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大王은 檀君祠堂을 세웠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성군으로 유명하지만, 세종 7년, 평양에 단군사당을 세웠다. 이어 세조는 歷代 임금 最初로 檀君殿에 參拜했다.
1425년 정척(鄭陟)은 단군이 기자묘에 배향된 데 문제를 제기했다.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해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논의 끝에 1429년(세종 11)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가 건립됐다.]
세조는 단군전 참배에 나섰다. 1460년 10월 4일 한양을 떠나 파주를 지나 개성을 거쳐 15일 평양에 도착했다. 17일 단군사당에서 친히 제사를 거행했다. 신주를 ‘조선시조단군’이라고 썼다. 김성환 박사(경기도박물관)는 “단군이 국조임을 공인한 것”이라며 “(친제는) 자신의 왕위계승이 고조선 단군과 이를 이은 고구려 동명왕을 계승했음을 승인받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옥천의 산 역사인 역대 옥천군수 명단 결코 빠질수 없습니다,
옥천출생 독립군 의병장 역사 진열 입니다,
가산박물관은 너무 외지므로 신축 박물관으로 옳겨야 합니다.
신라시대 관산성군주(管山城 軍主)각간 우덕 (角干 于德)과 이찬 탐지(伊飡 耽知)
김무력(金武力) 대극지 (大克之 ) 고우도도(高于都刀)
좌군주(左軍主) 水路將軍(수로장군) 박이종(朴伊宗) 이 497년 6월에 관산성주(管山城主)로 신라의 관직을 하사 받다.
명종 임인12년(고려명종 1182년 2월) 管城縣( 沃川)을 廢하였다,
공민왕14년(1365 을사년) 5월 경진일 부원군 이녕(李寧)을 옥주(沃州:沃川)로 유배 보내고 모두 그 가산을 몰수했다.
옥천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관성농민(管城農民)의 반란(反亂)
고려명종 12년(1182) 임인년 2월
옥천농민의 봉기 1182년 충청도의 관성(管城 : 지금의 옥천)에서 수령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관성의 경우는 현령의 착취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주모자와 현령을 처벌해 해결했다.
옥천군 관련 자료 모아 '동학농민혁명사' 발간 류제구 향토사학자
○ 관성현령(管城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백성을 학대하며 침탈하고 음탕하고 거칠기가 한도가 없었으므로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아전과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이 총애하는 홍언의 애기(愛妓: 기생 )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홍언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담당 관원이 하여 해당 관청에서 진상을 조사(안찰신문)한 뒤 사태의 주모자 대여섯 명을 유배(귀양)보내고 홍언도 관직을 박탈해 종신(종신금고)토록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조치했다. 또 부성현령(富城縣令)은 현위(縣尉)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피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온 현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위 휘하의 남녀 관비들을 살해한 후 현령과 현위의 관아를 폐쇄해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해당 관청에서, 관성현과 부성현의 하극상(下剋上)이 심각하니 관직의 명칭을 없애 현령과 현위를 두지 말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충주이씨시조(忠州(太原)伊氏始祖) 이단취(伊丹取:912년)는 철원 사람으로 궁예의 참모장수로 왕건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고려태조 왕건당시(高麗王建때)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 伊昕巖)이 있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김흔(金忻: 1251년~ 1309년)의 장인이었던 이단취(伊丹取)는 원주(原州) 이씨(伊氏)였다.
후손 - 1930년대 이일보(伊日甫) 2000년도 860명
은천이씨(銀川伊氏) 고려중엽 귀화(高麗中葉 歸化) 총 137가구 411명
고려우왕시대 (禑王時代) 경남고성(固城)에 사는 伊金(이금)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태봉국의 군주며 국왕으로 관심법의 궁예(金弓裔)처럼 힘있는 부족의 이금 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유혹(惑)하여 말하기를 “나는 능히 석가불(釋迦佛)을 모시고 올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 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내가 한 번 작용(作用)하면 풀에서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서는 알곡 열매가 맺힐 것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곡물을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의 말을 믿고 쌀, 비단, 금, 은을 그에게 시여(施與)하였는데 서로 뒤질세라 빨리 갖다 바치느라고
분주하였다.
또 말, 소가 죽어도 먹지 않고 내버렸으며 돈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조리 다 나눠 주었다.
