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독립유공자 배용석 열사
숨은 독립유공자 배용석 열사
평생을 항일투쟁에 몸바쳐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0.03.03 11:03
  • 호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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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써 71돌을 맞는 3.1절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던 숨은 열사가 있어 이 고장에서도 뜨거웠던 3.1만세운동의 열기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이원면 장찬리 308-9에 본적을 둔 배용석 열사가 그 주인공으로서 당시 이원면과 군서면에서 만세시위가 활발했던 것을 감안할 때 배열사의 경우에는 이 고장에서 장렬히 산화할 때까지 투철한 항일정신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겨져 있지 않다. 현재 이원면에는 역 앞에 당시에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지만 허상기, 헝상구, 허상준 의사 등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으며 끝내 일제에 항거하다 자폭한 배열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배열사는 1889년 8월 17일 이원면 장찬리에서 동학접주였던 배기붕의 후손으로 태어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투철한 항일의식을 키워오다 1919년 거국적인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3월 15일 허상기, 육창주 의사 등과 함께 이원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3월 27일 오후 1시경 이원장날을 이용하여 장에 운집한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난사와 체포로 주동자가 체포되었지만 계속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이듬해인 1920년 5월 6일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부락청소 검열에서 헌병들의 행패가 심하자 이에 분개해 헌병들과 싸우다 3주간이나 구금되었다 풀려나기도 했다. 그 후 배열사는 경북 금릉군 부황면 파천리 금광으로 가서 광부로 가장, 그곳에서 백여명의 동지들을 규합, 다시 거사할 것을 의논하고 광산에서 쓰는 화약염초로 사제폭탄을 제조하여 시험하던 중 이를 눈치 챈 왜병들의 기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삼도봉에서 헌병들과 대치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동지들은 쓰러지고 자신은 자폭하고 말았다.

현재는 배열사에 대한 구체적인 항일투쟁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보훈처에 배열사의 공적사항으로 투옥된 상황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1986년 12월 16일자로 표창장 제66479호에 의해 국가독립유공자로 표창되었다. 호적 또한 6.25전쟁 때 소실되어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직계자손도 없는 상태여서 열사의 조카인 배춘식(50·옥천읍 가풍리 665-9)씨가 김천에 있던 묘를 89년 9월 27일에 가풍리로 이전시키고 사적비를 세워 묘역을 단장했다.

배열사와 함께 16세 때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광산에서 시신을 거두어주었다는 한을용(87·이원면 강청리 86)씨는 『단순히 흘려버릴 과거만은 아니며 당시의 만세운동상황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고 말한다.

기록이 6.25 때 소실된 관계로 관계기관과 유족측에서의 순국일 및 순국할 당시의 나이도 엇갈려 있는 상태이다.

아무튼 배열사는 이 고장 많은 순국열사와 더불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애국지사의 한사람으로 늦게나마 정당하게 평가받게 된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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