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 신기리 새터농장 대표 노종호씨
청성면 신기리 새터농장 대표 노종호씨
함께사는 세상 [48]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8.18 00:00
  • 호수 5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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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픈 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노종호씨는 농업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농사꾼이다.
노종호(43·청성면 신기리 새터농장 대표)씨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지난 85년이다. 모두 떠날 줄만 알았지 돌아오는 경우가 흔치 않았던 당시의 `귀농'. 그렇다고 서울에서의 삶이 고단하고 각박해 마지못해 찾아든 고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15살의 어린 나이에 상경해 궂은 일을 해가며 자리잡은 서울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돼 있었고 벌이도 괜찮았다. 그런 상황에서 극구 반대하는 아내 김영옥(39)씨를 설득해 고향에 내려올 때는 꿈의 `실현'과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읽었기 때문이다.

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짓고 있던 농토 700여평과 그가 서울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사 두었던 농우소(병작소-소를 길러주는 대가로 농사일에 사용하고 나중에 새끼라도 낳아 팔게되면 주인과 나눠 갖던 소)15마리였다.

▲꿈을 일구는 `새터 농장'
그렇게 시작한 귀농 생활 10여년 끝에 그는 청성면 도장리에 있는 `새터농장' 주인이 되었다. 7천 여평 규모의 새터농장에는 고추, 포도, 복숭아, 배 등이 자라고 있다.

농장 뒤편으로 서있는 돈사(豚舍)에서는 구제역이 발생하기 전까지 돼지들이 자라고 있었고 조만간 돈사의 수리를 거쳐 다시 돼지를 기를 예정이라고 한다. 그가 농장을 경영하면서 지키고 있는 원칙이 있다면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초제에 대한 그의 `반발'은 다른 농약보다 더욱 심했다.

"다른 농약은 마셔도 살려낼 수 있는데 제초제는 안 그렇잖아요. 또 텔레비전에서 고엽제 피해가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정말 제초제를 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죠."

그래서 그의 포도 하우스 안에는 `오리'가 들어가 있다. 지난해 단양에서 있었던 복숭아전문반 교육에 참가했을 때 강사로부터 잡식성인 `기러기'가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좀더 구하기 쉬운 오리를 사다가 넣었다. 뒤뚱거리며 다니는 오리들은 1천여평 되는 포도하우스 안의 풀들을 거뜬하게 뜯어먹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녀석들의 배설물은 그대로 좋은 거름이 된다. 이런 효과 때문에 올해 과수밭에 할 방조망 시설 작업이 완료되면 과수밭에도 기러기나 오리를 풀어 놓을 생각이이다.

"작년에 동해(凍害)로 복숭아나무 500주 중 250주가 죽어서 모두 뽑아내는데 손가락만한 지렁이들이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만큼 땅이 살아있다는 얘기니까요."

지력이 살아난 것은 단순히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과수 휴면기에 병·해충의 밀도를 낮춰주기 위해 뿌리는 농약정도로 농약살포를 최소화했다는 것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벅찰 정도로 땅에 듬뿍 집어넣는 퇴비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가 과수밭에서 뽑아 든 잡초의 뿌리 끝에 퇴비가 그대로 묻어 날 정도로 많은 퇴비를 땅에 넣고 있다. 이렇게 제초제 사용을 중단하면서 농산물에 대한 생산원가 절감은 물론이고 지력이 강화되면서 좋은 농산물을 얻어내는데도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의변제'에 어려움도...
새터농장을 만들기까지 노종호씨의 `귀농'생활이 그리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가축을 기르며 사료 값을 대기 위해 낮에는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고 아침, 저녁으로는 꼴을 베다 소에게 먹일 정도로 악착같이 일을 했다.

"쌀 전업농으로 위탁영농도 했었죠. 제가 지금까지 사용한 기계가 콤바인 3대, 트랙터 3대, 이앙기는 4대짼가 그래요." 그렇게 `희망'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일을 해 나가던 중 90년대 중반 많은 농민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연대보증 문제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연대보증 문제에 얽히면서 지금도 갚지 못하고 있는 대의변제금이 5천여만원. 그냥 5천만원뿐이라면 모르겠는데 다른 정책자금과 맞물려 노씨의 어깨를 심하게 짓눌렀다. 다행히 농가부채 대책 마련의 일환으로 지금은 거치 기일도 늘고 연리도 11%대에서 5%대로 낮춰져 숨통이 트인 상태다.

"1년 내내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연말이면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 갚기도 힘들어버리니까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힘에 부치더라구요. 다 때려치우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어요" 10여년 간의 귀농 생활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정리해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 했던 그를 만류한 것은 그렇게 귀농을 반대했던 아내 김경옥씨였다.

"어떻게 마련한 것들인데 이제 포기하냐며 아내가 적극 반대하더라구요. 지금은 아내가 저보다 더 열심히 일해요."(웃음)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농업'
"농촌이 힘든 것은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농업 전문가'들이 거의 없다는 것도 원인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그는 큰아들에게 농업전문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많은 농민들이 자식에게만큼은 이 `지긋지긋한 농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의 농촌현실임을 감안할 때 평범하게 보이진 않는다. 그것은 또 자녀에게 농업을 권유할 만큼 농업에서 `희망'을 읽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스스로도 각종 `교육'에 게으르지 않다. 농협중앙회건, 농업기술센터건 교육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달려간다. 이런 연구자세와 영농 현장에서의 적용 때문인지 청성면에서 처음으로 `시설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그의 농토에는 매일 300여명씩 견학을 오기도 했다고 노씨는 말한다.

"살아가면서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노종호씨는 농사를 짓고 싶어 고향에 돌아와 하루하루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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