

潭(南)陽漢氏(919가구에 2,738명).
沃川漢氏(496가구에 1,471명).
忠州漢氏(2,266가구에 6,796명)등 3본관에 인구는 2000년에는 11,191명이었다,

後三國人物傳; 新羅末高麗初; 百濟將軍 漢丈.
李磾家記- 漢陽出身 한장(漢丈,一名 漢文), 연등을 베고 後百濟 將帥가 되다
後百濟 將帥 漢丈은 漢陽 出身이다. 그는 元來 漢陽郡의
有力 家門 出身으로서 집안이 家滅하여 어릴 때부터 行勢하였다.
​漢陽에서 자랄때에 그의 切親한 벗으로 이흔암(伊昕巖 ?~918년)은 高麗 初期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이었다.
선조37년 宣武原從3等功臣 漢守.漢春,
1764년(영조 40) 揚武原從3等功臣 漢守元
遂安龍溪書院 - 현종3년(1662년) 한관녕(漢管寧) . 漢後得,
大韓民國 臨時政府所屬 漢鐘旭, 漢城政府 樹立의 主導 獨立團 漢南洙, 漢後得,
漢德運 1801년 辛酉迫害(光州)
漢東錫(1909-1956 1.) 京城帝國大學 法學部 卒業 高位警察
漢成俊 한국무용가(1940년대)

중등교육국 과학기술과장 漢河洙, 理事 漢景澤. 국민은행 팀장 漢慶洙
漢銀星, 漢龍洙, 漢泰貴, 漢龍希,
湖堂錄: 漢南䆠, 漢翼, 漢浩
大韓民國 臨時政府所屬 漢鐘旭, 漢城政府 樹立의 主導 獨立團 漢南洙
漢德運 1801년 辛酉迫害(光州)
漢東錫(1909-1956 1.)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경찰
咸安郡 漢泰奎
중등교육국 과학기술과장 漢河洙,理事 漢景澤. 기초의원 漢賢悳.
漢銀星, 漢龍洙, 漢泰貴, 漢龍希,
湖堂錄: 漢南䆠, 漢翼, 漢浩

沃川劉氏始祖 劉敞 玉川府院君
江陵劉氏의 中始祖로 朝鮮 開國功臣에 策錄된 玉川府院君 劉敞(1352~1420)의 直系 後孫이자 判義禁府事를 지낸 劉弘緖의 아들 劉夢龍은 京畿道 水源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壬辰倭亂 때 珍島郡守를 지내던 중 戰鬪에 나가 甚한 負傷을 입고도 끝까지 싸워 倭敵을 무찌르는 데 크게 寄與하였다. 이때의 戰功으로 1604년(선조 37) 宣武功臣 1等에 策錄되었다.
忠州劉氏 劉兢達
居昌劉氏始祖 劉荃의 長子 堅規 居陀君
江陵劉氏始祖 劉承備 (劉荃의 12世孫 劉敞 朝鮮開國二等功臣 玉川府院君)
白川劉氏始祖 劉國樞(劉荃의 8世孫) 白川君
劉氏大同譜/劉氏大同譜委員會編. 大田:回想社,1975
劉敞-劉仁統-劉智周-劉用良-劉直----------劉寬-劉弘緖 -劉夢良/劉夢麟/劉夢龍-劉信民/劉希民-劉寬-劉承延-劉晩應-劉相茂-劉相茂-劉光勲-
劉弘緖 掌樂院主簿 [무과]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중시(重試) 병과(丙科) 28위(31/35) 父劉寬 瑞興都護府使
劉信民 경술 (庚戌)1610년 (광해군 2) 무과] 인조(仁祖) 15년(1637) 정축(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4662위(4763/5536)守門將)父劉夢良)
劉希民 兼司僕 임자(壬子) 1612년 (광해군 4) [무과] 인조(仁祖) 15년(1637) 정축(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5326위(5427/5536)父 劉夢麟
劉承延 임오(壬午) 1642년 (인조 20)무과] 현종(顯宗) 13년(1672) 임자(壬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203위(250/553) 父劉寬 前訓鍊院主簿
劉相茂 임인(壬寅) 1662년 (현종 3)[무과] 숙종(肅宗) 21년(1695) 을해(乙亥) 별시(別試) 병과(丙科) 55위(65/115)兄劉相巡,劉相高 父劉晩應折衝將軍
劉光勲 병자(丙子) 1696년(숙종 22)생 [무과]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정시2(庭試2) 병과(丙科) 416위(426/432) 弟劉光瑞 父劉相茂)[武]

