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칼럼>실종된 4ㆍ19혁명정신
<김삼웅 칼럼>실종된 4ㆍ19혁명정신
김삼웅(전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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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4.18 11:11
  • 호수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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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9민주혁명 56주년을 앞두고 있다. 우리 역사상 성공한 혁명은 4ㆍ19가 처음이다. 이승만의 1인독재에 시달리던 학생ㆍ시민들이 앞장서서 수백명의 희생과 수천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독재를 물리친 혁명이었다. 4ㆍ19혁명으로 우리는 근대적 시민국가가 됐고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혁명 이듬해 5ㆍ16군사쿠데타를 당하여 박정희 18년을 시작으로 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지는 30년의 군사독재를 겪게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는 사라졌지만 다시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사이비문민정부'가 계속된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을 비롯하여 간첩조작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다.

4ㆍ19혁명정신은 사라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장관후보들이 청문회 과정에서 5ㆍ16을 쿠데타라고 발언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헌법 전문에 3ㆍ1정신과 임시정부, 4ㆍ19혁명 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여 '4월혁명'은 우리 나라의 정체성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4ㆍ19를 짓밟은 5ㆍ16을 쿠데타라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역주행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4ㆍ19는 직접적으로는 이승만 독재와 3ㆍ15부정선거에 저항하는 반독재 투쟁이지만, 4월 혁명의 의의를 단순도식으로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담긴다.

첫째, 4ㆍ19는 계층ㆍ신분ㆍ지역ㆍ성별의 구분 없이 범국민적, 범민중적으로 이룩한 국민혁명이다. 국민적인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둘째, 외세는 물론 특정 정치 집단이나 세력의 조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중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주체의식을 보였다.

셋째, 반공을 분명히 하면서 남북 간의 대화를 제의하여 민족통일의 의지를 나타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대화가 본격 거론되었다.

넷째, 매판자본ㆍ원조물자 착복 등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경제질서를 타파하고 산업의 근대화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4ㆍ19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가장 먼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섯째, 정체된 사회에 신생의 활력을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민이 근대국가 건설, 이른바 '네이션 빌딩'을 하게 되는 사회의식에 눈 뜨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섯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립된 주권국가를 세우고도 전근대적인 신민의식에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시민의식을 갖게된 것이다. 시민의식을 싹트게 한 국민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1960년 4월19일 서울대학교 학생회는 '4월혁명 제1선언문'인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을〉발표했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어설픈 것임을 교시한다."

56년 전 이맘 때 학생들은 이승만을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힘차게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권을 쟁취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며 떠받드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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