이금(伊金)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을 내려 산천의 귀신들을 파견하게 된다면 왜적은 다 붙잡을 수 있다”라고도
하였다. 무격(巫覡-남녀 무당)들이 그를 더욱더 존경하고 신임하여 성황사묘(城隍祠廟-토신‘土神’의
사당)를 헐어 버렸으며
이금을 부처님처럼 섬기고 그에게 복리를 달라고 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덩달아 따라 나서서 이금(伊金)의 제자라고 자칭 하면서 서로 거짓말로 속이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지방 수령(守令)들도 나와서 맞이하고 객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청주에 오자 권화는 그 무리들을 유인 하여다가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다 급히 보고하니
도당(都堂)에서는 여러 도(道)에 공문을 띄워서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판사 양원격(判事 楊元格)이 그 교설(巧說)을 믿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를 수색하여 붙들어다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내었더니 그는 도중에서 죽어 버렸다.
고려 정부에서까지 논할 만큼 큰 규모 였음을 잘 알수있다.
승려 찬영(僧 粲英)이 말하기를 「이금(伊金)이 말한 바는 모두 황당무계하고 그 말에 해와달(日月)이 빛이 없으리라 함은 더욱 가소(可笑) 로우니 국인(國人)들이 어찌 이같은 것을 믿으리요」라고 하니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이금석가(伊金釋迦)는 그 말이 다름없으나 다만 석가(釋迦)는 멀리 타생(他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이 그 허망(虛妄)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伊金)은 가까이 3월(三月)의 일을 말하니 허망(虛妄)함이 곧 나타날 뿐이라」하니 승려찬영(粲英)이 말문(黙然)이 막혔다.
고려말기(高麗末期) 일반 하층민들의 기아로 부터의 해방, 괴로움의 대상이 되는 왜구의 격퇴와 같은 희망(希望)을 읽을수 있으며,
그것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 부응하는 신앙형태인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고려말 (공민왕시대)왜구의 침입(倭寇의 侵入)
일부 왜구는 육지로 간신히 도망쳐 옥주(沃州:沃川)로 몸을 피했으며,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터이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 당했다.
景宗 14권, 4年(1724 甲辰 3월 23일(丁酉)...우리나라 총인구수=157萬 6千1百38戶
忠淸道 沃川郡에 불이 나서 軍糧米 1千 2百 石과 公廨 84칸, 그리고 人家 3百 50戶가 타버리고 사람 3명이 죽었다.
憲宗14 (1848)戊申年 6월 2일 甲辰 沃川郡의 불탄집에 恤典을 내리다,
동학운동(東學運動)의1883년 충북 옥천에서 간행된 목판본(木版本) 용담유사(龍潭遺詞)
옥천은 동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닌 고장입니다.
동학 제2대 교주이자 1894년 당시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촉구하며 재기포령을 내린 곳이 바로 우리고장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鄭奭采等이 宋秉璿이 남긴 上疏文을 올리다.고종43년 2월 3일(1906년 대한 光武10년) - '沃川儒生鄭奭采等進卒祭酒宋秉璿遺疏'
옥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분지가 옥천군의 중앙에 버티고 있고 능선이 조밀하게 둥근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으며 그 바깥으로 금강의 지류가 다시 한 번 둘러싸고 있다. 옥천읍구역의 실개천은 금강본류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호랑이(虎)가 곰이(熊) 어떻게 사람이 되고 사람을 낳을수가 있는가?
熊族-黃穹氏. 虎族-支巢氏
馬氏 象氏 魚氏 龍氏 牛氏 袁氏들이 있다.
虎氏人物史- 虎臣 虎坤元 虎大威 虎嵩林 虎勇 虎符 虎英 虎威 虎雄 虎振 虎翼 虎盘,
楚나라 國姓이 羋姓 雄氏(吳越:吳越同舟,臥薪嘗膽의 由來) 熊氏家谱資料, 熊氏宗谱 40卷 春秋戰國時代 楚나라 王들의 姓氏 熊氏 王維(699~761) 安陽으로 赴任하는 熊氏를 보내며(王維: 送熊九赴任安陽)
檀君은 곰의 아들 아니다,
환웅의 환은 예로부터 환수(桓水)·환씨(桓氏) 등 지명 혹은 성씨(姓氏) 또는 오환국(烏桓國)과 같이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檀君은 실재 인물이다
又烏桓氏 改桓氏 魏姓也”여기서 우리는 春秋시대 까지만 해도 桓族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특히 春秋시대 宋나라는 東夷의 先民이 세웠던 殷의 후예로서 東夷族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桓氏典
高句麗 建國(BC37년 朱蒙)의첫都邑地는 現在 中國 遼寧省 桓仁縣 五女山城 城郭 古朝鮮땅인 中國에 桓氏들이 많다.