陸氏始原系譜史
東晉建國 (317~420).
瑯琊王氏, 陳郡謝氏, 朱氏, 陸氏, 顧氏등 江南 土着豪族들과 함께 司馬氏를 支援 東晉을 세웠다,
東漢末期 西晉初期 東吳의 重要士族 吳郡 陸氏
이들은 東晋을 繼承한 宋-齊-梁-陳 時代에도 中心勢力으로 남았다.
제1대 陸康 廬江太守
제2대 陸绩 郁林太守, 陸遜 上大將軍 丞相, 陸瑁 選曹尙書, 陸凱 左丞相
제3대 陸抗 大司馬, 陸褘 太子中庶子, 陸叡 會稽南部都尉 陸叡 長水校尉, 陸喜 選曹尙書
제4대 陸晏 飛將軍 夷道監, 陸景 片將軍, 中夏督, 陸機 太子洗馬, 陸蕓 吳王郎中令
唐나라 18學士 陸元朗(12代孫)
吳의 門閥은 朱氏, 陸氏, 顧氏, 張氏 등의 4姓
吳나라는 陸氏가 가장 强大했다. 陸遜, 陸績, 孫皓때의 宰相 陸凱.
陸氏들이 잠시 묻혀가다가 晉나라 太康文壇에 登場. 陸機가 主要 멤버였다.

陸氏史
陸賈,陸康,陸績,陸遜,陸抗 陸瑁,陸凱,陸胤,陸耭,陸雲.陸熹,
陸納,陸德明,陸繕,陸麗,陸俟,陸哉,陸馛,陸倕,陸子彰,陸法言,
陸羽, 陸龜蒙,陸游.陸象山,陸秀夫,陸西星,陸心源,陸皓東,
陸徴祥,陸宗輿,陸志韋,陸定一,陸川,陸俊,

吳縣(郡)陸氏 世系圖
1世陸通(季達)-陸發-陸萬-陸烈(伯元)-陸衡-陸旴(子光)-陸鴻(叔鸞)-陸建(公榮)-陸曄(奉光)-陸恭(彦祖)-陸璜(公伯)-陸文(孝平)-陸親(公道)-陸衆(世業)-陸賜(思祖)-陸閎(子春)-陸卬-陸溫-陸桓(叔文)-陸續(智初)-陸稠-陸逢-陸褒(叔明)-陸紆-陸駿-陸穎- 陸英(季子)-陸術-陸舉-陸曄(士光)-陸諶-陸嘏-陸玩(士瑤)-陸謐-陸儒-陸側-陸納(祖言)-陸長生-陸乂-陸始(祖興)-陸粹-陸瓘-陸偉-陸顔-陸康(季寧)-陸儁-陸積(公紀)-陸宏-陸叡-陸俶-陸萬載-陸道玩-陸仲元-陸羣-陸子眞(同宗)-陸慧徹-陸觀-陸閑(遐業)-陸厥(韓卿472~499)-陸絳(魏卿)- 陸完(楚卿)-陸襄(師卿 480~549)-陸引- 陸慧曉(叔明 439~500)- 陸僚- 陸任-陸見賢(529~578)-陸繕(士繻 518~580)-陸辯慧(敬仁)-陸倕(佐公 470~526)-陸纘.陸緬-

