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칼럼>풍도와 이윤의 처세
<김삼웅 칼럼>풍도와 이윤의 처세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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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0.10 12:45
  • 호수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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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변혁기가 되면 크고 작은 권좌에 이동이 따른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권좌의 이동이 순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왕조나 독재체제는 권좌가 세습 또는 영구화된다. 인류사는 권좌를 둘러싼 쟁투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건시대의 군주들은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특수성을 정당화하고, 비판자들은 천부인권설을 내주장하며 평등성을 정당화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천부인권설이 대세가 되고 있다.

1천여 년 전 중국에 풍도(馮道)라는 인물이 있었다. 중국의 영웅호걸, 시인묵객, 제자백가 범주에 속하지 않는 독특한 사람이다. 하북성 출신인 풍도는 당나라 말기에 연왕을 섬기고 연나라가 망하자 진나라에 출사하여 재상이 되었다. 그후 후당으로 옮겨 재상에 발탁되고, 다시 후진ㆍ요ㆍ후한ㆍ후주의 천자를 차례로 섬긴 기간이 30년을 넘었다. 다섯왕조 여덟 성씨, 열 한 명의 천자를 차례로 섬기며 고위관리로 30년을 지냈다. 재상 노릇만 20년을 하였다. 예로부터 절개와 염치가 없는 아첨배ㆍ기회주의자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와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받는 인물이 있다. 중국 고대역사에 나오는 이윤(伊尹)이란 사람이다. "다섯 번 걸주(桀紂)에게 나가고, 다섯 번 탕(湯) 임금에게 나갔다(五就傑 五就湯)는 바로 그 당사자가 이윤이다. 걸과 주는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폭군이고 탕은 대표적인 성군으로 꼽힌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폭군과 성군 사이를 다섯 번 씩이나 오가면서 벼슬을 하였을까. 이윤은 일찍이 맹자가 "성인 중에서도 그 시대를 책임지고 나서려 했던 사람"이란 뜻으로 '성지임자(聖之任者)'라 했던 장본인이다.

이윤은 자기의 포부를 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려면 권력을 가진 자와 함께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악인의 표본이며 독재자의 상징처럼 되는 걸에게라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걸은 이윤의 헌책과 경륜을 받아들일 만한 군주가 못되었다. 지체 없이 그의 곁을 떠나서 이번에는 탕을 찾아갔다. 그러나 탕은 이윤의 포부를 실현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걸에게로 갔다가, 탕에게로 왔다가 하기를 무려 다섯 번씩이나 하게 되었다.

기회주의적이고 무소신으로 보일만 하지만, 오로지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신념이었을 뿐 결코 권좌를 좇아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때문에 후세에 이르러 '오취걸 오취탕'이란 말이 생겼지만, 이것은 이윤을 욕하거나 기회주의의 뜻이기보다 소신과 신념을 함축한다. 풍도의 행동과는 상반되는 길이다.

중국 후한시대 유소(劉邵)는 <인물지>를 썼다. 중국 최초의 '인물읽기'란 평가를 받는 책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무릇 성현이 아름답게 여기는 것 가운데 총명함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으며, 총명함이 귀하다고 여겨지는 점 가운데 '인물을 잘 식별하는 일' 보다 귀한 것이 없다. 인물을 식별하는 일에 진실로 지혜롭다면, 많은 인재들이 각자의 자질에 따라 자리를 얻게 되고 여러 업적들이 흥하게 될 것이다."

권력교체기에 권좌가 바뀌고 신ㆍ구 인물이 교체된다. 정권의 승패는 결국 어떤 자리에 어떤 인재를 앉히느냐에 달렸다. 풍도형이냐 이윤형이냐,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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