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여중 박근하 체육교사
옥천여중 박근하 체육교사
함께사는 세상 [33]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5.05 00:00
  • 호수 5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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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직보다는 영원한 평교사로써 언제까지나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박근하 교사.
▶아이들과 늘 함께 있고 싶습니다
관성회관, 무대 위에서는 왠지 어색하고 세련되지 않은 청소년 그룹사운드의 연주와 노래가 울려 퍼지고 손에 풍선을 들고 소리높여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열기가 가득하다.

청소년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이런 무대가 자주 마련된다. 옥천의 `청소년과 청소년문화', 이 두 가지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현재 옥천여중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근하(53) 체육교사.

청소년들의 문화 행사가 펼쳐지는 곳이면 항상 모자를 쓰고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실수나 규정 위반사항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미주알 고주알' 짚어나가는 그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하지만 춤을 추는 아이들과 음악을 하는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연습 공간 마련을 위해 뛰어다니고 무대에 서길 원하는 동아리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고심하는 그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헷갈리기도 한다. 그의 지인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그에게 `그러다가 옥천군 딴따라(?) 대장 되겠어?'라며 우스개 소리도 던진다.

박 교사가 지금과 같은 청소년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84년부터 88년까지 옥천고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는 불법 써클로 규정돼 단속의 대상이 되었던 동아리가 눈길을 피해 지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가만히 보니까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느라고 패싸움도 하고 문제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차라리 지도교사를 위촉하고 양성화시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죠."

단속하고 규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에 자신의 은사이기도 했던 당시 옥천고 김송열 교장과 협의를 거쳐 20개의 동아리를 인정하고 활동을 양성화시켰다. 동아리 활동이 일찍 시작되어서인지 지금도 옥천고등학교에는 30여개의 동아리가 구성돼 다른 학교나 지역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박 교사는 청소년에 대한 섭섭함도 얘기한다.

"청소년들의 문화가 발전해 나가는 방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책임감이나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깝죠."

최근 유행어가 되어버린 광고 카피처럼 `지킬 것은 지키는' 청소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속상할 때도 많다. 힘들게 구해준 동아리 연습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자신들은 물론 후배들까지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데에 대한 아쉬움에서부터 그가 소망하는 청소년상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는 마음이 아프다. 또 정신없이 변하는 아이들의 문화와 세상을 교육계가 따라잡지 못하고 항상 뒤쫓아가기만 하는 것도 답답하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해서 그런지... 한마음 축제한다고 한참 단속하던 게임대회 열어서 상주고, 아이들은 다 펌프할 때 DDR(디디알) 경연대회 한다고 그러구... 항상 교육계에서는 뒷북만 치는 것 같아요.(웃음)"

펌프며 DDR이며 그의 세대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들 단어들을 그 차이까지 정확히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박 교사의 모습에서 오히려 신선함이 느껴진다.

▶사회적 어른이 필요하다...
"청소년 문제요?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들을 비롯한 어른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79년 옥천여고로 발령받은 후 지금까지 옥천에서만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눈에는 아직까지 청소년 문제가 그리 심각할 지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청소년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사회적 어른들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무슨 청소년 문제 관련 회의에 들어가면 항상 학교에서 생활지도 안하고 뭐 하느냐는 얘기를 들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 스스로 길을 지나가다가 교복을 입고 담배 피우는 학생을 못본 척하고 지나간 적은 없는지 생각해 봐야 돼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사이동을 통해 기간만 채우면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들이 굳이 학생들이나 학부모들과 마찰 일으키기를 꺼리는 경향도 아쉽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학부모의 목소리가 커진(?) 현실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단다.

어차피 지역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은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해 나가야 하지만 지금은 학부모의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커지는 불균형 현상을 보이는 것 같다며 우려를 나타낸다.

▶교사가 된 이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옥천읍 문정리가 고향인 옥천 토박이다. 아침에 이원역에 도착한 기차가 울리는 기적소리를 신호삼아 집을 나서 기차를 타고 충남중학교까지 통학을 했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해 충남중학교에 있었던 축구부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운이 안 맞았는지 운동을 계속할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옥천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손댄 것이 수영장에서 시작한 수영복 대여점이다. 아버지에게 들켜 혼쭐이 나긴 했지만 이미 초등학교 시절 `아이스께끼' 장사와 `신문배달' 등을 통해 일찌감치 사회생활에 눈뜬 그였기에 수영복 대여점을 선택한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장계리에 수영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장사를 했죠. 당시 공무원들 한 달 월급이 2만원도 안될 때였는데 대여점에서 하루 잘 벌면 2만원도 더 벌었으니까 괜찮았죠."

그게 68년도 얘기다. 그렇게 옥천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장사를 하다가 충북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을 하면서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교사의 길에 들어선다. 그가 교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항상 아이들 곁에서 함께 생활 할 수 있다는 이유 한 가지다.

▶관리직 꿈 품지 않는 영원한 평교사
교사를 선택한 이유는 오십을 훌쩍 넘겼으면서도 교감이나 교장에 전혀 꿈을 두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리직으로 올라서면 아이들하고는 끝이잖아요. 지금이 좋아요. 아이들하고 이렇게 생활할 수 있으니까요."

1973년 박 교사는 영동 용문중학교에서 첫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명예를 걸고 다음의 조목을 굳게 지키겠습니다'로 시작하는 스카우트 선서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한국보이스카우트 지도자 길에 들어서 지금은 옥천보이스카우트 훈육위원장과 충북보이스카우트연맹 소년대 훈육위원을 맡고 있다.

어려서의 다양한 경험과 보이스카우트 활동 등이 지금 청소년 문화를 이해하고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박 교사는 얘기한다.

"앞으로 더 열심히 아이들에게 베풀며 살아야죠.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한없이 베풀다보니 때로는 그의 승용차와 자녀들이 수난(?)을 겪기도 하지만 30여 년의 교직생활 동안 인연을 맺은, 이제는 30∼40대가 되어버린 제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보람이라는 대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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