환온(桓溫, 312년 ~ 373년)은 五胡十六國時代의 東晉의 정치가, 군인, 재상. 자는 元子). 군사적 성공을 거듭해 東晉을 좌지우지하며 황제의 자리까지 넘봤지만 주변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아버지는 桓彝), 동생은 桓雲, 桓豁, 桓祕, 桓沖. 아들은 桓玄.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군수500년사 (郡守 五百年史),옥천 (沃川)에 뿌리내린 성씨집대성 제안(姓氏 集大成 提案 )
尙州 雄州典故 ( 상주웅주전고 )金寧金氏 ( 김녕김씨 )편 3. 현조 顯祖 의 행적行跡 및 사례事例 등 2곳에 기록이 등제 되어 있다.
沃川金氏시조 김희철(金希哲)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예로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조 김장유(金將有)의 12세손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내고, 1583년(선조1) 사도시 첨정(司寺僉正)이 되었다. 딸이 선조의 후궁(恭嬪)이 되자 사포(司團)로 특진되고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비장으로 출전, 금산 싸움에서 전사했다. 1814년(순조14) 식년문과에 급제한 김연(金輦)의 본관이 옥천(沃川)이고, 평북 선천(宣川)에 거주한 사실로 보아 후손들이 선천으로 이거한 후 선대의 거주지였던 옥천을 본관으로 삼은 듯하다.
兵曹參議 金泰巖 父金弘益 (1627년(인조 5) 賑撫元宗功臣
후금(後金)에 쫓긴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들어와 병사들과 함께 노략질을 심하게 하자, 노하여 수십인을 타살하였다.
이에 모문룡이 크게 노하여 병사 300인을 보내어 집을 포위하자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고 이들과 교전 끝에 모두 죽였다. 그러자 모문룡이 이것에 감탄하여 조선에 비장군(飛將軍)이 있으니 한번 만나기를 원한다는 격문을 보내와 이때부터 명성을 크게 떨쳤다.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사신을 보내 부윤(府尹)을 위협하자 이를 죽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안현(鞍峴)에서 이괄의 군사를 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의주성을 수비하였는데 청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침입해오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적병을 사살하고, 철편이 단절되자 장창으로 추격하여 수십인을 죽이고, 힘써 싸웠으나 적병에게 겹으로 포위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칼에 엎드려 순국하였다. 숙종 때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의에 추증, 의주의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尙州金氏金泰巖과 報恩金氏金泰巖으로 同名異人이다.
洪原金氏始祖 金泰巖 察訪
新羅敬順王-鑑(殷說)-泰華(深)-正矩-繼蔘(苓)-漢公-景輔-世麟-鳳毛-台瑞-慶孫-信-天瑞-需(雨須)-韜(革邊)-湜-希逸-文道-傑遉-之衍-汾(玢)-築-仁通-致敬-遂-復恒-稷孫-調陽-金泰巖-
始祖 金泰嚴은 大輔公 金閼智의 後孫으로 傳해 오는 商山金氏始祖 需의 17世孫이며 郡守를 지낸 調陽의 아들이다. 그의 字는 卓爾요, 號는 希菴, 學行으로 薦擧되어 江原道 察訪이 되었다가 1519년(중종14) 己卯士禍에 緣坐되어 削職, 故鄕에서 餘生을 마쳤다는 文獻이 傳해지고 있다. 그를 始祖로 하고 本貫을 洪原으로 한 緣由는 밝혀지지 않으나 《商山金氏譜》에도 그의 系統이 있다, 後孫들이 汾(玢)의 아들 代에서 分籍하였다.
靑山金氏는 新羅 敬順王의 後孫이다.
