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친구에게
서울에 있는친구에게
세상은 참 공평하지 않습니다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89.11.11 11:03
  • 호수 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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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혹 좋은 일들은 어떻구요. 오늘은 무엇을 논한다는 나 자신이 어줍잖기도 하고, 불현듯 형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 속이 갑자기 그리움으로 가득 차올라 이렇게 편지란걸 써봅니다.

가을이 그 끝까지 깊어졌습니다. 지난 밤부터 오늘 이 밤까지 하늘은 계속 먹장구름의 강이고 바람이 내건너 숲을 울리며 이따금씩 얼음 알갱이같은 빗방울을 흩뿌립니다. 아마도 이 비 그치고 나면 가을도 한고비 넘어 겨울마을의 이정표를 만나게 되겠지요.

아아,안타깝습니다. 내가 그토록 가슴을 앓며 사랑하는 가을의 그 모든 풍정을 제대로 껴안아보지도 못한 채 벌써 배웅해야 하다니요. 그리고 난 아직 무엇하나 거둬 들인것도 들일것도 없는 빈 손인데 겨울이 지척이라니요 걱정 또한 태산입니다.

하긴, 그래도 난 차라리 나은 편입니다. 우리 마을의 다른 분들을 보면 말이지요. 그들은 이런 얕으막한 감상이나마 가져볼 짬도 없이 일년 내내 등이 굽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흙에 발을 묻고 살았는데 이제 곧 한 해 농사를 마무리짓고 나면, 뭐 손에 남는 게 있을라구요. 얼마 전에 끝난 담배수매 때도 몫돈들이야 만졌지만, 이것 저것 제하고 나면 남긴 커녕 오히려 제 품값마저 깎아먹고만 형편이니 그야말로 만져만 봤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추곡수매에나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는데 그것 역시 실낱같은 것이어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터라 내내 조바심만 치고들 있답니다. 게다가 정부와 여당은 9%다, 11%다, 턱없이 낮은 인상률을 놓고 한자리수니 두자리수니 해가며 침을 튀기질 않나,지난해와 같은 가격으로 잠정수매를 시작하니 많이 하면 그「실낱」에 칼질을 해대니 농민들 가슴이야 그저 두방망이질이지요 (그 사람들은 농민들을 아예 바보로 취급하는 모양입니다. 이대로 감정수매에 응하고 나면 그 이후 확정되는 오름폭이야 뻔한 것 아닙니까? 그때가서는, 다소 극한적이긴 하지만 그나마 효과를 기대해 볼 만한 것은 그 방법뿐인 듯한 데,수매 거부운동도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농민이 비록 아직은 무지하다고 하나 그래도 개에 뿔이 없는 정도는 압니다)

해도 너무하는 거지요 97년까지 농축산물 161개 품목을 추가 개방하겠다질 않나,물가가 오르는 주원인이 쌀값 등 농산물 때문이라질 않나… 아니, 쌀값의 인상이 그렇게 위협적입니까? 그동안 쌀값이 올라서 올해 소비자 물가가 벌써 5%나 올랐답니까?

경제쪽에는 철저히 무식한 나이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의 정책과 시장체계하에서 쌀값이 물가지수 5% 상승에 작용하려면 지금보다 최소한 100%이상 올라야 한답니다. 더구나 일반 가정의 지출에 있어서 쌀값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라서 요즘의 쌀 시세는 오히려 내리막길입니다. 물론 형네와 같은 도시인들이야 완벽한 소비자의 입장이니까 생산자인 농민들과 생각이 다를건 당연하고 또 빡빡한 생활이라서 얼마간 압박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일테지요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약간의 쌀값 상승 때문에 느끼는 그것은 모든 물가의 오름에서 느끼게 되는 것과 똑같은 것이고,어쩌면 조건반사적이며 어느 만큼은 습관적으로 과장된 느낌이기도 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물가의 주범은 땅값이고, 집값이며 터무니없는 과소비풍조고, 바로 그런 투기에 열 올리고 그런 사회현상을 방조 내지는 조장하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두요

하아,세상 참 공평하지 않습니다. 돈만 많으면 누구든 정치가나 고급관리들 마냥 양반도 되는데 농민들은 농민들인 한 역사 이래로 한 번도 상것 신세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밤이 너무 깊었습니다. 바람소리가 더욱 스산합니다. 그래도 여기 내 방은 한겨울이라도 견딜 만큼 따뜻합니다. 일전에, 그 바쁜 아침 시간임에도 일부러 나를 끌고가 새 원고지 한묶음을 사들려 주던 형의 깊은 우정이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세상은 그처럼 서로 정을 나누며 함께 사는 것이지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많이 가진 사람들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형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집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요.

서형석 <청산면 대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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