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자취 발전기틀 삼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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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면을 찾아서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89.11.25 11:03
  • 호수 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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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엄한 산악지대로 형성되어 동남부에 소백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고 동서로 보청천이 관통하며 총면적 80.9㎢로 군내에서는 제일 넓은 면으로 하고 있는 청성면.

그러나 산간벽지가 대부분이어서 밭작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이고장 특성에 맞는 작목 선정에 심혈을 기울여 나가고 있다.【편집자주】

연 혁

청성면은 본래 청산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관계로 청산군 서면 남면 두개의 행정 구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서기 1914년 4월 군 폐합과 동시에 청산군이 옥천군으로 합병됨으로 인하여 청서면 청남면으로 개칭 되었고,다시 1929년 4월1일 행정구역 합병으로 인하여 청남 청서 두개면을 합하여 청성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정각영(62) 면장외에 면직원과 함께 17개의 법정리·동(29개 행정리동) 그리고 52개 부락,총 주민수 6,074명의 청성면은 옥천군의 소재지로부터 38km 동쪽에 위치하여 전체 면적 80.9㎢중 경지면적 23%정도,임야 68%로 준엄한 산악지대와 산간 마을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산성의 자취

오구니재 고개를 넘어 청성으로 들어서다 보면 고개위서부터 성터였음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고개 위에 위치한 저점산성은 여지승람, 문헌비고 등에 그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 동북편을 방어하도록 쌓았다하며 안에는 우물이 한 곳 있었다한다. 둘레가 200~300m의 이성은 그 성벽 높이가 2~3m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지금은 붕괴되어 자취만이 남아 있으며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이 성은 토성과 가깝고 석축으로 쌓은 점 등을 감안하여 볼 때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 성 바로 아래쪽에는 굴산성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이 성은 둘레가 1500여m 정도의 비교적 큰 토성으로 아랫편에 보청천이 굽이쳐 흐르고 성안은 오목하고 편평하며 산 주위를 돌과 흙으로 높이 쌓았던 것으로 보인ek.

한편 고문헌에는 이 성의 이름이 기성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의 굴산현이 경덕왕때「기산」혹은「기성」이라 바뀐 때문으로 보고 있다.

면내의 절터

면내의 곳곳에서는 절터의 흔적 또한 드물지 않게 발견 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문수사는 문수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장리 마장 마을의 뒷산인 문수산은 마을로부터 600m 북서쪽에 위치하여 있는데 이 산의 정상 부근에는 1000평이 넘는 절터의 흔적과 사찰지였다고 전하여지는 논밭들이 보이고 있다. 이곳 절터에서는 한편의 유물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창폐에 관한 기록조차 없어 그 지어진 연대나 사라진 시기를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습 되는 기와 파편들을 통하여 볼 때 이 사찰은 조선초에 지어졌다가 임진란 당시 불에 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지는 전설

한편 청성면은 산성면이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이 산성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성이 있기 전에 이 마을에 어떤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이 남매는 보통 사람과 달리 출중한 힘과 비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 어머니에게 화나는 일이 생겨 이들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게 되었다. 즉 아들에게는 나막신을 신고 한달내에 서울을 다녀오게 하고 딸에게는 뒷산에 성을 쌓도록 하여 먼저 끝내는 사람은 용서를 하나 늦는 사람은 용서치 않겠다고 하였다. 아들은 비교적 쉬운 일이므로 기한내에 서울을 다녀 집에 돌아 왔으나 딸은 성 쌓는 일을 도저히 끝낼 수가 없었다.

아들은 서울을 다녀와 보니 누이가 아직 성을 쌓기에는 너무 멀어 누이가 어머니로부터 용서받지 못하고 벌을 받게 될까 염려되어 어머니에게는 도착을 숨기고 누이의 성 쌓는 일을 도와 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누이 몰래 성을 쌓았다. 누이가 낮에 나와 성을 쌓으려 하면 이상스럽게 밤새 성이 많이 쌓여 있어 동생이 오기 전에 성이 쌓이면 동생이 벌을 받을 것 같아 밤 사이에 쌓아진 성을 허물어 뜨리기에 열중하였으니 마침내 아름다운 두 남매의 두터운 정을 알게 된 어머니는 두 남매를 모두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독 산

청성면 소재지 입구에서 좌측으로 보면 보청천이 흐르고 주위 경관이 좋아 보이는 그곳에 오똑하니 솟아 있는 조그만 산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곳에는 정자도 지어져 있다. 지금도 여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독산이라 불리 우는 곳이다.

이 독산은 옛날 대홍수때 속리산에서 떠내려온 것이라 한다. 그러자 속리산 주지스님은 중을 보내 이 물줄기를 따라 독산을 찾아 나서게 하여 결국 청산현에 흘러와 있음을 발견,「독산이 애당초 속리산 소유였으니 매년 지세를 바치도록 하라」고 전달하였다. 이에 매년 지세를 바쳐 오다가 현명한 현감 하나가 이 청산현에 부임하여 또 그해 지세를 받으러 온 중에게「이 독산은 우리 청산현에 아예 필요가 없으니 가져가라. 그러지 못한다면 해마다 보관료나 지불하라」하여 그 후로는 속리산 주지에게서 해마다 보관료를 받아왔다 한다.

미개발의 관광자원

한편 이 고장 청성에는 관광의 명소로 개발될만한 장소가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행정상 무회리라 불리우는 산중 마을이다. 가구라야 고작 20. 마을 앞 고개에는 수령이 4백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나무부터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난 5월초순 이 나무가 수일에 걸쳐 울음을 그치지 않아 온 동네 주민들이 모여 제를 지냈고 곳곳에서는 이 신비한 현상을 목격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녹음기와 비디오까지 동원, 촬영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뒷산 광주리산 중턱에는 형성 연대가 6억년으로 추정되는 자연 석회동굴이 개발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데 이 동굴은 지난 75년 보도진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개발가치가 없다는 관계기관의 판정을 받고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 동굴을 탐사해 본 사람들은 내부의 신비함과 웅장함에 한번쯤 개발을 고려해 볼만한 관광자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으며 아직도 이 굴과 주변 보청천변의 경관이 어우러지면 관광명소화 할 여지가 충분히 남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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