後孫들이 靑山[沃川郡(옥천군)에 속한 면]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김사한(金光輔의 父金士翰)의 후손 또는 신라 김씨와 같은 근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靑山金氏 始祖 金致濟,齊(誤謬:治濟 致齋)-後孫 晩山金裕壽는 善山金氏로 削除. *世宗實錄에는 金致齊로 登載됨.
• 金致齊 權知直長1429년世宗11년)7월7일 任命
시조 김치제(金致濟)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선교랑으로 1469년(예종1) 추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후손들이 본관을 청산(靑山 : 지금의 沃川郡 속면)으로 했다.
청산김씨(靑山金氏)는 1985년에는 총 107가구 441명, 2000년에는 총 260가구 810명. 15년 만에 150여 가구, 4백여 명의 인구가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를 보면 서울 181명, 부산 21명, 대구 2명, 인천 26명, 경기 83명, 강원 19명, 충북 23명, 충남 30명, 전북 16명, 전남 18명, 경북 11명, 경남 11명, 제주 0명이다.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 절반가량이 살고 있었다. 나머지는 전국에 고루 퍼져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207명, 부산 59명, 대구 18명, 인천 47명, 광주 24명, 대전 26명, 울산 22명, 경기 208명, 강원 17명, 충북 19명, 충남 21명, 전북 40명, 전남 19명, 경북 42명, 경남 38명, 제주 3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살고 있다.
또한 김사한(金士翰)의 후(後) 또는 나주김씨동원(羅州金氏同源)으로 전하는 문헌도 보인다. 그는 선교랑(宣敎郞)으로 1469년
(睿宗1청산김 청산김문의 자료는 시조 金士翰은 조선씨족통보(1924년간)에 예종때 선교랑 벼슬을 지낸 김치재(金致齋)의 後裔로 기록되였고, 추장문과(秋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靑山(沃川郡屬面)으로 하였다,
金致濟【庚申 殷老] 1854년 2월부터 1867년 2월까지 慶尙道 玄風縣 所在 道東書院 學稧에서 活動한 契員의 名簿 學稧案
청산김씨계보 다시 찾아야 나주김씨계보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소장한 족보를 바탕삼아 밀양변씨족보및 광범위한 조사가 절실.
重峯先生文集- 金光葆 父子
고려명종 12년(1182) 임인년 2월
옥천농민의 봉기 1182년 충청도의 관성(管城 : 지금의 옥천)에서 수령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관성의 경우는 현령의 착취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주모자와 현령을 처벌해 해결했다.
옥천군 관련 자료 모아 '동학농민혁명사' 발간 류제구 향토사학자
○ 관성현령(管城縣令) 홍언(洪彦)이 백성을 백성을 학대하며 침탈하고 음탕하고 거칠기가 한도가 없었으므로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아전과 향리와 백성들이 홍언이 총애하는 홍언의 애기(愛妓: 기생 ) 및 기생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홍언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담당 관원이 하여 해당 관청에서 진상을 조사(안찰신문)한 뒤 사태의 주모자 대여섯 명을 유배(귀양)보내고 홍언도 관직을 박탈해 종신(종신금고)토록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조치했다. 또 부성현령(富城縣令)은 현위(縣尉)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피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온 현의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위 휘하의 남녀 관비들을 살해한 후 현령과 현위의 관아를 폐쇄해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해당 관청에서, 관성현과 부성현의 하극상(下剋上)이 심각하니 관직의 명칭을 없애 현령과 현위를 두지 말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충주이씨시조(忠州(太原)伊氏始祖) 이단취(伊丹取:912년)는 철원 사람으로 궁예의 참모장수로 왕건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고려태조 왕건당시(高麗王建때)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 伊昕巖)이 있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김흔(金忻: 1251년~ 1309년)의 장인이었던 이단취(伊丹取)는 원주(原州) 이씨(伊氏)였다.
후손 - 1930년대 이일보(伊日甫) 2000년도 860명
은천이씨(銀川伊氏) 고려중엽 귀화(高麗中葉 歸化) 총 137가구 411명
고려우왕시대 (禑王時代) 경남고성(固城)에 사는 伊金(이금)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태봉국의 군주며 국왕으로 관심법의 궁예(金弓裔)처럼 힘있는 부족의 이금 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유혹(惑)하여 말하기를 “나는 능히 석가불(釋迦佛)을 모시고 올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 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내가 한 번 작용(作用)하면 풀에서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서는 알곡 열매가 맺힐 것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곡물을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의 말을 믿고 쌀, 비단, 금, 은을 그에게 시여(施與)하였는데 서로 뒤질세라 빨리 갖다 바치느라고
분주하였다.
