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울길 흔적 돌아보며 떠난 길
2014년 여울길 흔적 돌아보며 떠난 길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14.11.28 13:57
  • 호수 12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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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면 지탄리 오배거리여울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 옥계폭포-심천면 장동리-이원면 백지리 김문기 유허비-이원대교-이원면 원동리 적등루 자리-오배거리여울 8km 구간

지난 3월 우리는 우리 고장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원 만세운동길을 기획했습니다. 얘깃거리가 참 많았죠. 올해 처음 찾았던 여울은 동이면 적하리에 있는 삼학골여울. 삼학골여울을 거쳐 금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윤일봉 등성이를 걸어 삼일운동 기념비가 있는 이원역까지 걸었습니다. 올해로 제95주년을 맞은 삼일운동을 잊지말고 주민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해서 이원면 만세운동의 발상지인 수묵리까지 이원 독립만세운동길을 걸었습니다. 아울러 갑오년인 2014년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돌이 되는 해입니다. 역시 동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리 고장 동학운동길인 청성면 거포리로부터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마을까지 걷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보다 의미를 찾아 걸은 길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금강여울길이 우리 옛 선조들의 숨결이 담긴 길일 뿐만 아니라 동학운동과 삼일운동 역시 선조들이 익숙하게 걷던 그 길로 이어졌을 것이기에 마련했던 기획이었습니다. 그리고 11월 여울길은 금강을 거슬러 영동군과 경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영동과 우리 고장의 경계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울 오배거리여울을 가는 길 역시 많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옥천·영동 경계를 조금 넘긴 했지만 옥천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한 옥계폭포가 이번 여울길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해보다 의미를 다져 걸었던 금강여울길의 마무리 시점에서 독자들과 다시 만나게 될 내년 3월을 기대하며 서로가 갖고 있던 흉금을 털어놓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 오배거리여울 자리는 지금 자동차가 달린다. 원동리에서 지탄리로 건너가는 이원대교가 여울 자리 그대로다. 정수병씨가 일행들에게 여울을 설명하고 있다.

■ 올해 금강여울길을 마무리하는 오배거리여울

올해를 마무리하는 여울길이라 그런지, 버스가 출발하는 아침부터 아쉬움 반, 설렘 반이다. 여울길 참가자는 25명. 평균은 넘는 수준이다. 대청호주민연대(대표 주교종)와 옥천신문사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금강여울길이 올 한해 아홉 번의 길을 거쳐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 옥천 경계에 가까운 옥계폭포를 시작으로

여기는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에 있는 옥계폭포다. 수십 미터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장관이다. 옥계폭포 앞 안내판에 써있는 영동군 월이산.

왠지 낯설다. 이제껏 이원면 원동리 월이산이라고만 불렀는데. 영동에서도 똑같이 월이산, 달이산이라는 산 이름을 쓰는 것을 보면 월이산 등성이를 경계로 살고 있는 옥천·영동 사람들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여울지기 정수병씨는 역시 여기서도 해설이 가능하다. 폭포 위에 살던 이무기가 승천하려다 사람들 눈에 비쳐 승천하지 못했다는 얘기하며, 폭포에 얽힌 얘기를 풀어내는데, 영동군 문화해설사가 폭포 해설을 자청한다.

우리 국악의 기초를 닦은 난계 박연 선생이 폭포에 와서 피리를 불면 주변 새들과 짐승들도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얘기, 너무 늦어 주위가 어두워지면 호랑이가 어린 난계 선생을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얘기가 풍성하다. 그리하여 박연폭포, 옥문폭포 등의 별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좋다.

이제는 져서 산길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옥계폭포를 내려서니 금강이 흐르는 심천면 장동리 넓은 둔치가 눈에 들어오고, 4대강사업으로 했다는 다리가 보인다.

사람만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만든 다리다. 이를 위시해 둔치에 길을 내고 나름 공원처럼 조성한 것인데, 1년에 한 번씩 큰물이 지나면 청소를 시작으로 다시 시설물을 해야 할텐데 이런 인공 구조물들이 필요할까 싶다. 어쨌든 둔치에 낸 길도 인공으로 만든 것이니.

