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칼럼>송건호 선생과 '곡필 언론사'
<김삼웅 칼럼>송건호 선생과 '곡필 언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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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23 12:25
  • 호수 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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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정신적으로 크게 감명받은 글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사상계〉1964년 10월호에 실린 청암 송건호 선생의「곡필언론사」란 글이다. 원고지 100매에 이르는 이 논설은 젊은 나를 충격에 빠뜨리고 생애를 두고 지침이 되었다. 내가〈한국곡필사〉와〈유신시대의 곡필〉을 쓰게된 배경이다.

그때까지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은 모두 정론직필인 줄 알았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박한 소년기의 한계였을 것이다.〈명논설집〉이나〈명사설 100선〉등을 구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청암의「곡필언론사」는 "망국 변호론에서 3ㆍ15 부정선거 변호론까지" 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한국근현대사 반세기의 곡필을 다루고 있다. "왜제(倭帝)에 붙어 망국을 변호하고 그것을 항구화시키려든 매국의 곡필, 관권에 아부하여 부정과 불의를 대변하려던 비양심의 곡필, 언론인의 자세가 흔들리고 언론관제화의 기운이 높은 오늘, 우리는 이 과거의 추악한 곡필기록을 더듬어본다"라는 발문에서 글의 의미와 성격을 밝히고 있다.

청암이 이 글을 쓸 때는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항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탄압하고,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사건을 날조하여 발표하는 등 정국이 소연하던 시절이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그보다 지식인ㆍ언론인들이 겁을 먹고 아첨하는 곡필이 신문ㆍ잡지를 뒤덮고 있었다.

■ 어지러운 세상 속 더욱 그리운 '청암' 정신

제도언론이 비판과 시시비비의 정기능을 잃고 권력의 충견노릇을 할 때 이 논설은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 일대 충격이었다.

지난날 곡필배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현실의 어용언론인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글 따로 행위 따로인 사람이 없지 않지만 그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였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때는 자유언론 수호 투쟁에 나선 기자들을 자기 손으로 자를 수 없다고 사표를 던지는 용단을 보였다. 언행일치의 언론지사였다. 해서 후배 언론인들이 "20세기 한국의 가장 훌륭한 언론인"으로 뽑았다.

청암의 정론정신은 유신말기와 5공시대 재야언론을 주도하고 6월항쟁 후에는 세계 언론사상 처음으로 국민주를 모아〈한겨레신문〉을 만드는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새천년이 열리는 2001년 7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국현대사의 흔치않은 언론계 스승이고 지식인 사회의 사표였던 청암은 글쟁이가 어떤 경우에도 곡필을 써서는 안된다는 투철한 정론정신을 남겼다.

청암은 권력자의 시선 대신 늘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고, 현실 안주 대신 고단한 역사의 길을 택하였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논객들이 역사에서 가뭇없이 사라지는 중에도 청암은 그의 아호처럼 '푸른바위'로 살아남았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보수언론이 유신찬양가를 부르던 시대로 돌아가고 국민들의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즈음에 청암 선생의 정론정신이 그립다. 내년 탄생 90주년을 맞아 선생의 생가(옥천군 군북면 비야리)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세워졌으면 싶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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