또 말, 소가 죽어도 먹지 않고 내버렸으며 돈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조리 다 나눠 주었다.
이금(伊金)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을 내려 산천의 귀신들을 파견하게 된다면 왜적은 다 붙잡을 수 있다”라고도
하였다. 무격(巫覡-남녀 무당)들이 그를 더욱더 존경하고 신임하여 성황사묘(城隍祠廟-토신‘土神’의
사당)를 헐어 버렸으며
이금을 부처님처럼 섬기고 그에게 복리를 달라고 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덩달아 따라 나서서 이금(伊金)의 제자라고 자칭 하면서 서로 거짓말로 속이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지방 수령(守令)들도 나와서 맞이하고 객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청주에 오자 권화는 그 무리들을 유인 하여다가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다 급히 보고하니
도당(都堂)에서는 여러 도(道)에 공문을 띄워서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판사 양원격(判事 楊元格)이 그 교설(巧說)을 믿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를 수색하여 붙들어다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내었더니 그는 도중에서 죽어 버렸다.
고려 정부에서까지 논할 만큼 큰 규모 였음을 잘 알수있다.
승려 찬영(僧 粲英)이 말하기를 「이금(伊金)이 말한 바는 모두 황당무계하고 그 말에 해와달(日月)이 빛이 없으리라 함은 더욱 가소(可笑) 로우니 국인(國人)들이 어찌 이같은 것을 믿으리요」라고 하니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이금석가(伊金釋迦)는 그 말이 다름없으나 다만 석가(釋迦)는 멀리 타생(他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이 그 허망(虛妄)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伊金)은 가까이 3월(三月)의 일을 말하니 허망(虛妄)함이 곧 나타날 뿐이라」하니 승려찬영(粲英)이 말문(黙然)이 막혔다.
고려말기(高麗末期) 일반 하층민들의 기아로 부터의 해방, 괴로움의 대상이 되는 왜구의 격퇴와 같은 희망(希望)을 읽을수 있으며,
그것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 부응하는 신앙형태인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고려말 (공민왕시대)왜구의 침입(倭寇의 侵入)
일부 왜구는 육지로 간신히 도망쳐 옥주(沃州:沃川)로 몸을 피했으며,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터이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 당했다.
동학운동(東學運動)의1883년 충북 옥천에서 간행된 목판본(木版本) 용담유사(龍潭遺詞)
옥천은 동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닌 고장입니다.
동학 제2대 교주이자 1894년 당시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촉구하며 재기포령을 내린 곳이 바로 우리고장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옥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분지가 옥천군의 중앙에 버티고 있고 능선이 조밀하게 둥근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으며 그 바깥으로 금강의 지류가 다시 한 번 둘러싸고 있다. 옥천읍구역의 실개천은 금강본류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것이 장래 옥천인(將來 沃川人)의 복(福)이될지 화(禍)가될지 부지(不知) 하거니와 사방(四方)의 부호(富豪)들이 자주 모여 드는 것은 사실(事實)이다. ]
만성관(萬姓館)을 두어 3백가지가 넘는 성씨(姓氏)들을 모두 진열하면 누구나 애착과 공감이 갈것입니다.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군수500년사 (郡守 五百年史),옥천 (沃川)에 뿌리내린 성씨집대성 제안(姓氏 集大成 提案 )
尙州 雄州典故 ( 상주웅주전고 )金寧金氏 ( 김녕김씨 )편 3. 현조 顯祖 의 행적行跡 및 사례事例 등 2곳에 기록이 등제 되어 있다.
沃川金氏시조 김희철(金希哲)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예로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조 김장유(金將有)의 12세손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내고, 1583년(선조1) 사도시 첨정(司寺僉正)이 되었다. 딸이 선조의 후궁(恭嬪)이 되자 사포(司團)로 특진되고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비장으로 출전, 금산 싸움에서 전사했다. 1814년(순조14) 식년문과에 급제한 김연(金輦)의 본관이 옥천(沃川)이고, 평북 선천(宣川)에 거주한 사실로 보아 후손들이 선천으로 이거한 후 선대의 거주지였던 옥천을 본관으로 삼은 듯하다.