둔치길을 걸으면 이원면 백지리로 이어진다. 이원 경계를 막 넘을 즈음 일행은 도시락을 펴놓고 맛난 점심을 먹는다. 햇살이 좋아 들밥을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백지리는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했던 충절의 표상, 사육신 백촌 김문기 선생의 고향이다.

사당골에 있는 김문기 유허비 앞에 선다. 유허비 내용에는 김문기 선생이 생전에 했던 공조판서 대신 하지도 않았던 이조판서로 새겨져 있다. 1804년에 세운 유허비이니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도 아니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정조 대에 복관작되면서 추증된 벼슬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에 증직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조판서 벼슬은 의아하다..

   
▲ 여울길 참가 일행이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 옥계폭포에서 정수병씨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 김문기유허비를 거쳐 적등진 나루에서

김문기 선생이 어떻게 사육신이 되었는지, 야사에서 전하는 사육신 유응부 장군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며 백지리를 떠난다.

가을은 높은데 감나무에 걸린 감은 풍성하다. 이원면 원동리와 지탄리를 잇는 이원대교를 건너보면 여울자리가 그대로다. 오배거리여울은 예부터 '오배'라고 불렸던 작은 배를 건너던 여울자리여서 그렇게 불렀다. 여울 자리에 얽힌 얘기를 다리 위에서 정수병씨에게 듣는다. 오배거리여울은 현재 원동리와 지탄리를 잇는 이원대교가 가설된 바로 그 자리다.

이 여울길은 배로도, 사람 발길로도 매우 중요한 한양길이었다. 영동군에서 올라오는 선비들의 발걸음은 이 길을 통해 옥천을 통해 청주로, 한양으로 올라갔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헌 선생이 왜병을 맞아 처음으로 전투를 치른 곳이 적등나루였으니 오배거리여울의 역사성은 증명하고도 남는다. 조헌 선생의 참모를 지냈던 정립 선생의 '고암집'에 기록된 내용이다.

일행은 바로 옆 적등루 자리로 오른다. 금강 건너편 지탄리 쪽에서 보면 왼편으로 원동양수장이 있는 작은 등성이가 적등루 자리다. 적등루 자리엔 현재 선산곽씨 납골묘가 조성돼 있다. 금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보아 누각 자리로는 최고였을 것이다.

적등루와 더불어 적등원 자리 주변에 위치해 있는 것하며, 송시열 선생의 아버지 송갑조 선생의 유모 헌비의 산소가 적등루 바로 옆에 있다는 점도 또 하나의 볼거리이자 얘깃거리다. 송시열 선생이 귀양을 갔다가 호출되는 도중에 죽었던 1689년 세운 헌비의 묘는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렸다는 점에서 전국에서도 흔치않은 보은의 정표로 남았다.

여울길을 마감하듯 한 방울씩 내리던 빗방울은 여울길 뒷풀이하는 내내 옷이 촉촉이 젖을 정도로 추적추적 내린다. 적등루 오른 길에 넓은 수로를 쉽게 건너도록 하기 위해서 혼자서 나무다리를 놓는 정수병씨는 물론이고, 술 안주를 도맡아온 박덕분씨, 빵을 내년에도 맡아 사오겠다는 권영미씨, 올해 마지막 여울길이라고 일행들에게 손수건 한 장씩을 선물하는 서울 권영자씨, 뒷풀이 소줏값에 보태라며 억지로 봉투를 집어던지고 나가는 용인 출향인 남기화씨까지 이젠 한 식구가 생겨버린 여울길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의 문화가 되었다.

   
▲ 오배거리 옆 적등루 자리에서 불과 10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 선생의 유모 헌비의 묘가 있다. 헌비 묘비.
   
▲ 이원면 백지리 김문기 선생 유허비를 둘러본 일행들이 사당골에서 흔읍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올라서고 있다. 길옆에 낙엽이 한가득이다.
   
▲ 여기는 어딜까? 영동 심천 장동리 금강변에서 둔치길을 따라 백지리로 걷는 길. 늦가을 정취에 걸맞게 갈대 꽃이 피어 있다.
   
▲ 여울 옆 적등루 자리에서는 금강이 훤하게 보인다. 금강이 훤히 보이는 이 자리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리라. 올 마지막 여울길 일행들이 금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 여울길 참가 일행이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 옥계폭포로 올라서기 앞서서 서로간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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