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용문영당.
초기에는 구룡촌의 곽, 홍, 송씨가 창건한 용문서당이었던바 이 곳에서 출생한 우암 선생이 유년시절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기도 하다.
우암 선생을 현인으로 지칭하여 경현당이라 불리워진 용문서당은 많은 후진들을 양성한 곳이었다.
경현당이 그후 용문영당으로 불리워진 것은 1697년 숙종 23년에 우암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부터다. 선생의 영정은 전국에 여러 본이 있으나 그중 3본이 당대에 수사한 것인데 그 하나는 죽천 김진규의 초본을 화사에 의해 완성한 것과 또 하나는 노가재 김창업의 초본을 화사가 완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이 77세 당시 화사 한시각의 소사본등이 있는데 이중 용문영당에 봉안된 우암선생의 영정은 죽천이 그린 것이며 지금은 초본만이 남고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목조 기와 집으로 정면 여섯칸, 측면 두칸반, 맛배집으로 방이 한칸이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되어 있다.
글을 가르치는 서당으로는 좁은 공간일 수 밖에 없는 용문영당은 한적한 곳이었기에 지금은 더욱 쓸쓸함 만을 자아낸다.
유생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던 경현당(용문영당). 그러나 세월을 거듭하면서 점차적으로 우암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 지면서 주변에는 이름 없는 잡초만이 무성한 채 세월의 무상함만을 느끼게 하고있다.
유학의 대가로 문장에 능했던 김창협은 선생을 이렇게 노래한다.
영웅과 호걸의 자질로서
조심하고 근신하는 공을
쌓았도다.
호연의 기운을 거두었으니
가히 써 우주를 가득차게 하며
조그만 한 몸에
지중을 짊어 졌으니
가히 써 화산을 능가할 수 있겠도다.
모당에 올라가 왕의 스승이 되었어도
교태함을 못볼세라
산길은 곤에 처해
사슴의 벗 되었어도
궁색함을 못 볼세라.
높고 또 높구나 찬솔이
엄동에 솟아있네.
억만년 뒷사람들도
이 칠분밖에 못 그린 모습 뵈오면 그래도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3백년 동안의 간기(세상에 없는 기운)의 모인 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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