兵曹參議 金泰巖 父金弘益 (1627년(인조 5) 賑撫元宗功臣
후금(後金)에 쫓긴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들어와 병사들과 함께 노략질을 심하게 하자, 노하여 수십인을 타살하였다.
이에 모문룡이 크게 노하여 병사 300인을 보내어 집을 포위하자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고 이들과 교전 끝에 모두 죽였다. 그러자 모문룡이 이것에 감탄하여 조선에 비장군(飛將軍)이 있으니 한번 만나기를 원한다는 격문을 보내와 이때부터 명성을 크게 떨쳤다.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사신을 보내 부윤(府尹)을 위협하자 이를 죽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안현(鞍峴)에서 이괄의 군사를 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의주성을 수비하였는데 청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침입해오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적병을 사살하고, 철편이 단절되자 장창으로 추격하여 수십인을 죽이고, 힘써 싸웠으나 적병에게 겹으로 포위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칼에 엎드려 순국하였다. 숙종 때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의에 추증, 의주의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尙州金氏金泰巖과 報恩金氏 金泰巖이 生存하였다.
洪原金氏始祖 金泰巖 察訪
新羅敬順王-鑑(殷說)-泰華(深)-正矩-繼蔘(苓)-漢公-景輔-世麟-鳳毛-台瑞-慶孫-信-天瑞-需(雨須)-韜(革邊)-湜-希逸-文道-傑遉-之衍-汾(玢)-築-仁通-致敬-遂-復恒-稷孫-調陽-金泰巖-
始祖 金泰嚴은 大輔公 金閼智의 後孫으로 傳해 오는 商山金氏始祖 需의 17世孫이며 郡守를 지낸 調陽의 아들이다. 그의 字는 卓爾요, 號는 希菴, 學行으로 薦擧되어 江原道 察訪이 되었다가 1519년(중종14) 己卯士禍에 緣坐되어 削職, 故鄕에서 餘生을 마쳤다는 文獻이 傳해지고 있다. 그를 始祖로 하고 本貫을 洪原으로 한 緣由는 밝혀지지 않으나 《商山金氏譜》에도 그의 系統이 있다, 後孫들이 汾(玢)의 아들 代에서 分籍하였다.
靑山金氏는 新羅 敬順王의 後孫이다.
후손들이 청산[沃川郡(옥천군)에 속한 면]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김사한(金光輔의 父金士翰)의 후손 또는 신라 김씨와 같은 근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靑山金氏 始祖 金致濟,齊(誤謬:治濟 致齋)-後孫 晩山金裕壽는 善山金氏로 削除.
*世宗實錄에는 金致齊로 登載됨. • 金致齊 權知直長1429년世宗11년)7월7일 任命
시조 김치제(金致濟)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선교랑으로 1469년(예종1) 추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후손들이 본관을 청산(靑山 : 지금의 沃川郡 속면)으로 했다.
청산김씨(靑山金氏)는
1985년에는 총 107가구 441명, 2000년에는 총 260가구 810명.
15년 만에 150여 가구, 4백여 명의 인구가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를 보면 서울 181명, 부산 21명, 대구 2명, 인천 26명, 경기 83명, 강원 19명, 충북 23명, 충남 30명, 전북 16명, 전남 18명, 경북 11명, 경남 11명, 제주 0명이다.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 절반가량이 살고 있었다. 나머지는 전국에 고루 퍼져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207명, 부산 59명, 대구 18명, 인천 47명, 광주 24명, 대전 26명, 울산 22명, 경기 208명, 강원 17명, 충북 19명, 충남 21명, 전북 40명, 전남 19명, 경북 42명, 경남 38명, 제주 3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살고 있다.
또한 김사한(金士翰)의 후(後) 또는 나주김씨동원(羅州金氏同源)으로 전하는 문헌도 보인다. 그는 선교랑(宣敎郞)으로 1469년(睿宗1청산김 청산김문의 자료는 시조 金士翰은 조선씨족통보(1924년간)에 예종때 선교랑 벼슬을 지낸 김치재(金致齋)의 後裔로 기록되였고, 추장문과(秋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靑山(沃川郡屬面)으로 하였다,
金致濟【庚申 殷老] 1854년 2월부터 1867년 2월까지 慶尙道 玄風縣 所在 道東書院 學稧에서 活動한 契員의 名簿 學稧案 청산김씨계보 다시 찾아야 나주김씨계보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소장한 족보를 바탕삼아 밀양변씨족보및 광범위한 조사가 절실.
