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꿀 아저씨 김성호 씨
벌꿀 아저씨 김성호 씨
함께사는 세상 [77]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2.07.11 00:00
  • 호수 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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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봉은 취미가 아닌 삶이었다는 김성호씨.

청성면, 오구니 재를 넘기 전 좌측으로 조용한 버스 정류장 하나가 마을 초입을 알립니다. 내리막길을 따라 망설임 없이 곧장 들어가면 빙 둘러선 산에 의지하고 있는 청성면 장연리 마을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곳 마을에는 김성호(68)씨가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 김씨는 그 곳에서 태어나 한 번도 장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70년 가까운 삶의 7할을 벌과 함께 했습니다.

마을 꼭대기에 있는 김씨의 집에 들어서자 마당에는 20여 개의 벌통이 놓여 있고, 마당 하나 가득 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바닥에는 힘없이 기어다니는 벌들과 이미 죽은 벌들이 가득합니다. 하루에 마당을 몇 번씩 쓸어도 마찬가지랍니다. 벌에게 마당을 빼앗긴 개 3마리는 예전에 외양간으로 쓰던 아래채 구석으로 쫓겨나, 낯선 사람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제대를 하고 할아버지는 26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벌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먼 친척이 할아버지의 집에 벌통을 가져다 놓은 것이 인연이었습니다. 시골집에 기본인 닭은 물론이고 외양간에 돼지도 기르고 작년까지는 소도 길렀고, 논농사, 밭농사도 지었지만 한 번도 벌을 그만둔 적은 없었습니다.

아참, 소는 계속 할 수도 있었는데, 작년에 정성껏 키우던 암소가 죽는 바람에 더 이상 기를 기분이 아니었답니다. 그 암소는 송아지를 배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정성껏 잘 키운 소는 주변에서도 모두 알아주었다는데. 암소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열심히 설명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의 크기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축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갈 동안 벌통은 늘었다, 줄었다 했을 뿐 할아버지의 집에는 항상 벌들이 날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벌을 기른 지가 이제 40년이 넘어섰습니다.

"다른기 있나? 그냥 하다보니까 수입도 짭짤하고 하니까 계속 했지. 그래서 한기라." 40년 경력의 양봉가의 입에서 나올 듯한 멋들어진 말을 예상했던 기자를 할아버지의 대답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벌은 거짓말을 안 해요. 언제나 정직하죠. 부지런하게 일하는 그 모습에서도 배우는 것이 많지요.」 이 정도의 답변을 예상했거든요. 그만큼 포장되고 가공된 대화에 익숙해진 탓인가 싶어 스스로에게 씁쓸했습니다. 맞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5남매 번듯하게 잘 키워 내는 거, 힘든 시절 배 안 곯고 사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절을 살아냈으니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양봉'은 `취미'가 아닌 `삶'이었습니다. 벌을 키워 공부시킨 5남매가 모두 시집, 장가를 가 외지에 나가 살면서 벌꿀 파는 걱정은 안 합니다. 오히려 꿀이 모자라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신용이여, 신용. 절대로 첫 번째 딴 것은 안 내놓지. 우리가 먹거나 이웃들하고 나눠먹지. 혹시 겨울밥 섞였을까봐 못 팔아. 믿을수록 더 조심해야지." 겨울동안 밥으로 넣어준 설탕물이 첫 번째로 따는 꿀에 배어 나올까 우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벌통만 만들어 주면 벌들이 알아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나중에 꿀이나 따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잔손이 많이 간다는군요. 매 주 한 두번 이상은 들여다보면서 벌통에 들어있는 `섶'에 알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조절도 해야되고 항상 관심을 갖지 않으면 금새 벌이 줄어든다는 군요. 그래서 게이트볼 치러 갈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양봉을 계속할 계획이랍니다. `직업을 계속 바꾸어봤자 (결실도 없이)투자만 하기 딱 좋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었습니다. `한우물 파기', 한 번쯤 젊었을 때 도시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했을 법한데. "정말 고향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없지 뭐, 내가 장남이었으니까. 그냥 농토 물려받아서 이렇게 살다보니까…."

장남은 부모님과 농토를 지키고 고향에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은 거부하기에 너무 높은 벽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애써 기억을 더듬으며 할아버지는 두 번의 출향을 기억해 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당시 할아버지의 큰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했던 능월초등학교에서 5학년, 6학년을 다니느라 장연리를 떠났던 기억. 또 한 번은 군복무 때문입니다.

22살에 세 살 어린 19살 안용순(65)씨와 결혼을 했고 다음 해인 23살에 할아버지는 군대로 떠났습니다. 3년이 채 안 되는 그 군 생활이 할아버지의 두 번째 출향이자 마지막 출향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함께 살았던 많은 친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났지만 할아버지는 같은 동네 아래윗집에 살았던 아내 안용순씨와 함께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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