河南陸氏世系圖
始祖1世陸幹-陸引-陸突-陸俟(陸猷-陸石跋-陸歸-陸尼-陸麗-陸頹-陸陵成,陸龍成-陸麒驎)-陸歸-陸珍-陸旭-陸騰-陸融-陸立素-陸庾-陸瞻-陸景祥-陸據-陸士倫-陸益郞-
陸洛候系 -河南烈公 陸眞=汝陽候 陸延
陸宜系- 安樂貞公 陸儁 .=陸登,陸匡,陸景元
陸堅系-建安懿男 陸堅 ,=陸綰.陸綜.陸演
陸酇,陸邳.陸復禮
「門閥 또는 豪族 勢力들」
僑姓 :: 華北系 世族들로 江南으로 훗날 移住) :: 陳, 謝, 陽夏, 袁, 蕭+曹(沒落), 司馬 (王室 編入)
吳姓 :: 東南 土着 門閥 또는 世族) :: 朱, 張, 顧, 陸
群姓 :: 山東 門閥 貴族) :: 崔, 盧, 鄭, 李
唐나라 高祖때 國學博士 陸德明(618년-626년)
唐나라 詩人 陸龜蒙(宰相 陸元方(639年-701年3月20日)의 7世孫 父 侍御史 陸賓虞)
唐나라 學者 陸羽(733-804)
唐德宗李适 (780-805) 翰林學士 陸摯 올바른 建議를 많이하여, 實質的인 宰相이라는 뜻으로 內相이라 불렀다 함, 朱泚의 亂을 評定할 때 功을 세웠고, 뒤에 中書侍郞同平章事 벼슬까지 올랐다.
陸氏義居【宋나라】- 陸氏들이 義로써 모여 살다
陸游(1125~1210) 中國南宋의 愛國詩人 陸氏南唐書
陸九齡(1132-1180),
陸九淵(象山 1139-1193)
陸淸(1288) 戊申日 宋나라 商人
陸長源의 唐春秋

高句麗 27대 營留王 5년(서기 622), 우리나라에 있는 中國人들을 全部 찾아 모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1萬餘名에 達하였다. 唐나라의 高祖가 크게 기뻐하였다.
韓國姓氏의 中國渡來-
三國史記 原本–제49편 唐遣道士叔達等八人(唐道士 叔達등 8명을 보내고) 兼賜道德經(겸하여 道德經도 보내주었다). 世宗實錄과 東國輿地勝覽 에서는 唐遣才者八人이라 하였을 뿐이다.

陸氏往來 및 歸化歷史
○694년 4월 29일 新羅 金仁問(629~694)이 죽었을때 則天武后가 哀悼하며 靈柩(遺骸)를 大醫署令 陸元景에게 命하여 新羅 本國으로 傳送하였다(太醫署令 陸元景등이 新羅 派遣 兩國間에 醫學의 交流가 活潑 했었다).

○宋人 邵珪 陸廷俊 劉伋 來投 王 召試于文德殿 竝授八品官。廷俊 賜名廷傑。
1101년(肅宗6년) 봄 正月 庚辰日 宋나라 邵珪· 陸廷俊· 劉伋이 投降해 왔다
○高麗忠烈王 戊子14년(1288) 戊申日 宋나라 商人 顧愷, 陸淸 등이 와서 土産物을 바쳤다.
○高麗顯宗2년(1011) 10월 中國 장쑤성 화이안 商人 陸世寧等이 特産物을 바쳤다.

927年 3月(太祖 9년) 渤海 工部卿 吳興 高麗로 亡命 하였으며,
高麗太祖10年 927年 唐나라 明宗이 新羅에 儒敎를 傳播하기 爲해 8學士를 派遣하였을 때, 唐나라 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중 文學典禮之臣 宣敎師 陸普가 文章과 功積이 뛰어나,敬順王의 寵愛를 받아 駙馬가 되고 管城君(管城伯 沃川)에 封해졌다.
923년 新羅는 倉部侍郞 金樂등을 보내 後唐에 朝貢하고 方物을 바치고 있으며,
924년 後唐에 使臣을 보내 朝貢하고 있다. 이 해에는 泉州節度使 王逢規 역시
使臣을 보내 土産物을 바쳤다고 紀錄되어있다.
927년 新羅는 兵部侍郞 張芬등을 보내 後唐에 朝貢을 하고 있으며,
932년 執事侍郞 金昢 등을 보내 朝貢하고,933년 後唐의 明宗(李嗣源(867년 ~ 933년)이 使臣을 보내 策命을 내리는 등
新羅도 江南의 帝國 特히 後唐과 끊임없이 交易하고 있다.
1011년 (高麗顯宗2년) 10월 中國 장쑤성 화이안 商人 陸世寧等이 特産物을 바쳤다.
○1101년(肅宗6년) 봄 正月 庚辰日 宋나라 사람 邵珪· 陸廷俊· 劉伋이 歸化해 왔다 ,

