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에 다녀와서...
 윤승원
 2000-11-11 20:50:43  |   조회: 4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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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를 걸으면서 형님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청호의 수초를 뜯어먹기 위해 노루가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는 형님이 요즘 가장 즐기는 이야기일 터이다. 얼마 전 선산에 다녀올 때 언뜻 들은 기억이 있고, 이번에 두 번째 듣는 이야기이지만 직접 그 현장에 와서 '여기가 바로 그 자리' 라는 얘길 들으니 더욱 흥미롭다.

대체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아름다운 풍광이야 도시 근교에 이만한 데가 없다. 하지만 노루라니… 누가 쉽게 믿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형님의 이야기가 틀림없을 거라고 믿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주장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주변의 산세라든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중요시설' 주변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그런 짐승이 얼마든지 살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형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노루를 보았다는 얘길 했다가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더니, 그게 정 사실이면 잠복했다가 포획하자는 얘기가 나와 얼른 '노루 이야기'를 철회하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노루는 동물이기 이전에 자연이다. 노루가 예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사건이 못된다. 문제는 이 대청호에서 수십 년을 산 여느 사람의 눈에 띠지 않았던 짐승이 공교롭게도 형님의 눈에 띠었다는 사실이 내겐 흥미로운 것이다.

그렇다. 형님은 여기서 노루도 보고, 토끼도 보고 살 것이다. 자연과 동화되지 않으면 눈에 띠지 않는 것들이다. 이 호젓한 길을 걸으면서 봄이면 나비에게도 말 걸고, 방싯 웃는 풀꽃과도 눈인사를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것이다.

이 같은 삶의 여유가 내겐 부럽기만 하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이면 이 오솔길에 손만 뻗으면 따먹을 수 있는 대추와 홍시(紅枾)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그것 하나 따먹고 잠시 포만감에 젖어 나무 의자에 앉으면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도 떠오르고, 백거이(白居易) 못지 않은 상(想)도 가다듬어 지리라.

이윽고 바람이 불면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형님은 독백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든 이들은 겨울을 싫어한다. 움츠러드는 것이 싫은 까닭이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이다. 외투 깃을 바투 세우고 햇볕 잘 드는 동쪽 벤치에 앉아 눈 덮인 호수를 바라보면 만감(萬感)이 교차하여 자신도 모르게 호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게 된다고
한다.

형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생각 날 때마다 써 둔 것들인데 분량이 적지 않아. 하지만 누구에게 보일 생각은 아직 없어. 내 삶의 편린들이거든"

시는 꼭 시인이라야 쓰는 건 아닐 것이다. 시인이란 특별한 기술을 갖은 언어 기능공이 아니라, 삶을 가슴으로 느끼는 소박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이 세상에는 말장난이나 일삼는 사이비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는 즐거움이 충만하거나 복에 겨운 사람들의 몫은 아닐 것이다.

고통을 알면 시인이다. 허무를 깨달으면 시인이다. 큰 욕심을 버리면 시인이요, 자연을 사랑하면 또한 시인이다. 용서할 수 없는 미움을 걷어 낼 줄 아는 이도 시인이요, 어렵고 힘든 고갯길을 넘으면서도 햇살 같은 한 줄기 희망을 보듬을 줄 아는 자도 이 작은 영역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때로는 뒤척이기도 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시를 써야 한다.

매일같이 이 길을 걸으면서 백발의 형님이 쓰시는 글이 나는 무엇을 담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먼 훗날, 후손들이 그것을 일러 퇴역 할아버지의 쓸쓸하지 않은 삶과 사랑의 노래라 이름할 것으로 믿는다.

형님의 안내로 향토 전시관에 들어섰다. 정년 퇴임 후 형님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진작 찾아 뵙는다 하면서도 공무를 이유로 차일피일 해 왔는데, 모처럼의 휴일, 형님의 전화를 받고 아이들과 함께 선뜻 나서게 된 것이다.

형님은 마치 교단에 섰을 때와 같이 아이들 앞에서 지시 봉을 뽑아 들었다. 칠십 노인이지만 아이들 앞에 서면 아직도 신명이 나는 지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전시된 많은 유물들을 일일이 짚어 가면서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을 대하듯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아이들은 TV <쇼, 진품 명품>못지 않은 재미를 느꼈는 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고, 주변에서 관람하던 관람객들도 들을 만 한지 하나 둘 모여들어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시인 정지용을 비롯하여 의병장 조헌, 그리고 고 육영수 여사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 유명인들의 영정과 유품들이 전시돼 있는 진열대 앞에서는 그 옛날 사랑방에서 얘기책 잘 외는 할아버지의 구수한 입담처럼 그들의 일대기를 소상히 설명해 주어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전시된 것들 중에서 특별히 아이들의 눈길을 끈 것은 왕조시대에 각 도의 선비들이 치렀던 향시(鄕試)의 답안지였다. 시험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인적 사항과 답안지를 분리하여 제출한 뒤 나중에 노끈으로 그것의 구멍을 꿰어 맞춰 보게 한 점이 특이하였는데, 오늘 날 논술 시험 방식도 이런 식으로 치르면 시험 부정이란 말은 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관람을 마치고 형님의 안내로 대청 호수와 장계리 일대의 수려한 전경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시관 2층 베란다에 올랐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호수와 병풍처럼 둘러쳐진 건너편의 완만한 산세를 바라보며 내가 감탄하자, 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구나."
모처럼 구경온 사람에게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이고, 즐길 만한 풍경이나 이런 환경 속에서 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때로는 정신적인 권태가 올 수도 있음을 이르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구경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전시관 분수대 앞에 섰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아직도 얼굴은 대춧빛인 형님 앞에서, 오히려 이마가 조금 벗겨져 겉 늙은이처럼 돼 버린 내 모습을 가리고 싶어 나는 얼른 모자를 눌러 쓰고 사진기 앞에 섰다. * <대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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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승원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hitel.net/~joonsub
전화 019-422-7861



2000-11-11 20: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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