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정착한 방송작가 이선희씨
농촌에 정착한 방송작가 이선희씨
함께사는 세상 [79]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2.08.01 00:00
  • 호수 6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녀에게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아버지가 터를 잡고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 싶다.

10여년 동안의 방송작가 생활, 1년여 동안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관 기획실장으로 `파랑새보금자리운동'을 기획하기도 했던 그녀.

그녀가 아버지의 고향인 동이면 용운리에 새로운 삶터를 마련했다. 처음 2년 정도로 생각했던 용운리에서의 생활은 이제 4년 차에 접어들었고 어느덧 계속 살아야할 곳이라는 결정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4년의 삶은 그녀가 마흔이 된 해에 책 한 권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방송작가 이선희 내 생애 가장 특별한 선택 농촌으로의 귀환'(민미디어) 이 책을 통해 그녀만의 것이었던 `가장 특별한 선택'은 세상사람들과의 교감을 위해 통신을 시작했다.

"책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리는 조그만 선물이에요. 부채감 같은 것 있잖아요. 결혼도 안하고, 번듯하게 자리잡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엔 꼭 실업자 같잖아요."
 
4년 동안 보낸 용운마을에서의 삶을 정리한 수필집은 4년 동안 그녀가 얹혀 사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 부모님께 그녀가 드리는 선물이었다. 3개월여의 휴가를 만들어 떠난 호주여행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초여름 250쪽 분량으로 정리된 보고서를 세상에 내 놓았다. 용운마을에 있는 먹자회, 진미 아버지, 옥천 사우나 단골 아줌마, 용운 산악회 사람들 등 이웃들에 대한 얘기.

포도밭에 대한 애정 하나로 칠 순이 넘은 나이에 새벽같이 일어나 산 밑 포도밭에 오르내리기를 거르지 않는 아버지와 딸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그녀의 책에 가득하다. 재해를 만나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일어서 말없이 담 너머로 홍시를 내밀어 눈물나게 만들었던 은옥이 엄마가 "얼마 전에는 별다른 얘기 없이 토마토를 가져다 주셨어요. 책을 읽으셨나?(웃음)". 그런 이웃들 모습 하나 하나가 도시에선 느끼지 못하는 용운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감정들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빚만 더 늘어가는 이상한 한국의 농촌이지만, 나는 불교의 작은 경전에 쓰여진 그 성스러운 삶을 농촌사람들에게서 보았다.」-그녀의 책 중에서-

이선희(40)씨의 고향은 서울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아버지 이만종씨는 농사를 짓기 위해 고향 옥천으로 돌아갔지만 이선희씨는 아니었다. 방학을 하면 아버지가 있는 용운리 포도밭을 찾아 바구니에 포도를 담아 날랐던 추억만을 갖고 있다. 또 용운리에 오면 숙소로 사용했던, 당시에는 동네에서 제일 좋아 보였던 원두막을 머릿속에 그릴뿐이다. 그랬던 그녀가 동이면 용운리에 들어온 것은 지난 1999년.

"처음에는 한 1∼2년 정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구성작가 생활을 하면서 드라마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겠더라구요." 2년을 계획했던 옥천에서의 생활이 이제 4년이다. 공모전에서 3차례 낙방하는 아픔을 맛보고 이대로 복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던 그녀. 잠깐 글쓰기를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글을 안 쓰니까 무얼 해도 행복하질 않다는 것을 알았죠. 집착과 욕심을 버리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항상 베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부와 명예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흙에 묻혀 살면서 그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죠. 지금은 농사가 주업이고 글쓰기가 부업이에요." 흙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아무리 부모님이지만 그냥 얹혀 살수는 없어서, 공짜를 싫어하고 계산은 정확한 그녀의 성격 때문에 조금씩 일손을 거들었던 포도농사를 이제는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삶 중심에, 글쓰기에 비해 작지 않은 크기로 `포도 농사'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책에는 안타까운 농촌현실에 대한 아픔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농사를 짓는 동안에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런데 막상 출하할 때가 되니까 답답해서 못살겠더라구요. 농민이 원하는 가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리적으로 결정되는 가격도 아니고, 이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현장에서 함께 체험하면서 느낀 농촌의 현실을 그녀는 `억울함'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꿈을 꾼다.

「포도 수확철에는 포도밭 전체를 노상 카페로 단장하여 도시인들을 초대해서 싱싱한 포도도 먹고, 포도주도 담그고... 이름은 <옥천포도빌리지>쯤.」-그녀의 책 중에서-
 
"한 동안은 11만 회원모집을 고민해 보기도 했어요. 그러면 용운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모두 소화되거든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성급하면 안 되요, 조금씩 천천히 해 봐야죠, 심심풀이로 일을 벌이면 안 되잖아요." 가벼운 표정으로 얘기를 풀어놓는 그녀의 모습에서 문득 IMF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실직자 가정 자녀 돕기 운동이었던 `파랑새보금자리운동'을 펼쳤던 그녀의 전력이 떠올랐다.

"들미라는 마을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아요? 아버지한테 동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들었어요." 비록 부업이라고 얘기했지만 `글쓰기'를 설렁설렁 하겠다는 뜻은 아닌가보다. 그녀는 지금 `들미사람들'이라는 드라마 대본을 쓰고 있다. 이미 기획을 마치고 1회분을 완성한 상태다.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살아가는 얘기. 이선희씨는 "올 해 처음으로 포도상자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출하를 했고 아버지와 조카 이름으로 낸 포도보다 더 좋은 가격을 받았다"며 활짝 웃는 것으로 이날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