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이 만난 사람>"고맙습니다 신부님"
<옥천이 만난 사람>"고맙습니다 신부님"
'한센인의 친구' 성심원 유의배 신부
  • 박누리 기자 nuri@okinews.com
  • 승인 2014.02.07 11:54
  • 호수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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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날아온 낯선 나라,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함께 하는 삶. 스페인 게르니카 출신의 유의배(69, 스페인 이름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는 반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문둥병, 천형병 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센인은 이 땅에서 가장 낮고 외로우며 약한 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한 33년. 그의 삶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난달 13일에는 제3회 이태석 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때 밝힌 수상 소감이 인상적이다.

"저는 한센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게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왔을 뿐입니다."

<옥천신문>은 지난달 24일과 지난 1일, 성심원(경남 산청군 소재)을 찾아 유의배 신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유 신부는 달변가가 아니었다. 조금은 부정확한 발음과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있는 한국어로, 남들은 대단하다고 칭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그저 짧고 간단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번지르르한 말 대신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이 지금껏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어릴 적부터 사제가 되고 싶었다. 가까운 친지 중에도 신부님들이 몇 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집 근처엔 큰 성당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신부'가 되겠다는 꿈은 당연했다. 너무나 자연스레 생긴 그 마음은 신의 부르심에 대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의배 신부는 그렇게, 11살의 어린 나이에 소신학교에 들어가며 사제가 되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6년 1월27일, 31살의 유의배 신부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밟은 날이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안에 있는 명도원에서 2년 간 한국어를 배운 신부는 이후 경남 진주와 강릉 주문진, 제주도로 발령을 받아 2년 반을 보냈다. 그리고 1980년, 성심원으로 부임해 33년이 넘는 세월을 한센인들과 함께 했다.

 
△ 선교사로서 한국행을 본인이 원했다고 들었다.
= 어릴 적 라디오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내 고향 게르니카도 내전을 겪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어릴 적부터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집들을 보며 자랐다. 신부가 되고 선교사로서 어느 나라로 가고 싶은지 교회에서 물었는데, 그때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이미 내 앞에 8명의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이 한국에 와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어릴 적 라디오에서 들었던 한국 전쟁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 내가 어렸을 때 전쟁이 났던 나라, 한국!' 어렵고 힘든 나라라는 생각에 가서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바로 한국으로 올 수는 없었다. 당장 볼리비아 쪽이 조금 더 시급하다는 게 교회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유 신부는 한국에 오기 전 2년을 볼리비아에서 보낸다.

볼리비아에서는 해발 4천 미터의 티티카카 호수 근처에서 지냈다. 너무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2년을 거기서 보내고 나올 땐 (그 지역 사람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울면서 나왔다. 마음이 정말 괴로웠다. 지금도 내 첫 번째 애인은 볼리비아라고 말하는 이유다(웃음).

△어릴 때부터 꿈이 사제가 되는 것이었나.
=그렇다. 오케스트라를 좋아해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긴 했다. 여러 가지 악기들을 각자 잘 어울리도록 지휘하는 게 멋있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 보니 이 일도 비슷한 거 같다. 사람들의 마음이 잘 어울리도록 지키고 조율해야 하니까.

△ 성심원에 오기 전에 한센인들을 접한 적이 있나.
=스페인에 있을 때 한센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다른 신부님들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하러 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봤다.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성심원과 비슷한 마을이었다.

한국에 와서는 진주에 부임했을 때 성심원을 자주 왕래했었다. 그러다 성심원으로 오게 된다고 했을 때, 기뻤다. 사람들 마음이 아주 아름답다고 느꼈다. 한국말을 잘 못해서 일반 사람들과는 거리감이 생기곤 했는데 여기 안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처럼, 가족처럼 대해줬다. 거리감이 없어졌다. 말 잘 못해도 더 진하게 살고 있다.

그의 말처럼 성심원에 사는 사람들과 유 신부는 가족처럼, 아니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거리낌 없이 다가가 손을 잡고 껴안고 볼을 부비는 모습은, 기자에게는 낯선 풍경이었으나 이미 성심원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스킨십과 함께 인사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처음부터 이렇게 인사를 한 건 아니다. 한국식으로 인사를 했는데, 여기에는 앞이 잘 안보이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다가가서 손을 잡고 인사를 했는데 놀라시면서도 좋아하셨다. '사랑 받고 관심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모두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상해보이진 않나 물어봤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니요, 좋아요' 하셨다. 더 가까이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하시는 것 같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매우 낮지만 '혹시나' 하는 두려움은 없었는지.
=요즘 같은 때에 한센병에 감염되는 것은 (전염성이 매우 낮아) 정말 힘든 일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역시 한센병 앓았던 사람들일 뿐이지 지금 한센병 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걸린다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성심원에서의 지난 33년 동안 유 신부가 떠나보낸 이들은 모두 530명.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신부가 느끼는 감회도 남다를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하며 그들이 두려움 없이, 편안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돕고 싶다는 유 신부. 신부는 한때 직접 염을 하기도 해 주변의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

 
△염을 직접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무척 놀랐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원래 성심원에 염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이 일을 못하게 됐다. 염을 해주실 분들이 없어서 저와 다른 봉사자가 하게 됐다. 저는 남자들을 맡아서 했다. 15년 정도 했고 그동안 150명 정도 돌아가신 것 같다. 4년 전부터는 교구마다 모두 같은 식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다른 담당자들이 생겼고 이제는 제가 염을 하지 않는다. (이때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유 신부는 'No, No, No('노노노' 아니오)를 외쳤다.) 재미있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천국으로 가시는 길, 이제는 편안히 쉬시라고 이야기 하면서 했다. 살아있을 땐 보지 못했던 몸의 상처들, 때로는 빼빼하게 말라서 뼈 밖에 없는 몸을 보며 '아이고, 고생하셨어요' 하면서 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은 예수님의 몸이 바로 이 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기쁜 마음으로 했다.

