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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있으나 대학교는 없다, 지리산 청학동은 서당및 삼선궁이 있으나 옥천 청산의 청학동(우복동)은 지금까지 옳바르게 밝혀지지도 않았고 그러다 보니 민족정신의 요람인 삼선궁이 없었고 테레비젼에도 자주나오는 청학동 서당도 없다. 우리나라에 명륜대학을 이미 1950년 4월 13일 초급대학으로 법이 제정되었다, 옥천군 청산면 명륜당에 명륜민족사관대학교를 세워서 지역을 초월한 전국의 최고 인재양성을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청산에 명륜대학교를 전주향교는 8.15 해방을 맞을 당시 전주에 대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재단법인을 만들어 대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당시 전라북도 학무국장이던 윤택중씨와 이봉구, 유직양 등이 주동이 되어 많은 유림들과 함께 전주향교 명륜당에 모여 대학교를 설립 할 것을 난상토의 끝에 합의 결정하고, 학교명은 유림의 뜻에 따라 명륜(明倫)으로 정하고 도지사의 학원인가를 받아 객사를 빌려쓰기로 하고 학생을 모집하여 서기 1949년 8월에 첫 학기를 시작하였으나 교육의 열기는 높은 반면에 제반 여건과 사정이 여의치 못하였다. 월년(越年)하여 정식 대학의 인가를 받기 위하여 이봉구는 당시 국회법사위원장이었던 백관수(白寬洙) 의원(625사변 때 납북)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 백 의원은 흔쾌히 응락하고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安浩相)박사에게 간절 요청하여 드디어 서기 1950년 4월 13일 초급대학(법학과와 국어한문과) 인가를 얻어 명륜대학(明倫大學)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객사의 시설구조가 年久하여 낡고 흙 바닥위에 의자와 책상을 놓고 수업을 하는 까닭에 시설이나 재정 등이 열악(劣弱)한 상태로 주간에는 국어·한문과 야간에는 법학과를 강의가 진행되었다. 靑山地域의 東學 2대 교주 최시형이 거주하며 동학을 총 지휘, 本部役割을 수행한 민족정신의 요람, 동학혁명의 기개를 접한 기행단은 동학 포교의 총 본산이며 동학 지도부의 피신처 역할을 한 청산 한곡리 반 봉건과 반 외세를 외치던 동학 우리 조상들의 자주정신과 주체성, 옥천에 살면서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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