沃川陸氏始祖 陸普 管城伯은 忠北 沃川郡 安內面 仁浦里에 隱居하면서, 每日 山에 올라가 新羅의 復興을 祝願하다가 숨졌다고 한다, 仁浦里에 沃川陸氏齋室이 있고 每年 11월 첫째 日曜日에 享祀,
新羅敬順王 墓 1973년 이곳 防禦하던 陸軍將兵에 의해 發見, 永芬公 慶州君 金鳴鍾 墓 失墓에서 찾았다,
반드시 失傳 始祖墓를 찾아야 합니다.
이는 한家門의 일이 아닌 沃川의 歷史입니다.
管城君의 墓는 沃川郡 安內面 化仁里(化仁里 傑浦里) 뒷산에 있다管城君墓가 本始 沃川化仁驛 뒷山 기슭에 있었다고 하나 失傳 되었다,
沃川陸氏家乘遺事考.
『雜草茂盛한 山기슭 雙墳墓를 包含한 큼직한 古墳群 發見 있었고 雜草속에 넘어져있는 雙墳墓의 墓碑 嘉善大夫 陸成元과 配 慶周金氏의 墓, 그 밖에도 將軍石과 床石등이 여기저기 雜草속 묻혀 있는 荒墟의 殘在,
또한 그곳에서 若干의 距離가 있는 구시박골 에서도 역시 같은 古墳群, 모두가 陸氏 古冢이라고 口傳되어 온다 그곳 아래쪽 陸氏祭閣 터라고 하는 곳에 無數한 기와장 조각이 흩어져 그 속에 묻혀 있는 廢墟의 遺蹟, 여기가 祖上들이 살던 옛터전,

아래위로 잃어버린 先系를 모두 찾아야 完璧한 先系가 定立됩니다.
宋나라時代 陸綸 浙江 湖州府 歸安縣人 曾祖陸坦;祖父陸肇;父陸瑞

管城(沃川)陸氏系譜및 先系 - 잃어버린 훌륭한 祖上 -
沃川陸氏 中始祖 尙書右僕射 陸肇
始祖陸普(新羅敬順王의駙馬)-陸廷俊(賜名廷傑)-陸肇-陸永儀-陸子襄-陸仁瑞(端)-陸希賈-陸巨遠-陸麗-陸鴻-
陸尙山(命山)-陸石仝-陸菑-陸龜,陸黿---

-------------------------------------------------- ----------------------------------------------------------------------陸沆-
------------------------------------------------------------------------------------------------------------------------ 陸埤-
--------------------------------------------------------------------------------- ---------------------------------------陸綏(綬)-
--------------------------------------------------------------------------------- ---------------------------------------陸台貴-

陸今山-
-----------------陸石貞-陸畢問-陸麟-陸光忠-陸對陽-陸堡-陸悌元-陸慶晟-陸天偉-陸載璇-陸萬耭-陸大五-陸冀鎭-陸海崙-陸南羲-陸漢均-陸鍾遠-
陸希摯 高麗忠宣王朝 務農使를 지냈다,
2019-03-26 20:25:0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123123123 2019-03-26 21:20:42 220.xxx.xxx.241
항상 글쓰실때 한문 쓰시는분인줄은 모르겠는데
혹시 기록지 같은겁니까?

나중에 두고 보시려고 한자로 쓰시는겁니까?
제가 무식한건지 뭔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글쓴이분 대단한 학식이 있다는건 알겠는데...

이제 우리나라에 한자가 거의 없어졌지 않습니까???
글쓰시는건 좋지만, 알아볼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냥 읽다가 막혀서 저 혼자 너무 화나요 ㅠㅠ

방하목 2019-06-13 21:15:17 119.xxx.xxx.63
靑山金氏始祖 金致濟(齊)
김유수(金裕壽) - - 1695 선산(善山) 증광시(增廣試) 3등(三等) 60위
말이나 글이 한번 잘못하면 와전되는것이 바로 누가 언제 청산김씨 기사를 쓸때 선산김씨 김유수를 청산 선산 비슷하니까 착각하고 남의 조상을 올려놓아 청산김씨측에
누가 된것입니다,
앞으로는 혼선 없기를 간절히 바랄뿐 입니다.

