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희의 수필기행[15] - 청산면 보청천
조만희의 수필기행[15] - 청산면 보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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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2.11 00:00
  • 호수 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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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 시 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S에게
여기는 청산의 보청천이외다. 속리산 속살을 헤집고 나온 물이 아직도 세속의 경계를 몰라 더듬더듬 흐르고 있는 청산벌 그 보청천 말이외다. 웬 뜬굼 없는 보청천이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꿈꾸어 왔오. 일상 생활이 문득 고달퍼 지면 나는 언제나 이 곳을 꿈길처럼 달려오곤 했지요.

S!
보청천은 역시 사색의 강이외다. 천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갈대와 그 사이로 느릿느릿 미끄러지는 강물을 보노라니 그동안 잊혀졌던 상념들이 뭉클뭉클 되살아나외다. 사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귀뜸 하지 않았거늘 이 곳은 이미 내 사유의 개념을 미리 파악하기라도 한 듯 작은 풀포기 조차 제 위치에서 감동의 메시지를 전하는구려.

S!
보청천은 청산과 청성을 가로질러 흐르지만 그 맛은 사뭇 다르외다. 청산을 지나는 물이 우주 저편의 깊은 뜻을 표현하듯 슬금슬금 미끄러져 내린다면, 청성을 지나는 물은 세속의 못다 한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고야 말듯 시종 두런두런 속삭이며 흐르지요. 따라서 여름날의 천렵꾼들은 청성보(洑) 아래에 진을 치거나 무회리 점동다리 밑을 점하는 것이 좋을 거외다. 청성천에서는 물고기들도 시끄럽게 굴며 지나기에 서투른 천렵꾼 들도 이를 쉽게 포획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색을 꿈꾸거나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은 가을 어스름을 기해 청산 장위리보(洑)를 찾아야 할 것이외다. 이 곳 보(洑)위에 펼쳐진 드넓은 호수야말로 청산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거대한 거울이외다. 물오리조차 가만가만 노닐고 마는 이 곳 호수는 천변의 갈대마저 스르륵 물결 짓게 하지요. 정말이지 이곳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이외다.

하지만 보청천의 보배는 뭐니뭐니해도 천변의 뚝방 길이외다. 한다리(청산교)에서 장위리보에 이르는 뚝방 길과 장위리보에서 청성보로 향하는 뚝방 길은 어떤 낭만적 언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꿈결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요. 아지랑이 포르르 피어나는 봄날 꽃다지, 양지꽃 따라 이 길을 출렁출렁 걷거나, 여름날 물안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새벽길을 나서보면 세상은 정말 살맛 나는 곳임을 실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석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는 가을 어스름 길이야말로 이 곳에서 맛 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외다. 이 때는 모든 철학적 상념들이 모두 이 곳으로 집결하여 세상을 환히 밝히지요.

이 고장 출신 류시화 시인의 명상시(瞑想詩) `외눈박이 물고기 사랑'도 바로 이 곳에서 빚어졌을 것이외다. 실제 몇 년 전에 류시인을 이 곳 천변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의 고향 사랑은 아주 각별하더이다. `자신의 문학적 토양은 단연 이 곳 보청천이라'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하외다. 어쩌면 사색의 강이 놓인 이곳에서 시인이 태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S!
지난달에는 청성면 안이미 마을을 찾았었지요. 이 곳은 너른 백사장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벼랑바위가 일품이지요. 헌데 나는 이 곳에서 참으로 슬픈 장면을 목도했구려. 바로 강가 외딴 마을에 너무도 가련한 여인이 살고 있구려. 늙으신 부모와 함께 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서른 세 살 노처녀 이명자씨. 그녀는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봉사외다.

마치 박목월의 시 `윤사월'에 나오는 눈먼 소녀와도 같지요. 특히 스물 세 살 꽃다운 나이에 실명을 했다 하니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외다. 기막힌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한평생 볼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여인. 숲과 더불어 살면서도 숲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이 여인의 운명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외다. 천하의 낭만을 꿈꾸며 달려온 나의 행각이 문득 부끄럽구려.

S!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말이 있지요? 또 `앞서 달리는 자 만이 승리자'라는 말도 익히 들었을 거외다. 사람들은 정말로 높이 나는 데 관심이 많지요. 또한 보다 앞서 달리기 위해 너도나도 서두르곤 하지요. 하지만 높이 오르기만 한다면 어찌 아래에 놓인 뜻을 제대로 살필 수 있겠오? 또한 앞서 달리기만 하는 자가 어찌 주변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을까요?

S!
언젠가 누군가에게 옥천의 고리산 이야기를 했더니 "그 곳에 갈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속리산을 갔다 오는 것이 났지"하더이다. 또한 금천리 계곡의 감동을 전했더니 "당신은 지리산 계곡의 깊은 맛을 모르는 모양이군?" 하면서 마치 옥천에 있는 것들은 보나마나 뻔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구려.

하지만 진정한 감동은 느릿느릿 자세히 보려 할 때 찾아지는 법이외다. 결코 먼 곳을 찾는다고 보다 깊은 감동이 찾아지는 것은 아닐 거외다. 빡빡한 일정에 쫓기어 서둘러 다녀오는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오. 또한 정상을 정복하는데 만 목표를 두고 허위허위 오를 때 과연 그 곳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런지요?

S!
옥천이야말로 감동의 물결이 곳곳에 해일처럼 숨겨져 있는 곳이외다. 오늘도 나는 이 곳에 오면서 또 다른 꿈의 길을 발견했구려. 그 곳은 바로 금강유원지를 지나 동이면 고당리 마을 뒤편에 있는 고갯길이외다. 이 곳을 넘어 오는데 금강을 발아래 두고 흐르는 산길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더이다. 청성면 묘금리와 연결되는 이 고갯길은 자동차로 그냥 휑하니 넘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길이지요. 어느 누구일지라도 이 길을 천천히 걸어서 넘는다면 시 한 편은 족히 쓸 수 있는 사색이 이루어질 것이외다.

S!
이제 작별을 할 때가 된 듯 하외다. 지금 막 장위리보에 축제의 장이 열리려 하오. 이미 보(洑)위의 호수에는 저녁놀이 가득 담겨진 상태요. "아이쿠! 저기 감 하나 떨어지네. 어어어! 저를 어쩌나?" 어느 시인의 외침과도 같은 저녁 해가 지금 막 떨어지고 있오. 드디어 청산벌 환타지는 시작된 것이외다. 언젠가 당신도 일상을 훌훌 벗고 여기 축제의 장에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하외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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