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옥천은 세월에도 윤색되지 않은 풍요로운 자산
내고향 옥천은 세월에도 윤색되지 않은 풍요로운 자산
[내고향 옥천] 청산면 대성리 출신 미광사 대표 원광희씨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2.07.24 00:00
  • 호수 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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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면 대성리 출신 원광희씨

해가 기울고 어둠이 침침하게 깔릴 무렵,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골목길은 왠지 음산하다. 그 골목길을 가로지르니 오래 돼 보이는 간판과 조그만 콘크리트 건물사이로 어슴프레 새 나오는 불빛이 빗방울에 반사되어 알 수 없는 색조를 만들어 낸다. 

빈 공간, 5평 남짓한 공간은 갖가지 달력과 차곡차곡 쌓인 인쇄물들이 가득하다. 문도 잠그지 않고 잠시 외출을 한 그 곳의 주인 원광희(60)씨를 전화로 불러냈다. "청산초등학교 42회, 청산중학교 12회, 청산고등학교 6회 출신이야" 또렷한 기억으로 읊조린 졸업 기수는 학교에서의 추억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얼마나 큰 축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은 해 드릴께요" 높낮이가 없는 차분한 목소리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고향!' 첫 번째 화두를 던지니 그의 얼굴에 눈치채지 못 할 만큼 미세한 화색이 돈다. 역시, 고향은 사람을 젊어지게 하는 기분 좋은 단어이다.
 
"금강상류인 보청천에서 멱도 감고, 목욕도 하고 그 기억이 나네. 그 때만 해도 2km는 거뜬했지. 그래서 소양강에서 열린 업자들간 수영대회에서도 60명 중 완주한 3명에 들었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6·25 전쟁이 나서 낮에는 백화산 쪽 숲으로 피난을 갔다가 밤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지"
 
"청산초등학교 다닐 때 대성리에 꼭 12명이 있었지. 남녀 여섯씩 비율이 딱 맞았어. 초등학교까지 거리가 5km 됐는데 산 쪽은 무섭다고 순번제를 정하면서 다녔던 기억이 나"  "콩서리하던 기억도 나.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도둑으로 몰릴 일이지만, 그 때는 배고프고 출출할 때 얼마나 맛있었다구"
 
줄줄이 흘러나오는 고향에 대한 편린들. 그의 눈빛은 벌써 아득한 고향 속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 친구들 지금은 부산, 거제, 서울, 인천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아직까지 연락하며 만난단다. "중학교 같이 갔던 원중희란 친구는 서울 중구에서 구의원 3선했고, 영동농고 갔던 한 친구는 벌써 세상을 떴지. 아직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는 김동철이두 있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 공주대 전신에서 수학을 전공했던 원씨는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 사이사이 친척 분이 하시는 인쇄업 심부름을 한 것이 지금 미광사 주인이 된 계기가 되었단다.
 
"예전에야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고 그랬지만, 지금은 내 인생이 이렇게 마무리되어 가는구나 생각해. 나에게 주어진 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예전에는 성공에 대한 강박감과 서로간 자존심 때문에 연락이 두절됐던 친구들도 이제 하나둘 연락을 한단다. 그는 이것이 세월이 가져다 준 깨달음의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향이 많이 변했냐구? 낯선 사람이 많아져서 조금 어색할 뿐이지. 발전은 무슨? 예전 그대로인데.. 청산에서도 외지라 발전이 거기까지는 오지 않은 것 같아" 씁쓰름한 안타까움이 일면 감돌았지만, 다 고향에 대한 애정이리라. 지금은 중년에 시작했던 인쇄업이 어느새 15년이 되었다며 이제 큰아들에게 물려 줄 준비를 하고 있단다.

선친의 묘소도 고향에 있고, 동이면에서 '미광산업'이라는 배·포도 봉지공장도 운영하고 있어 옥천에는 자주 들른다는 원씨는 고향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컴퓨터가 등장하고 복사기가 성능이 좋아져서 인쇄업이 예전 같지 않지만 나무냄새가 생생한 종이 위에 코를 찌르는 잉크 향이 여전히 좋다는 그에게서 향긋한 사람냄새 또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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