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에서 백두를 뛰면서 열렬히
한라에서 백두를 뛰면서 열렬히
개꿈이 용꿈으로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0.02.03 11:03
  • 호수 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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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8일 스포츠 뉴스의 톱뉴스는 북경아시안게임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이 거의 절망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설문조사 결과가 퍼뜩 떠올랐다.

一만약 첫째, 미국과 일본 둘째, 미국과 북한 셋째, 일본과 북한 그리고 남한과 북한과의 경기가 있을 경우 당신은 어느쪽을 응원 할 것가.

첫째의 경우에는 아직도 미국이 우위를 점했고, 둘째의 경우에는 미국보다 북한의 수가 더 많았으며, 셋째의 경우에는 북한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마지막의 경우에는 북한을 응원하 겠다는 사람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 한다. (혹, 위 설문조사 내용이 잘못 소개 되었다면 이는 순전히 나의 아둔한 기억탓이다)

물론 같은 설문을 유신때 조사를 했다면 결과가 크게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동독과 서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벌써 작년의 일이다. 그들은 이제 동서독으로 나뉘어 불리기 보다는 통독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한다. 동서독 이전의 독일은 1,2차 대전을 일으켰던 장본인, 전쟁이 끝나면서 연합국은 독일을 두려워하여 인위적으로 독일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어찌보면 동서독의 분단은 인과응보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는 어떤가.

일제의 식민지였다가 종전과 함께 한국을 2차대전의 전리품으로 생각했던 미·소는 38선을 경계로 분할 강점 하고 말았다. 일본이 아닌 한국을, 1945년은 한국에 있어서 해방을 가져다 주기는 커념 분단의 비극을 가져다 주고만 해였다. 5년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결과는 엇비슷하게 나타났다. 한마디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희생 양이 바로 한반도의 분단이 었다.

그후 역대정권은 민족통일보다는 정권유지를 위해 밖으로는 미국과의 허울좋은 혈맹 때문에 베트남 땅에 숱한 젊은이의 피를 뿌렸고, 안으로는 안보를 빌미로 반공을 내세워 철권정치를 휘둘러오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한때「우리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다」라는 유성환 전의원의 국회발언이 파문이 되어 국시논쟁을 일으켰던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그뒤로 전후 무시하고 남북한 직통전화 개설,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남북적십자회담, 남북한최고당국자회담제의, 평양축전참가검토 및 번복, 문익환 및 임수경의 방북, 금강산개발참여검토 등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오고갔다. 이것이 다민족통일을 위한 동족간의 몸부림이었으나 아직 가시적으로 나타난 뚜렷한 결과는 없다.

그리고 분단 45년째인 1990년 한달도 채 지나기 전에 충격적으로 정치권은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우면서 세당이 합당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 가운데에는 통일을 위한 의지표명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 얘기를 처음으로 돌아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

첫째 경우에는 중립적입장을, 둘째와 셋째 경우에는 당연히 북한을, 마지막의 경우에는 남북한 모두를 응원할 것이다. 그것도 한라에서 백두를 뛰면서 열렬히.

이것은 꿈이 아니다. 분명 개꿈이 아니다.

김상후(옥천읍 양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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