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희의 수필기행[6] - 추소리 소금강
조만희의 수필기행[6] - 추소리 소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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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2.12 00:00
  • 호수 5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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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잉걸불처럼 후끈 달아오르던 가을도 어느 덧 자투리만 산자락에 띄엄띄엄 걸쳐놓고, 언제인가 싶게 소소한 바람만 어정쩡 그 주변을 서성인다.

하지만 늦가을 어스름에서야 제 세상을 만나는‘향(香)의 제왕’들국화가 있으니 상실을 이야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미 낙엽으로 내려앉은 총천연색 가을도 발자욱 속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서걱이니 가을이 주는 쓸쓸함의 미학은 정작 이제부터라 할 수 있다.

90년대 초엶추소리 사람들’이라는 TV 다큐멘타리 프로가 있었다. 옥천으로 갓 들어온 나에게 그때 TV로 만나본 추소리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거룻배에 소를 싣고 물 건너 고삿밭에 쟁기질 가는 노옹, 고작 세 명의 학생을 싣기 위해 새벽 길 달려 떠나는 통학버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영상으로 만나는 대청호 주변의 풍경은 동화 속의 삽화 그대로였다. 그후 난 추소리를 얼마나 찾았던가?

비가 오면 빗소리에 이끌려 가보고, 눈이 오면 괜스레 궁금해져 찾아보고, 봄이면 봄이라서, 여름이면 여름이라서, 가을도, 겨울도 추소리는 그렇게 나를 불러 들였다. 정말이지 추소리는 가까이 다가 갈수록 훨씬 감동적인 장면을 내 보인다.

나의 소개로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도 적잖은데 그들도 추소리에 만 오면 모두가 한 꺼풀씩 작아 지는 자신을 본다고 했다. 누구든 이곳을 다녀가면 겸손을 배우기 마련이고 문명의 이기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일수록 추소리는 하나의 신화 일 수밖에 없다.

빈곤한 영혼을 샘물같이 충전 시켜 주는 내 안의 노스탈자 추소리! 사실 추소리 주변을 이번 기행의 테마로 잡고부터 난 심한 몸살을 알아야 했다. 한동안 전혀 붓이 움직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글로 표현되는 것은 이미 도(道)가 아니라 했듯이 대청호와 함께 하는 추소리는 애당초 글로 설명 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괜한 만용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추소리를 다시 찾았다.

옥천에서 대전 방면으로 달리다 이백리 검문소 앞에 주춤 섰다가 우로 돌면 철도 밑을 지나는 굴다리가 나온다. 이곳을 통과하기 바쁘게 또다시 경부 고속도로를 지나는 굴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을 엉거주춤 통과하면 산비알 휘돌아 나가는 아스팔트 길이다.

그 길 졸졸졸 달려들어가니 어느덧 차창가엔 들국화 향기 솔솔솔 따라 붙고, 길섶 양지 바른 무덤가엔 하늘빛 닮은 쑥부쟁이 소란스레 피었다. 구불구불 몇 구비 더 달려 추소 초등 학교에 이르렀다.

이 학교는 미처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을 옮겨 보기도 전에 문을 닫고, 지금은 어느 교회에 팔리어 현대식 수련장으로 변신중이다.

추소리는 바로 그 학교 앞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본래 대청댐이 생기기 전에 이곳에는 자연 마을로 추동, 부수머리, 서낭댕이, 절골이 있어 제법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댐이 생기면서 건너편 물가에 제법 큰 동네로 자리잡던 추동, 부수머리는 물밑으로 사라지고 현재의 마을만 쓸쓸히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이곳을 추소리라 이름하게 된 사연이 의외였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전국적으로 행정 구역의 전면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이름도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이때 이곳 옥천도 몇 개의 마을을 합쳐 새로운 동리를 만들게 되는데, 바로 이 당시 추동(楸洞)마을의 추(楸)자와 부소(扶沼;부수머리)의 소(沼)자를 한자씩 취하여 추소리(楸沼里)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자연과 친화를 이루며 사는 우리 민중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음모가 곁들여진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나마 제 이름의 빌미를 제공해 주던 마을마저 모두 사라지고, 엉뚱한 곳에 그 이름이 전이되어 불리고 있으니 참으로 기구한 마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추소리 어르신들께 이곳 마을 주변 경치에 대해 찬탄을 늘어놓으면 그들은 그저“물에 잠기기 전 저 앞 부소머리 병풍바위를 봤어야 하는디”할 뿐이다.