방하목 2019-06-09 10:31:52 121.xxx.xxx.247
洪原金氏始祖 金泰巖 察訪
新羅敬順王-鑑(殷說)-泰華(深)-正矩-繼蔘(苓)-漢公-景輔-世麟-鳳毛-台瑞-慶孫-信-天瑞-需(雨須)-韜(革邊)-湜-希逸-文道-傑遉-之衍-汾(玢)-築-仁通-致敬-遂-復恒-稷孫-調陽-金泰巖-
始祖 金泰嚴은 大輔公 金閼智의 後孫으로 傳해 오는 商山金氏始祖 需의 17世孫이며 郡守를 지낸 調陽의 아들이다. 그의 字는 卓爾요, 號는 希菴, 學行으로 薦擧되어 江原道 察訪이 되었다가 1519년(중종14) 己卯士禍에 緣坐되어 削職, 故鄕에서 餘生을 마쳤다는 文獻이 傳해지고 있다. 그를 始祖로 하고 本貫을 洪原으로 한 緣由는 밝혀지지 않으나 《商山金氏譜》에도 그의 系統이 있다, 後孫들이 汾(玢)의 아들 代에서 分籍하였다.
金泰巖은 洪原金氏始祖로 報恩金氏가 아니다

청산유수 2019-06-09 19:10:30 121.xxx.xxx.247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알림이 2019-07-20 12:27:36 112.xxx.xxx.73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충청도/청주목/옥천군(沃川郡)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옥천군)

현재- 충청북도(忠淸北道) 옥천군(沃川郡) 일대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군명】 고시산(古尸山)ㆍ관성(管城)ㆍ옥주(沃州).【성씨】

▶본군: 육(陸)ㆍ전(全)ㆍ황(黃)ㆍ신(申)ㆍ

표(表) 촌성(村姓)이다.

김(金)ㆍ전(全)ㆍ유(柳) 모두 내성(來姓)이다.

▶이산(利山): 박(朴)ㆍ임(任)ㆍ방(房)ㆍ

전(田) 촌성(村姓)이다.

심(沈)ㆍ김(金)ㆍ한(韓) 모두 내성(來姓)이다.

▶양산(陽山): 명(明)ㆍ장(張)ㆍ박(朴)ㆍ백(白)ㆍ이(李)ㆍ심(沈)

▶안읍(安邑): 송(宋)ㆍ주(周)ㆍ강(康)ㆍ장(張)ㆍ맹(孟)ㆍ종(鍾).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옥천군)

토성(土姓

옥천알림이 2019-07-20 12:31:15 112.xxx.xxx.73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옥천김씨(沃川金氏) 시조명 김희철(金希哲)
옥천목씨(沃川睦氏)
옥천문씨(沃川文氏)
옥천박씨(沃川朴氏)
옥천유씨(沃川劉氏)
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명 육보(陸普)
옥천임씨(沃川任氏)
옥천장씨(沃川張氏) 시조명 ​​​​장식(張栻)
옥천전씨(沃川全氏) 시조명 ​전유(全侑)
옥천조씨(沃川趙氏)
옥천황씨(沃川黃氏)/관성황씨(管城黃氏) 시조명 황수(黃粹)​​

옥천알림이 2019-07-20 08:05:51 112.xxx.xxx.73
8世金智-孝溫-三海-晙-玲-得礪( 裵夢星 功臣:모친은 金海金氏 金得礪의 딸)-宗繼-謹兼-壽元-爾泰-光範-相基-弼煥.景煥.奭煥.金寧金氏 8世 金智 大司成公派의10世 또는 13世孫 金光範의 아들 金相基 字 汝進 號 度齋. 1
805년 10월 23일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지석리) 출생1890년~85세로 사망, 묘: 석탄리(지석리) 오봉산.
孝子碑, 金寧金氏 齋室,고종43년(1904년) 孝子嘉善大夫, 之中樞府事,龍 衛副護軍 金相基之閭 세움,

