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매화리 오소리박사 오병섭씨
옥천읍 매화리 오소리박사 오병섭씨
함께사는 세상 [32]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4.28 00:00
  • 호수 5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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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념과 연구로 일구어낸 오소리 농장. 오소리의 번식에 성공한 오씨의 오소리농장은 충청북도 명예연구소로 지정하기도 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촌에 여우가 참 많았어. 근데 여우가 없어지면서 산토끼가 그렇게 늘더라구 그리고는 한창 극성을 떨었던 늑대가 없어지니까 멧돼지가 흔해지구..."

오소리 박사로 유명한 오병섭(61·옥천읍 매화리)씨. 오씨에게 처음 오소리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되었느냐고 묻자 난데없는 생태계 변화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생태계의 변화와 오소리를 사육하게 된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의아해 하는데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항상 흔할 줄 알았던 짐승들이 밀렵과 생태계의 변화 때문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오소리가 틀림없이 귀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소리 사육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옛날에 할아버지들한테 죽을 사람 살릴 것은 오소리밖에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 야생 오소리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였기 때문에 꼭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오소리 사육을 계획했어."

이런 그의 판단은 일단 적중했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식용이나 약용으로 가공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오씨는 얘기한다.

▶`집념과 연구' 성공의 두 가지 코드
제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야생동물을 사육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 못해 길거리에서 파는 노란 병아리도 살려내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야생 상태의 짐승을 집에서 가축으로 번식시키는 일이 단번에 될 일은 아니다.

"처음 오소리를 길러봐야겠다 생각하고는 수의사들에게 자문을 구했지... 다들 실패한다고 얘기했어. 번식을 시킬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수의사들의 조언만으로 오씨가 계획을 접기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너무 강했다. 그렇게 생각으로만 갖고 있다가 오소리 사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89년도다. 개장수에게 시켜서 야생 오소리 6마리를 힘들게 구했다. 집에 최대한 야생 상태를 복원한 우리도 만들었다.

그렇게 관찰해보니까 4월에 암·수가 교미를 한다는 것을 비롯해 녀석들의 몇 가지 생활 습관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시간만 나면 오소리 굴 앞에 앉아 녀석들의 움직임과 행동을 관찰하는 품을 팔아야 했다.

사육과 번식이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갖고 92년도에 오소리 30마리를 사다가 새로 지은 막사에 집어넣었다. 나름대로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새를 잡아다 기르지 못하면 오씨에게 가져다주곤 할 정도로 `사육'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또 당시에 본업이었던 축산업을 하면서 전국규모의 대회에 송아지와 종모우를 출품해 최우수상과 우수상도 여러 번 수상한 경력이 있었던 그였다.

▶새로운 시도는 발전의 교두보
예상대로 오소리들은 교미를 해서 정상적으로 새끼를 낳았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새끼 낳은 것을 확인하고 며칠 후에 보면 한 마리도 안 남고 없어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관련된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하더라구..." 그래서 오씨가 생각해낸 것이 오소리 굴 위를 뜯어서 합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원인를 찾는 것이었다.

결국 교미 시기를 알아낸 것처럼 기다림과 집념을 통해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공동 막사에 있던 다른 암·수컷들이 오소리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 가는 것이었다.

그 해 막사에 집어 넣은 1세대(?) 오소리들로부터 어렵게 얻은 새끼 중에 고작 2마리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수확은 있었다. 우리를 구별해 관리하자 번식이 제대로 이루어졌고 22마리의 오소리를 가지고 72마리로 번식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꿈만 같더라구. 우리에서 오소리들이 바글바글한데...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겠어. 모두들 안 된다는 것을 되게 했는데..."

이렇게 오소리의 번식에 성공하기까지 오씨가 겪는 어려움은 제반 지식과 관련된 부분만은 아니었다. 군과 도의 축산관련 공무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며 법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빨리 오소리들을 내 보내라고 성화였다. 그때 오씨가 공무원들에게 건넨 말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며 기자에게 전해 주었다.

"소나 돼지도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차피 야생 상태 있는 것들을 누군가 데려다 사육에 성공시키면서 지금처럼 된 것 아니냐? 내가 투자해서 오소리에 대한 사육 연구를 하면 지원하고 도와줄 생각을 해야지 당장 법 때문에 막으려고만 드느냐? 이런 시도가 자꾸 법에 막히면 발전이 있겠느냐? 법도 결국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만큼 필요하다면 법개정을 통해서라도 도와주어야 한다."

▶알면서 열심히 해라!
그렇게 설득하며 오소리의 대량 번식을 성공하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곳이 산림청산하 임업연구원 야생동물과였다.

오소리에 대한 대량 번식과 사육에 성공한 그의 얘기를 토대로 오소리에 대한 상식은 재정립되었다. 95년부터 97년까지 2년 동안은 임업연구원과 한국축산기술연구소의 관계자들이 오씨의 오소리 농장에서 연구활동을 벌였다. 또 충청북도는 오씨의 농장을 `명예연구소' 지정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 농장을 견학하고 간 사람들이 수 천명은 되지..." 그가 건네준 견학 방명록에 기재된 사람들을 보니 수 천명이 넘는다는 그의 말이 결코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한의학자나 양의학자를 비롯해 오소리 사육에 관심이 있는 농민들까지... 각자 방문 목적은 모두 틀렸지만 `오소리'에 대한 무엇을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거쳐간 곳이다. 그래도 오씨 나름대로의 철칙을 갖고 있다.

"IMF 경제위기가 온 뒤에 대량 실직사태가 일어나고 옥천이나 외지에서 오소리를 분양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이 왔어... 하지만 대부분 설득해서 돌려보냈지. 당장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시작하면 십중 팔구 망하거든."

독점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아직 식약청에서 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판로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모델을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이 오씨의 생각이다.

"다른 것 없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쫓아해도 안되고 무작정 열심히 해도 안돼. 알면서 열심히 하는 것하고 모르면서 열심히 하는 것하고는 분명 다르잖아"

이제 환갑을 맞은 선배 농민은 후배 농민들에게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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