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파는 차봉순 씨
멜론 파는 차봉순 씨
함께사는 세상 [76]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2.07.02 00:00
  • 호수 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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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아주머니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노란 멜론 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37호 국도, 그 중에서도 옥천읍부터 안내면 사이는 계절별 색깔이 분명한 곳이다. 대청호와 그 주변에 이어지는 산, 가로수로 심어 놓은 벚나무가 계절별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며 특징적인 계절 색을 표현해 낸다.

여기에 더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강렬한 노란색이 37호 국도를 달리는 운전자들을 유혹한다.

길가에 원두막 형태로 혹은 판매장 형태로 늘어서 있는 멜론이다. 6월에 수확과 판매가 이루어지는 환희멜론은 주변 가로수, 산의 푸른빛과 어울려 그 노란색이 더욱 강렬한 빛을 갖는다.

옛 군북초등학교를 지나 언덕을 치고 올라가다 보면 약간 오른 쪽으로 굽은 길이 조금의 공터를 허용한 그 곳에도 노란 멜론이 놓여 있었다. 대형 우산 두 개로 태양 빛을 가리고, 역시 뼈대를 세우고 포장을 씌워 햇볕과 비를 가린 평상이 멜론 판매장의 구성 전부였다. 한 쪽에는 멜론을 싣고 왔을 경운기도 제자리인 것처럼 잘 놓여 있었다.

여름이 시작되면 40여일 가량 문을 여는 길가의 이 멜론 가게(?)의 주인은 차봉순(55)씨였다. "예전에는 정말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힘이 달려서 못해. 올해도 아저씨가 힘들다고 못하게 했는데 가용돈이라도 쓴다고 했더니... 내년에는 진짜 하지 말아야지."

군북면 국원리 늘티에서 차씨가 멜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이제 7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 참외 농사를 20년 정도 지었는데 하도 오래 짓다보니 땅이 `제길을 타서'(연작피해를 얘기하는 듯) 품목을 멜론으로 바꿨단다. 하지만 이젠 멜론도 제길을 타는지 농사짓기도 힘들고, 아무래도 올해만 하고 그만 해야겠다는 차봉순씨.

얘기를 나누며 차봉순씨는 고구마 줄거리를 다듬는 손을 잠시도 놀리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고추는 이미 다 다듬어 잘 갈무리를 해 놓은 상태였다. 지나가는 차량들 구경하면서 비스듬히 누워 부채질이나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잠시도 놀지 못하는 억척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난다.

"예전에 참외 농사지을 때는 괜찮았는데 요즘에는 헛일이여. 이게 보통 원료값이 많이 들어가야지. 씨 200개 들어 있는 게 2만원이여. 거기에 비닐 값 들어가지, 또 다 사나, 죽는 것도 있지. 이것 빼고 저것 빼면 아무 것도 안 남는다니까."

크기에 따라 두 개, 혹은 세 개, 조금 작은 것은 네 개에 만 원씩. 소비자 입장에서 별로 싼 가격은 아닌데 들어가는 게 많아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더군다나 올 여름에는 월드컵 때문에 사람들의 신경이 모두 그 곳에 쏠려 있고, 멜론말고도 먹을 과일이 많으니 팔리는 것이 조금 덜하다는 것이 차씨의 설명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멜론 하나를  잘라 평상 위에 올려놓고 `얼른 맛 보라'며 재촉이다. 참외 맛과도 흡사한 것 같은데 달착지근한 것이 시원하게 먹으면 더 맛이 좋을 것 같다. "여기는 불이 없어 가지고 해 떨어지면 들어가. 아침에 9시 정도에 나와서 한 7시까지 있는가."

비닐하우스 3동, 500평 남짓에서 수확되는 멜론은 대부분이 이 곳에서 팔린다고 한다. 예전에는 옥천 5일장에도 가지고 나갔는데 이제 그렇게 많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 생각보다 하루에 팔리는 양도 많았다. 평일에는 40∼50개, 주말에는 이보다 조금 많은 한 100개정도.

"멜론은 아저씨가 경운기로 실어다 주세요?"
"내가 경운기 운전한지 한 3년 됐어. 아저씨 어디 나가면 답답하고, 그래서 아들내미한테 기아 바꾸는 것만 갈쳐 달라고 그랬지, 쉽더구만 머∼ 천천히 그냥 다니지."

뿌듯한 표정이 쑥스러움에 섞여 차봉순씨의 얼굴에 번진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손님 여럿이 차를 세우고 멜론을 사 갔다.

"아줌마, 이건 뭐예요? 호박잎인가?"
"고구마 줄거리에요. 묻혀먹으면 맛있는데."
"아 된장찌개 끓여 먹는 거요. 다 다듬어 놓으신 거죠?"
"된장찌개 끓여 먹는 건 껍질 벗긴 것말고 이렇게 잎사귀 있는 것이지."

멜론을 한 꾸러미 산 여자 손님이 평상 위에 있던 고구마 줄거리가 눈에 들어왔는가 보다. 아직 신혼인 듯 보이는 젊은 여자 손님에게 차씨는 고구마 줄거리의 요리법까지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한 봉다리 담아 주고 건네 받은 돈은 2천원. 자리에 앉아 손에 물이 들도록 고구마 줄거리를 다듬는 걸 본 사람으로서 괜히 억울했다. 아무래도 2천원이면 너무 싼 것 같은데.
"그냥 집에서 먹으려고 다듬은 건데, 달라고 그러니까. 준거지 뭐"

차봉순씨의 고향은 청주다. 도시에서 어떻게 이 곳까지 시집을 왔느냐고 묻자 "연애도 못하는 숙맥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우리쩍만 해도 연애 걸어서 결혼도 많이들 했는데, 남자들이 쫓아다니면 죽는 줄 알고." 차봉순 아주머니의 표현대로 `아가씨 쩍'에 차씨는 안양에 있던 금성방직이라는 공장에 다녔다.

그 때 베틀 같은 것을 놓고 일 했는데 간혹 기계 위에 껌을 가져다 놓는 남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껌 먹으면 꼭 그 남자랑 살아야 하는 줄 알고 먹지도 못했다니까. 그 때 옆에서 일했던 충청도 애는 약사랑 연애 걸어서 결혼했는데. 한 번 가보니까 참 잘살더라구."
 
지금 생각해 봐도 우스운지. `별 얘기 다한다'며 차씨는 크게 웃는다. 그 때 동료는 연애해서 잘 산다는 얘기부터. 동갑인 아저씨와 맨 날 티격태격 한다는 얘기까지. "아저씨가 사람이 좋아서 그런지 술 먹고 늦게 들어올 때가 있어. 그러면 얼마나 억울한지. 막 쏘아붙여."
 
결국, 옥천에 살고 있던 당고모의 소개로 아저씨를 만나 당시로는 늦은 27살 나이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 옥천에 살게 된 내막(?)이었다. 아들만 삼 형제 두다보니 딸 하나가 그렇게 아쉽다는 아주머니는 옥천읍에서 같이 `계모임'하는 친구들이 보면 놀릴 것이라는 큰 걱정과 함께 사진기 앞에서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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