옥천알림이 2019-07-20 08:07:27 112.xxx.xxx.73
孝子門 金寧金氏의 자취와 韓末 有力人物 - 송근수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석탄리는 丙子胡亂 때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정호가 난리를 피해 들어왔다. 丙子胡亂(1636년) 때 金海金氏들 동이면 석탄리로 이주.
金寧金氏 後孫의 口傳에 의하면 金寧金氏 金政丞이 1600년대 교동리 陸英修 生家地에서 살다가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안터로 移徙갔다고 전해온다,

옥천알림이 2019-07-20 08:03:31 112.xxx.xxx.73
金時興의8世 金智-孝信-仲-守良-有光-福長-得祺-順嬪金氏(順和君 李珹의 母),金愼行.金謹行(정2품 資憲大夫知中樞).
金時興의 8世 金智- 孝信-仲-守良-有光-福龍-應壽(贈 領議政)-夢祥- 繼賢-孝建-英遜-符龜 -順億-輔楠-命祥-時載-漢鳳-天籌- -禮燮-基世-躔鍾-淳幸-培植-炳天
金時興의 8世金智-孝溫-三海-璨-海棠-鏺-饉思,謹守-壽萬-爾鏡-光淵-相守-有煥-致重-得鍊-尙淳-秉中-載烈-喜天-宗欽-永守-大休.
8世 金智-孝溫-三漢(沃川人:司馬榜目)-0-0-0-豊-南-英立--命坦-義弼-相采-德喆-復升-奎文-慶元-榮澤-東禹-相文-仁喆-逵升-奎錫-慶寶-巖澤-東熙-

옥천알림이 2019-07-20 08:04:51 112.xxx.xxx.73
김응수 김준영(金應壽,金俊榮) 분성김씨(盆城金氏)로 분관.
金時興 2世-尙 3世-克稅 4世-重源-金重源-金貴甲-金梃丙-金潤達-金碩鍊-金鉉-金硏-金禮碩-金錫崇-金俊榮김관(金觀) 김지(金智)는 兄弟.이조판서(吏曹判書) 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
金時興 2世-尙 3世-克稅 4世-重源,5世 峴- 6世-光儲,-7世-順, 8世 金觀一名(寬)-金文起 -玄錫-繼勳-自鎔-禧年-陽鳳-德年-儀鳳-希寧

방하목 2019-06-06 16:13:19 119.xxx.xxx.206
박물관 없어 잃어버린 옥천유물 1천여점
어쩔것인가 때문에 박물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것이다.

알림이 2019-07-20 12:29:22 112.xxx.xxx.73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옥천군)
토성(土姓)이 4이니, 육(陸)·황(黃)·전(全)·신(申)이요, 
내성(來性)이 3이니, 김(金)·전(全)·유(柳)요, 
촌성(村姓)이 1이니, 표(表)이다. 
안읍(安邑)의 성이 4이니, 송(宋)·주(周)·장(張)·맹(孟)이요, 
망성(亡姓)이 2이니, 강(康)·종(鐘)이다. 
양산(陽山)의 성이 6이니, 명(明)·장(張)·박(朴)·백(白)·이(李)·심(沈)이다. 
이산(利山)의 성이 3이니, 박(朴)·방(房)·임(任)이요, 
촌성(村姓)이 1이니, 전(田)이요, 
망래성(亡來姓)이 3이니, 심(沈)·김(金)·한(韓)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옥천김씨(沃川金氏) 시조명 김희철(金希哲)
옥천목씨(沃川睦氏)
옥천문씨(沃川文氏)
옥천박씨(沃川朴氏)
옥천유씨(沃川劉氏)
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명 육보(陸普)
옥천임씨(沃川任氏)
옥천장씨(沃川

방하목 2019-06-06 10:46:55 119.xxx.xxx.206
울산김 홈에서 청산김종국님이 질문하신 내용을 보고서
청산김문의 자료는 시조 金士翰은 조선씨족통보(1924년간)에 고려예종때 선교랑 벼슬을 지낸 김치재(金致齋)의 後裔로 기록되였고,
신라삼성연원보(1934년간)에도 고려예종시 문과에 급제한 김치재(金致齋)의 後裔로 기록이 보이며, 최근에 신라문화보존회에서 발간한"경순대왕 약사"에서는 나주김씨계보에 지금까지 알려진 始祖 金士翰 과는 별개의 계보 자료가 보이는 바 이유는 알수가 없고 역사적 오류가 아닌기 사료됩니다.

