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엔 벌써 고향(군북면 항곡리)이 담겨져 있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건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의 눈망울을 따뜻하게 했다.
초를 다투는 긴급한 상황들에 익숙해졌던 탓일까? 여유있는 고향의 정담은 그에게 편안함을 던져줬던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직업이 아니라면 서러워할 그 자리. 모든 사람들이 어려울 때 신속히 눌러대 찾는 그 곳 한가운데 그가 위치해 있었다.
충청남도 소방본부 119종합상황실 실장 조석구(50)씨. 그는 충남전역에서 걸려오는 119전화를 신속하게 상황판단하여 처리하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하루에 오는 전화만 해도 평균 150여통. 눈코 뜰 새 없이 긴장하며 지내는 하루하루가 그의 얼굴에 잔주름을 만들었지만 선량하게 웃는 표정까지는 바꾸지 못한 것 같다. 그의 곁엔 50여년 세월을 함께 한 고향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 순간의 판단에 생명이 오고가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며 삽니다. 신속하게 일처리를 해서 생명을 구하는 경우 밀려오는 보람은 하루의 피로를 싹 씻게 만듭니다” 군북면 항곡리. 그는 지금은 증약초 대정분교로 남아있는 대정국민학교를 졸업했다. 항곡리는 오지중의 오지라 동면, 증약, 방아실 어디를 가든 10리에서 20리는 족히 나왔어야 됐다고 말한다. 학교에 갈 때도 족히 5리 넘게 걸어야 했단다.
“그 당시 24명이 졸업을 했어요. 지금은 고향에서 운명한 친구도 있고, 각각 외지에 떨어져서 연락이 잘 안돼요. 지금 하는 모임 ‘황골애향회’는 항곡리 친구들이 모여 고향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만든 단체에요” ‘황골’이라는 말은 항곡리의 옛이름이란다.
1년에 설과 추석 명절때 2번 모여 마을회관 연료비 지원, 어버이날 행사지원, 마을 유선TV설치비 지원 등 자신들을 있게 해준 고향에 대해 조그만 보답을 한다. 90년에 40여명으로 발족한 ‘황골애향회’는 앞으로도 독거노인 및 극빈자 지원과 장학금 지원 등 고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향은 외로운 타지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정신의 응원군입니다. 고향으로 맺어진 인연들은 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죠” 자신의 자라온 모습을 계속 지켜봐준 동네 노인분들과 그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본 자신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감은 그가 고향을 자주 찾고 봉사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
“외형상 도로가 깔리고 초가집들이 사라지고, 많이 변했지만, 사람들은 늘 그대로에요. 고향에 가면 그 시간 그대로 멈춰 있는 듯해요. 동네 어른들에게는 난 여전히 어린 석구고,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나 할까요?” 그의 이런 말에는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다는 아쉬움도 곁들어 있다.
“옛날 생각이 납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소방서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양철에 사기를 입혀 할아버지 명패옆에 고이 걸어놓은 ‘불조심’이라는 문구 때문이었어요. 그게 은연중 내 무의식속에 자리 잡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소방관에 자원했죠, 그 때부터 26년간 소방서 일을 했으니..참 오래 했습니다”
“고향 녀석들 생각이 나요. 유정현이는 읍내에서 어디 부동산 한다고 하던데, 기배녀석은 또 선거에 나왔나 보네요. 집이 그리 풍성하지도 않을텐데 왜 자꾸 나서는지. 그래도 그놈 기백 하나는 알아주죠. 이번에 군북 군의원은 면 공무원 하던 박찬웅씨가 됐나보네. 동네 외사촌 형인 덕환(김덕환·57)이 형은 지금 우리 동네 이장이에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른다. 그가 내뱉는 사람이름 하나하나에 애정이 묻어난다. 요즘은 안면도 꽃박람회니, 월드컵 축구니 지방선거로 인해 119상황실은 정신없이 바빴단다. 그러면서 못내 쑥스러워하면서 꺼내는 말 “저번 안면도 꽃박람회때 동네 노인분들 구경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47명 버스 대절해서 한나절 다녀왔는데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바다를 처음 보시는 분도 있던지 조개껍질 계속 부여잡고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내 마음이 다 흐뭇해지더라구요”
그는 향수를 넘어서 고향의 발전을 이야기 하고 싶어했다. “많은 소모임들 조직적으로 연대해서 고향발전에 큰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요. 옥천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것 아니겠어요” 그는 덧붙여 지역 언론이 해줘야 할 몫이 많다며 신문에 대한 당부의 말까지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