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사투리 중에 ‘목화’를 ‘목해’로 ‘솜’을 ‘속케’라고 부르고 있는데 목화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고려 말 문익점은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3년간 유폐(幽閉) 생활을 당하고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통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경상남도 산천군 단성면 사월리에 심었고 그의 장인 정천익도 함께 심어 3년 동안 연구 재배한 후 잘 번식되어 우리나라의 목화 번식의 시초가 되었다.
목화는 처음에 꽃이 피고 다래가 다시 목화가 피기 때문에 두 번 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핀 목화를 따서 목화씨를 빼 그냥 사용하면 솜이 되고 이를 실로 만들어 베를 짜면 질기고 따뜻한 옷감이 되는데 처음에 이 목화씨를 빼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를 고심하던 정천익의 아들 문래는 씨아를 발명하여 목화씨를 빼도록 하였으며 그 후 실 만드는 법을 고안한 것이 물레이다. 이렇게 발명한 제사 기구의 이름을 지을 때 문래가 만들었기 때문에 “문래”라 하다가 말이 변하여 “물레”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문래의 아들 문영은 베틀을 발명하여 그 일가족이 우리의 의복 혁신을 가져 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무명베도 베를 짜도록 베틀을 만든 문영의 이름을 따서 “문영”이라 부르다가 음이 변하여 “무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시 문익점과 정천익이 각각 5개의 목화씨를 심었는데 문익점이 심은 목화는 모두 죽고 정천익이 심은 목화씨 하나에서만 싹이 나왔다고 ⟪태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