0 文科榜目을 살펴 보았다면 - 朝鮮睿宗때와 金致濟 宣敎郞公을 제대로 알았을 것입니다,
0 敬順大王 略史" 羅州金氏系譜에 아무 관계 없는 人物을 系代로 하겠습니까
0 始祖 金士翰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不確實 합니다.

방하목 2019-06-06 13:26:51 119.xxx.xxx.206
府使金連枝-父金璣-祖父金自沇
靑山金氏 府使金連枝墓-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산 32번지 잿말 원통산 자락
400여년 안동김씨에서 외손봉사. 무너진 봉분.
“음성공(金震綱) 장인 府使(부사) 金連枝(김연지)공 묘역 답사기”
密陽卞氏族譜 卞綱之(承文院正子와 從仕郞)의 婦人은 宜人 靑山金氏 金致齊의 딸,
0 밀양변씨족보에서 시조공을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한생각 2019-06-06 16:02:33 119.xxx.xxx.206
康津군 족보실 설치 운영

기사입력 1995.09.11. 오전 9:12

(康津=聯合)金龍日기자 = 全南 康津군이 족보실을 설치.운영키로 해 주민들로 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11일 康津군에 따르면 지난 8월초 관내에 거주하는 姓氏의 족보를 수집 비치해 군민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 조상숭배 사상을 북돋우기 위해 군립도서관에 족보실을 설치,운영하기로 했다.

군은 이를 위해 지난 8월20일부터 관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성씨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2백57개 성씨 가운데 1백여 성씨가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각 종친회와 종가에 족보를 기증해 주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또 5백여만원을 들여 기증되지 않는 족보는 구입.복사해 확보하는 한편 조상들의 얼을 알릴 수 있는 각종 고문집과 문서류도 함께 수집,열람토록 하고 열람자들을 노인회장등 지역원로들과 연계해 이에따른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지나는이 2019-03-27 12:36:27 223.xxx.xxx.216
처음몇줄빼고는 복사해서 같다붙인글인거같네요

과객이 2019-04-15 17:18:49 121.xxx.xxx.104
옥천군민 모두 대동 단결로 잊지 맙시다.
고려말 우왕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진포에서 패배한 왜구들의 상당수가 퇴로를 잃고 내륙으로 이동하여
현 충북 옥천인 옥주(沃州)까지 도망쳤다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양민들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

나그네 2019-04-03 13:11:21 119.xxx.xxx.147
충절의 고장 옥천, 역사의 고향 옥천에
박물관 건립은 전국의 박물관과 비교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도록 탄생 되었으면 합니다.

참옥천사랑 2019-12-19 10:45:43 121.xxx.xxx.202
옥천의 유구한 역사!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생각조차 없는 신라시대부터 비롯된 옥천의 긴나긴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옥천을 사랑한다면 옥천의 거울인 옥천역사관이 있어야만 자랑할수가 있다
옥천의 자랑 옥천역사관을 속히 만들어야 한다.

참옥천사랑 2019-12-20 14:05:57 121.xxx.xxx.202
옥천육씨 그동안 기나긴 세월속 몰랐던 훌륭한 조상들이 밝혀지고 있다.
관성육씨족보 새로 다시 써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신라시대를 뛰어넘어 고려및 조선시대를 거치고 2019년의 오늘날 관성인으로서 관성육씨의 잠든 조상님들을 찾아드리니
제 마음이 너무나도 흡족하며 대부분 없는 조상에 없는 벼슬을 하였다고들 족보에 써놓는데 관성육씨는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야속하리 만큼 길었습니다,
저는 누가 시켜서 하는일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서 자율적으로 하면서 남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게 된것입니다,
기쁘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