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를 마감하던 그날
80년대를 마감하던 그날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0.01.06 00:00
  • 호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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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31일 오전 10시30분. 80년대를 마감하던 그날. 무참하게 짓밟히고 탄압되어 왔던 질곡의 와중에서 어둠과 오류의 응어리로 점철되어 온 5공비리와 광주 문제 등 그간 사회의 무질서를 말끔히 청산, 민주화의 길목에서 2천년대를 향한 보다 밝은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해 거듭나기 위한 몸짓의 일환으로 전직 대통령을 국회증언대에 세우고 80년대의 온갖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간 여·야 중진의원들의 끈질긴 논란끝에 합치점을 보게된 그날, 오랫동안 어둠의 장막에 가려진 채 거슬러 올라왔던 사실들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4천만 전 국민의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라는 실망으로 밖에 우리 앞에 와닿지 못했던 것같다.

『일해 재단 설립은 자신의 버마 방문차 동반했다가 무참하게 쓰러져간 그들의 유족을 위한 기금모금으로 뜻있는 것이었고 새세대 육영회, 심장병 어린이 장학재단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그간 수많은 각고 끝에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중요한 자리가 이렇게 밖에 엮어질 수 없었던가.

광주사태는 12·12로 이어지는, 사회가 극도로 혼란된 연장선상에서 빚어진 필연의 결과로서 유언비어에 속은 일부 시민들의 폭등으로 발단된 것이며, 양민학살 마저도 자위권 발동으로 운운…. 진실로 밝혀져야 했던 핵심은 깡그리 묻어버린 채 오직 자신과 주변인들을 덮어주기 위한 피상적인 변명으로 일관된 그날의 증언대는 온 국민을 또 한번 희롱하는 꼴이 되고야 만 것이다.

88년11월 백담사로 떠나던 날 언급했던 사실보다도 미흡했던 증언임을 놓고 볼때 그를 측은한 감정으로 지켜보던 국민들은 이내 발길을 돌렸고, 그래서인지 80년대를 마감하는 그 순간은 더더욱 서글펐는지 모르겠다. 1년 여동안 백담사에 파묻혀 100일 기도하며 참회한 것이 고작 그것에 불과했던가. 정치란 일반 국민이 보기에도 권모술수뿐이라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밝은 미래를 열자」고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급변하는 국제화의 조류에 부응하지 못한 채 민주화에 걸맞는, 국민을 위한 뜻있는 정치는 그 언제나 도래할런지, 불투명한 정치현실의 앞날이 암담하기만 하다. 역사를 거듭하다 보면 좋은 일은 잊혀지게 마련이고 궂은 일은 여전히 가시로 남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좀더 냉정했어야 되지 않을까. 80년대초 행해진 언론통폐합이 사이비 언론을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는 사실은 또 무엇인가. 사회정화 차원에서 치루어졌다던 삼청교육으로 인하여 아직도 2천7백68명이란 영구장애자가 삶의 아픔을 눈물로 실감하고 있다.

찬 서리가 내린 망월동 묘지에는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한 채 떠도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조금만 알았더라면…. 영광의 21세기를 맞을 희망찬 90년을 좀더 먼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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