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화가 김기창씨가 그린 중봉선생 영정 모시고 중봉충렬제 치러야 되나
친일화가 김기창씨가 그린 중봉선생 영정 모시고 중봉충렬제 치러야 되나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3.08.14 00:00
  • 호수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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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1913·서울 운니동 출생) 화백의 친일전력 논란은 청주의 한 사회단체가 "운보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세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김기창 화백은 일제시대 친일화가의 선두주자인 이당 김은호 화백의 수제자격으로 섬세한 사실 묘사 위주의 일본식 채색화법을 배워 일제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부터 주최한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뛰어난 묘사력으로 1937년부터 연속 4회에 걸쳐 특선,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는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 전람회'(1943. 1)를 비롯, 당대의 친일화가들과 함께 일제가 자행한 '태평양전쟁'의 기금마련을 위한 전람회에 협력한 것을 비롯, 일제말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에 추천작가로 발탁되는 등 친일화가의 길을 걸었다.

또한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조선청년 징병제를 시행한 1943년 8월부터는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 선전하기 위한 선전작업에 나섰는데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젊은 나이에 '선전'의 추천작가가 된 그는 해방후에도 제도권 미술계의 중심으로 일제때 누렸던 명예와 인기를 유지하면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 나갔다. 이런 왕성한 활동으로 1971년 3·1 문화상을 받은것을 비롯, 1977년 온관 문화훈장.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3년 예술원상, 1986년 5·16 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 1987년 색동회상 등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이렇듯 친일전력이 있는 화가에 의해 항일 구국대열의 선봉장격인 조헌 선생의 영정이 그려진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으며 해방후 친일세력의 제거를 위한 '반민족특별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이 친일세력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산된 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군내 주민들과 문화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조헌 선생의 영정은 다시 그려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앞으로 주목되는 것은 조헌 선생의 후손들인 백천조씨 문열공 종친회의 행보이다.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한 것은 아니나 영정문제는 종친회 차원에서도 당연히 다시 제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 한편 중봉충렬제를 매년 치르고 있는 군 문화계에서도 하루 속히 매듭지을 문제임에 틀림없다. 친일화가 작품이라는 오명으로 얼룩진 영정을 앞세우고 조헌 선생의 애국충절을 후세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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