사실 추소리에서 부소머리 병풍바위를 빼놓으면 그 어느 곳도 제대로 설명 할 수가 없다.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병풍바위는 물길 굽어 도는 곳에 길게 늘어서서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늘어서 있다.

어느 곳에서든 이곳이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은 이미 술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병풍바위 속살 깊은 곳은 달포 전에야 처음으로 찾았다.

그 동안 추소리를 여러 번 찾았지만 이곳만은 차마 범할 용기가 나지 않아 미답지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여러 지우들과 함께 찾은 그곳은 역시 경이로운 조물주의 희열 넘치는 잔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학교 조회대 만한 시루떡을 모로 켭켭이 세워 놓은 듯한 바위가 있는가 하면, 아름드리 굴참나무와 허리 굽은 노송이 큰바위 곁에 우뚝 서서 잘 가꾼 분재를 확대 시켜 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미끌미끌 바위를 타 넘고 덤불을 헤치며 병풍바위를 다시 찾았다. 한번 찾고 보니 잘 익은 여인의 속살을 몰래 본양 또다시 그곳이 궁금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드디어 솔가루가 포근히 쌓인 솔밭에 이르렀다.

이곳은 서낭댕이 느티나무에서 시작되는 병풍바위의 종착지이다. 문득 혼자이고 싶을 때 홀연히 찾아들리라 점찍어 두었던 곳이다. 한동안 이곳에 붙 박혀 있자니 한동안 잊혀졌던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얼마 만인가? 한때 절망만을 이야기하던 시절 꿈길로 달려와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던 소녀. 그 소녀가 이 고즈녁한 분위기 속에서 홀연히 떠올랐다.

『나는 군대 생활 중에 제법 감수성이 예민한 남도의 어느 섬 소녀와 펜팔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서투르나마 문학을 내 보일 줄 알았던 여고생으로 충청도 뭍에서만 자란 나에게 있어 한 점 동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편지 속에는 언제나 바닷가의 외로운 정서가 잘름잘름 보였고, 섬 소녀 특유의 순진무구한 꿈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뜨악한 병영으로까지 전달되었다. 그의 편지가 닿는 날 난 진정으로 행복했다.

그날부터 난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정성을 다해 답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녀가 보내 온 시를 외었다. 그녀는 언제나 낭만이 가득 담긴 시 한편을 편지 속에 곁들여 왔는데, 헷세의『행복』,소월의『개여울』, 괴테의『첫사랑』등 무수한 시들을 그때 만났었다.

난 그 시들을 외우므로 해서 지진아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병영 생활의 한켠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 때 얼마나 많은 시를 외었던가?
시를 철저히 해부하면서 공부하던 학창 시절의 시야말로 진짜 시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그때 비로소 깨닫기도 했었다.』

천하를 알고자 하는 자 추소리에 가면 되리. 삼라만상의 오묘한 조화 그곳에 다 있나니. 사색을 모르는 자 사색에 빠지게 되고, 허둥지둥 세상을 달리기만 하는 자 제 삶의 의미 추스려 볼 수 있는 곳.

추소리에는 다소 어리석은 사람도 신의 섭리를 만날 수 깨우칠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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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露 2009-02-04 16:13:40
병풍바위 오밀조밀한 풍광, 글로 쓴다는 것이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