密陽卞氏始祖卞高迪-卞益成-卞和景-卞珠-卞原-卞玉蘭-卞仲良-卞吉祥-卞乙明-卞禮生-卞宗仁-卞綱之
【沃川 全氏】
始祖는 全以甲의 12代孫으로 高麗 忠肅王때 管城君에 봉해진 全侑.
後孫으로는 朝鮮 端宗 때 上將軍으로 있다가 端宗이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빼앗기자 落鄕하여 죽은 全希哲, 柳成龍 ·張顯光의 門下生으로 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켰고 후에 吏曹參判 ·大司憲 등을 지낸 全湜 등이 있으며, 이 밖에 仁祖 때 道學과 文章에 뛰어났던 大司憲 全命龍, 鳳山 ·善山 郡守 등을 지내며 善政을 베푼 全益禧등이 있다.
沃川全氏始祖 全侑
沃川全氏始祖 全侑는 都始祖 全聶의 27世孫. 高麗忠肅王 때 奉翊大夫‧密直府使‧版圖判書‧上護軍 등을 지냈고, 管城君(옥천의 옛 地名)에 봉해졌다. 그후 後孫들이 그를 始祖로 삼고 沃川을 本貫으로 하여 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청산(靑山)을 本貫으로 하는 姓氏는
청산김씨(靑山金氏), 청산박씨(靑山朴氏), 청산신씨(靑山申氏), 청산심씨(靑山沈氏), 청산정씨(靑山鄭氏) 등이 있다.
옥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옥천김씨(沃川金氏), 옥천유씨(沃川劉氏), 옥천육씨(沃川陸氏), 옥천이씨(沃川李氏), 옥천장씨(沃川張氏), 옥천전씨(沃川全氏), 옥천정씨(沃川鄭氏), 옥천한씨(沃川漢氏), 옥천황씨(沃川黃氏) 등이 있다.
족보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보니 어느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그 지방에 뿌리내린 입향조에서 부터 빠짐없이 조사하여 책을 만들었음 을 보았습니다,
옥천에서도 향토사연구 차원에서 세세하게 자료를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각마을 마다 비치하면 온고이지신이 되고 잃어버리기 쉬운 옛 역사를 결코 잊지 않을것입니다,
교동 삼정승댁만 하드라도 누군가 자료를 찾아서 만들어 놓았다면 전설처럼 어느때 이름 모르는 정승이 살았다고 하드란다 라고는 하자 않았을 것입니다,
옥천군 지명 연구, 충북대(교석론) 오상학 규장각의 '옥천읍지' 한글로 문화 문화연재 옥천의 도서 규장각의 '옥천읍지' 한글로충북과학대 김종구 교수, 국역사업 완료 황민호 기자
▲ '옥천읍지' 표지 대락 170여년 전 옥천의 모습은 어땠을까? `동안리는 옥천관문...문화원 - 옥천읍지 한글번역사업 옥천읍지 한글번역사업 추진 이안재 기자
▲ 지난 18일 문화원 임시총회 현장. 옥천문화원(원장 이인석)이 옥천읍지를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문화원에서는 지난 18일 50여명의...호서읍지(규12176)_옥천 규장각 소장『호서읍지』(奎 12176) 6권에 수록된 충청도 옥천군의 그림식 지도다. 옥천군은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고을이었던 이산현․안읍현․양산현을 병합하여 큰 고을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옥천의 문화유산(沃川의 文化遺産)
교동리비석군 16기의 비석들.대체로 관찰사 및 군수들의 선행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로서 바닥에 기단을 만들고 2열로 비석을 배열하고 있다.
1. 趙秉文 不忘碑(조병문 불망비) - 전면 중앙에 “郡守趙侯秉文永世不忘碑”(군수조후병문영세불망비)라 적고 있으며, 후면에 “同治元年 壬戌 ○月日”동치원년(1862년, 청나라 목종)임술○(元자 뚜렷하게 남아있음)월일 이라 적고 있다.전고 127㎝, 비폭 48㎝, 두께 23㎝의 화강암으로 조성했으며 별다른 조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