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66)안남면 청정리>옛 전통과 사람이 공존하는 마을 청정리
<마을탐방(66)안남면 청정리>옛 전통과 사람이 공존하는 마을 청정리
마을 명칭과 문화 보존하며 주민 화합 도모
안남서 두 번째 큰 마을, 한때 면 최고 규모
  • 권오성 기자 kos@okinews.com
  • 승인 2014.02.14 11:33
  • 호수 12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_안남면 청정리는 일제강점기 이전만 하더라도 면사무소가 있던 면소재지 마을이었습니다. 상송과 하송, 점촌(전촌), 심청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된 청정리는 안내면 인포삼거리에서 안남면 방면 575지방도를 따라 3.5km 정도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때 마을 주민 수만 800명에 달했던 큰 마을인 청정리는 현재 182명이 살고 있으며 상당수가 65세 이상 노인들인 시골마을로 변했습니다. 마을규모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노인을 공경하는 효 사상과 전통문화를 소중히 지켜가는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정월대보름을 3일 남겨놓은 11일 한창 대보름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는 청정리를 찾았습니다.>
 

▲ 하송마을. 본동이라 불리기도 하며 청정리 내 4개 자연마을 중 가장 크다.


■ 면내 최대 마을 흔적 여전히 남아

청정리는 상송과 하송, 점촌, 심청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상송과 하송, 점촌은 서로 인접해 있으며, 심청은 마을 앞을 지나는 도랑을 건너 1k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명의 유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동옥(82) 안남면 노인회장은 과거 심청은 별개 마을로 존재했고 나머지 세 개 자연마을과 현재 도덕리 일부가 청정리였다고 설명했다.

"상송과 하송을 합쳐 송정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을 뒤에 훌륭한 소나무 숲이 있어서 '송'자가 붙었고, 마을에 정자가 있어서 '정'자를 합친 거죠. 마을은 저희 5대조인 유 장 어르신께서 하송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까지도 하송을 본동이라 부르고 있어요. 점촌은 전씨가 들어가 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라 원래 전촌이 맞는 겁니다. 심청은 예전에 청림동이라 불리던 독립마을이었는데 청정리에 합쳐졌지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면소재지 마을이었던 청정리는 1960년대만 해도 800명에 달하는 주민이 살았다. 지금도 청정리에는 식당, 농기계수리점, 요양원, 방앗간 등 면의 중심지에나 있을법한 시설들이 남아있다. 양순분(85) 경로당 할머니방 회장은 시끌벅적했던 동네분위기를 하나씩 꺼냈다.

"그때는 청정리가 세도 크고 대단했죠. 마을에서 잔치를 하려고 하면 돼지를 2~3마리는 잡아야 동네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빈 집은 아예 없었고 좁은 집이라도 7~8명씩 살았어요. 많은 집은 10명 이상도 있었고. 골목마다 배나온 사람(임신부)이 여럿 있었고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몰려다니며 놀았죠. 먹고살기 힘든 시기였지만 다들 열심히 일했고요. 사람이 많아도 서로 우애가 좋다보니 그땐 정말 활기찼어요."

주민들간 단합이 워낙 잘되다보니 동네 처녀가 다른 마을에 시집을 갔다 안 좋은 일을 당하면 동네사람들이 몰려가 울력성당하기도 했단다. 덕분에 청정리 사람들은 세가 크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란다. 

▲ 상송마을. 하동 마을 뒤편에 있으며 하송과 상송을 합쳐 동정마을이라 부른다.
▲ 심청마을. 하송에서 약 1km 떨어진 마을로 한 때 청림동이라는 독립 마을이었다.

전설과 민담이 곳곳에서 전해

마을마다 전설 없는 곳 없지만 상대적으로 청정리에는 많은 전설과 민담이 전해진다. 먼저 족두리 모양의 족두리바위와 사모관대(관복으로 결혼 할 때 입는 복식) 모양의 사모바위가 마을 앞뒤로 자리한다. 전통결혼의 상징인 족두리와 사모관대를 의미하는 두 바위는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다산과 평안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또한 무쇠 솥을 만들던 자리를 일컫는 쇠꼬니에는 지금도 풀이 안 나는 곳으로 남아있으며, 마을 인근 저수지 건축에 사용하던 흙을 가져간 장소를 질펀날이라 부른다. 진흙을 퍼 나르던 날망이라는 의미라고. 상송마을에서 독을 만들던 곳이었던 큰독골과 작은독골의 경우, 큰독골은 큰 독만 만들고 작은독골은 작은 독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또한 세 기가 남아 전해지는 선돌 송정 1~3호(박스기사 참조)가 마을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청정리에는 이미 역사가 된 문화유산만 있는 건 아니다.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산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다. 상당수 마을에서 사라진 대보름 행사를 이어가는 것은 물론 주민들이 돌아가며 제관을 맡아 대보름 이전까지 몸을 정갈히 하도록 한다. 또한 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회관 등 주요기관과 제신탑에 금줄을 걸고 바닥에는 흙을 바둑판 형태로 9곳 놓아 액운을 방지했다. 식당을 하고 있는 정정순(72)씨는 정월대보름의 의미를 떠나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즐길 수 있는 잔치를 이어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전에는 사당이 있는 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다들 나이가 많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회관과 돌탑에서 제를 지내요. 금줄을 쳐놓고 대보름날 잔치를 하는데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서로 복을 빌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니까요. 같이 놀면서 복을 비니까 서로 사이가 좋아질 수밖에요." 