△ 숱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느끼는 감정들도 남다를 것 같다.
=생전에 고생을 많이 했던 분들이니까 항상 마음이 아프다. 지금처럼 성심원 건물이 지어지기 전, 아주 옛날에 한센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을 땐 인근 마을에서 한센인들을 쫓아내려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한센인들과 이곳을 지키는 신부들은 저 산 위로 도망갔다가 밤이 돼 마을 사람들이 다 돌아가면 밑으로 내려와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친구들, 가족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분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편으론 이제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안하게 지낼 거란 생각도 든다. 다만 그렇게 돌아가시고 남은 자녀들을 볼 때 슬프다. 설이나 명절에는 이곳 납골당에 와서 부모님한테 절하고 다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그 자녀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찾아오면 정말 좋다. '신부님, 우리 아기 데려왔어요' 하면서 오는데, 그 모습이 어릴 때랑 똑같다. 나에게도 새 가족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 이곳 사람들을 위해 운전을 배웠다고도 들었다.
=운전은 볼리비아에 있을 때 이미 배웠던 거다. 여기서는 한국 면허가 필요해서 면허시험을 쳤다. 한국어를 잘 몰라서 힘들었는데 운전학원 선생님이 아는 것부터 샤샤샥 풀고 나머지는 대충 풀라고 했다. 그 말대로 했는데 붙었다(웃음). 여기에도 성심원 버스가 있고 기사님이 있는데 병원에 갈 때 주로 썼다. 보통 때 여기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버스가 제 시간에 안 올 때가 많았다. 밤에 갑자기 병원에 가야할 때도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면허를 따 사람들을 태워다 주곤 했다. 그땐 여기에 학생들도 많이 살았는데 아이들이 아침에 버스를 놓치면 '신부님~' 하며 울면서 온다. 그때 내가 태워다 주고 그랬다.

△ 운전을 하다 큰 사고가 나기도 했었다고.
= 한 여름이었는데, 진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성심원 근처에 다 왔을 때 깜박 졸았다. 그때 그만 옆에 서 있던 마을 비석에 부딪혔는데 왼팔 어깨부터 손까지 다쳤다. 병원에 두 달 있었다. 그러고 1998년인가에는 길을 가다 경운기에 치여서 목을 다쳤다. 그때는 한 달 입원해있었다. 병원 생활도 재밌었다. 환자로서 아픔을 느낄 수 있어서, 한센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신부는 가볍게 말하는 사고지만 성심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사고는 신체 마비를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큰 사고에도 원망하지 않고, 작은 것에도 늘 감사하는 신부의 모습은 성심원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성심원 곽경희 사회복지사는 유 신부에 대해 '공기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성심원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신부의 존재만큼 고국에서 그를 그리는 가족들의 그리움도 커져갔다. 10살 때는 가정 형편으로 두 동생들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냈고, 11살 때는 소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계속 떨어져 지낸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많은 분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위로했다. 하지만 정작 친부모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지 못했다고 들었다.
=어머니가 1992년 3월13일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꼭 10년 후인 2002년 3월13일에 돌아가셨는데, 두 분 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나마 아버지 때는 내가 직접 장례 미사를 인도했다. 수도자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부모님 돌아가실 때에 옆에 없었다는 게 제일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프셨다. 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교구에서 5개월의 휴가를 주셨다.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어머니 옆에만 있었다. 조금 상태가 좋아지셨고 돌아가야 할 때가 돼 한국으로 왔는데 내가 오고 1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함께 있던 5개월 동안 어머니가 정말 기뻐하셨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내가 떠나고 어머니가 '버림받았다'는 마음에 너무 슬퍼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그때 성심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울어줬다.

△부임지를 지원해서 옮길 수도 있다고 들었다. 여기서 30년이 넘게 있었던 이유가 뭔가.
=여기 있는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 와서 함께 살면서 가족이 됐다. 슬픈 일이 있을 때 같이 슬퍼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 같이 기뻐한다. 이곳 사람들은 '가족에게는 버림받았어도 신부님에게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는 기대가 있다.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거다. 가족이 됐다. 교회의 명령이라면 가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있으려 한다.

△아직도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있다.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고통이 많았던 만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잘 헤아려 주는 이들이 한센인이다. 온유하고 자비롭다. 보통 사람들은 10분 만에 하는 걸 1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의지가 있고 그 안에 밝은 마음이 있고 거룩함이 있다.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해 소망은 어떤 것이 있나.
=매일 매일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잘 살고 잘 죽는 것(웃음). 이 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 행복하게, 편안하게,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도록 계속 돕고 싶다.

1959년 프란치스코 수도회 작은형제회의 코스탄조 주포니 신부가 설립한 성심원은 한센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요양시설이다. 1980년 이곳에 부임한 유의배 신부는 '한센인의 친구'로 33년을 살아왔다. 유 신부는 이들에게 공기 같고 나무 같으며 엄마 같은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엄하기만 한 신부님은 아니다. 수도복의 하얀 허리끈으로 간지럼을 태우고 숨바꼭질을 하는 장난꾸러기 신부님이다.
유 신부의 얼굴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때도 이때다.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유 신부의 표정은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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