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지역의 3.1운동
옥천지역의 3.1운동
특별기고 : 윤길원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9.04.10 11:10
  • 호수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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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3월27일이원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그리고 당일 아침부터 육창문 댁에 보관해 두었던 거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모두 가지고 수묵리를 출발한 애국지사들은 장날 장터에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주면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되니 이원장터는 물론 이원면내가 발칵 뒤집혔다.

이날 이원장에 모인 약 3백명의 군중이 합세하여 오후 1시경 이원주재소(파출소)로 몰려가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당시 주재소에는 일본 헌병이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어서 옥천헌병대와 연락하여 완전무장한 헌병 20 명이 말을 타고 구둔티 고개를 급히 넘어서 이원장터로 달려오게 되었다.

이때 총으로 대항하는 일본 헌병들에게 쫓긴 군중들은 다시 주재소에서 장터로 몰려와 만세를 다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금산에서 와서 만세시위대에 참가하였던 이경만, 이일만 형제중 동생 이 경만이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자 그의 형 이일만과 금산 사람 이재선 등이 격분하고 흥분 만세를 부르면서 기마대의 말을 몽둥이로 때리는 등 시위를 다지 시작하였다. 이때에 성명을 알 수 없는 장꾼 2명이 헌병의 흉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이원주재소 주임 기시모토는 주동애국지 사 육창주, 허상기씨 등을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를 본 김용이, 허양, 이면호(후에 옥사), 허상구, 허찬 지사등이 주동하여 다시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에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이들 마저 감금시켜버리자 군중들이 다시 격분하여 주재소 앞에 있는 보안등과 현관 벽, 담장 등을 부수고 투석전을 벌였고 육창주, 허상기 지사등이 이틈을 이용하여 탈출, 또다지 군중의 앞에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이원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그후 이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은 모두 연행되었고 끝내 석방되지 못했으며,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후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는 역경을 거치고, 재판을 받은 뒤 각각 1년에서 5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진 몸에 고문과 옥고에 시달려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돌아가셨다. 이 거사가 있은 뒤 옥천에서 남쪽으로 약 12km쯤 떨어져 있는 이원면 수묵리에 사는 그분들의 후손들은 더욱 박해를 받았고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가난하고 고생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계속 되었다.

이들 애국지사의 명복을 삼가 빌며, 그 후손들이 이제라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그 공적을 기리고 관심을 가져야만 되겠다. 그리고 그후 이분들의 독립정신을 빛내고자 ‘기미 3.1독립기념비’를 이원역 광장(이원면 강청리 신흥)에 지난 1958년 8월15일 당시 제2대 이원면민회 의원틀이 주축이 되어 건립, 전해오고 있다.



3. 청산면 3.1운동



1919년 3월이 지나고 4월2일 청산면 장날이었다. 청산은 예나 이제나 보은, 영동, 옥천 3개군에서 장 꾼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청산면에서도 바로 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약 5백명의 장꾼들이 합세하여 일시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청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한 분들은 김인수(金仁洙), 박재호(朴在浩), 김철수(金徹洙) 지사를 비롯 하여 김한주, 고한주, 김지수, 양한기 지사들이었다. 그중 김인수, 김철수 지사는 청산주재소 현장에서 순국하셨다.

4월2일(음력 3월4일) 청산장날 시작한 독립만세 운동은 4월4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야간 시위로 이어졌으며, 이때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인하여 현장에서 5분의 애국지사가 순국하였고, 56 명이 크게 부상당하였다. 청산장터와 만리 천 둑(제방)에서 시위가 이루어졌고 간간히 청산주재소로 몰려가 시위하는 등 그 규 모가 격렬한 만세시위였다. 다시 4월7일 청산장날이 돌아오자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때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그후 대전감옥에 수감되어 악랄한 고문과 재판과정을 거치는 동안 1919년 6뭘에 박동희 지사가 태형을 받고 집에 돌아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이때 이분들에게 가한 일제의 고문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청산면에서도 이원면에서와 마찬 가지로 3월초 고종임금의 국상을 당하여 서울에 갔던 박재호(백운리.당시 고물상 경영) 지사가 서울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식에도 참가하는 등 서울의 사정을 직접 보고 .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즉시 청산으로 되돌아 와서 면내 인사 박동희, 안병하, 김복만 등 의 지사들과 만나서 거사계획을 하고 실행 하였다. 이와 갈이 우리 옥천군 이원면과 청산면에서 1919년 3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간 만세시위를 계속한 결과 7 번의 거사에 양민 사망 40명, 부상(중상) 92명이 발생하였고, 일경에게 연행 피검된 분이 48명이란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그당시 만세시위 군중은 모두 비무장 비폭력으로 아무런 무기나 흉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단지 우리나라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만세의 함성만을 지르고 있었다. 이 순박한 민중을 향하여 총을 쏘고 박해를 가한 것이 바로 일본인들이었다.

검거된 이들 48명은 고문과 재판의 과정을 거쳐 1년에서 5년의 형기를 각각 치루어내야 했고, 그들이 겪고 당한 수모와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후손들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분들에 대한 그 당시 신문기사와 재판기록 등이 일부분이지만 아직 남아 보존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며, 이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분들의 공로를 선양하고 또 건국훈장을 추서하여 드리고 있다. 재판기록을 찾아내기가 매우 힘든 일인데도 뜻있는 지역인사들께서 헌신적인 노력으로 찾아냈으며 이들

애국지사들의 각자 형량(형기), 그리고 그분들에게 추서된 훈장에 대하여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므로 별도로 정리하고자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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