▲ 청정리는 예로부터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네 어르신들은 겨울이면 하송에 있는 경로당에서 하루를 보낸다. 사진 왼쪽이 마을에서 가장 고령인 유분남 어르신.

옥수수가 주 작물, 토마토·깻잎 시설재배도

▲ 유분남 어르신
청정리 주민들은 대부분 안남 특산물인 옥수수를 생산한다. 고령인 주민이 많아 대규모로 농사짓는 주민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벼와 콩을 재배하는 주민들이 있다. 젊은 주민들은 시설재배를 통해 수익을 올린다. 청정리에서는 8농가가 깻잎, 2농가가 토마토를 재배하고 일부 호박을 재배하는 주민도 있다.

10여 년 전인 2001년 마을회관 2층에 설치한 찜질방은 지금까지 주민들이 애용하는 시설이다. 월 1만원의 회비로 홀수 날은 남자, 짝수 날은 여자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동안 이용할 수 있다. 찜질방이 마련된 마을의 상당수가 운영부담이나 이용률 저조, 노후화 등으로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대비된다. 

이 마을 최고령 어르신은 유분남(92)씨. 11일 만난 유분남 어르신은 옷은 물론 머리까지 단정하게 빗은 채 경로당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상도에 살다 7~8세에 청정리로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그는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마을에서 부지런하고 건강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유분남 어르신에게 올 해의 소원을 묻자 역시나 동네사람들의 평안과 안녕을 들었다.

"소원이야 동네 사람들 아무사고 없이 무방하게 잘 살아갔으면 하는 거지 뭐.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 많아서 학교도 잘 못하고 했는데 이제는 굶지도 않고 (찜질방에서)목욕도 자주하고 좋아. 다들 건강하고 잘되었으면 좋겠어."

어르신 위한 시설보강 과제

▲ 유병권 이장
여느 시골마을과 마찬가지로 청정리에도 어르신이 많다. 아이들이라 해봐야 초·중·고등학생을 모두 합쳐 8명에 불과하다. 젊은 사람들이 외지로 나가 노인들이 많은 마을인 만큼 어르신들을 위한 시설을 보강하는 게 유병권 이장의 과제. 올 해 신임이장으로 취임한 유병권 이장은 경로당 시설을 늘려 어르신들의 공동생활을 보장하는 게 임기 중 목표라고 밝혔다. 현재 심청과 하송에만 있는 경로당을 늘려 점촌과 상송에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독거노인의 비율이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서 경로당은 사실상 공동생활공간으로 활용된다는 게 이장의 생각이다.

"노인들은 부담이 되니까 집에서 보일러도 거의 안 켜고 사시잖아요. 그나마 경로당에 모이면 난방비도 절약되니까 겨울이 되면 특히 경로당에 모이시는 거예요. 앞으로 경로당은 점점 노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공간이 될 텐데 지금 시설로는 부족해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현재 경로당까지 걸어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요. 장기적 과제가 되겠지만 마을의 환경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꾸준히 경로당을 더 늘려보려고 합니다."

▲ 점촌마을. 삼화초등학교 자리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다산'의 상징, 청정리 선돌 세 기
■ 지난해 한 자리에 모아 보존책 마련

청정리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선돌이 세 기 존재한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선돌에 모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암돌인 송정 2호와 송정 3호에는 구멍이 있어 그 곳을 파거나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자녀가 생긴다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지난해까지 선돌은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송정 1호가 축사 한가운데 있고 3호는 고추밭 한가운데 서 있어 보존방안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지역 향토사학계는 물론 문화재청에서도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주민들은 마을의 기념비가 서있는 마을회관 맞은편에 선돌을 옮겼다. 원래 번호순대로 왼쪽에서 1~3호를 두려 했으나 수돌이 1기, 암돌이 2기인만큼 가운데에 수돌을 두고 양옆에 암돌을 두기로 했다고. 유동옥(82) 안남면 노인회장은 암돌을 함께 두면 싸움이 나 마을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 양옆에 세웠다고 설명했다.

현재 선돌이 서있는 곳은 자갈이 깔리고 주변정리가 되었지만 마땅한 표지판이 없는 상태다. 그나마 송정 1호와 송정 3호는 이전에 쓰던 표지판을 한 쪽에 뒀지만 색깔이 바래 알아보기 힘은 상황. 김성순(79) 청정리 노인회장은 마을의 중요한 문화재인 만큼 하루빨리 표지판을 세워 주민들과 외지인들이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돌만 서 있으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얼른 표지판을 세워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대로 있어요. 마을의 중요한 문화재인데 하루빨리 조치가 되었으면 합니다."

▲ 하송에 사는 유동옥 안남면 노인회장이 선돌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