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가구' 고집하는 박종덕씨
'조선가구' 고집하는 박종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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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2.07.18 00:00
  • 호수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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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낼 수 있는 색은 언젠가는 벗겨지든가 변합니다. 반면에 자연상태의 길이나 색깔은 아무리 시간이 지난도 늘 그 자리죠"라고 말하는 사람. "꼭 필요한 곳에 있어야할 한주먹의 모래나 자갈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며 "현재의 우리나라 4천3백만 국민들은 모두 단군의 적자인데 전통가구라는 말이 더 어울리죠"라는 생각에서 굳이 '조선가구'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사람.

이 사람이 고집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전각'이라는 도장 새기는 일부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칼로 새기는 글씨라는 '서각'도 옛 고전에 명시된 대로 '각서'라고 써야 한다며 굳이 '각서'라고 쓰자고 한다.

대청호의 저녁햇살이 수면 위에 아로새겨지는 모양을 볼 수 있는 곳. 군북면 소정리 소태골에 깃들어 민속공예를 하고 있는 구봉 박종덕(45)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박씨가 옥천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은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90년 4월에 이곳, 소태골에 정착했으니 이제 2년하고 2개월이 지난 셈이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올 때 남들은 박씨의 1남1녀에 대한 교육문제가 어렵지 않겠느냐며 그래도 큰 학교에 보내야 된다는 충고를 했으나 박씨가 '촌에서 학교다녔다고 될 거 못되고 도시에서 다녔다고 모두 대통령되느냐'며 이곳으로 전학시켜 각각 옥천중학교와 군북초교에 다니고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일. 박씨가 처음 목공예를 접한 때는 중앙대학교 2학년 재학시절, 요양차 들렀던 원주 구룡사에서 였단다. 그때 한 스님이 '각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듯 좋아보이더라고. 이것이 박씨가 목공예로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게 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71년. 대학재학시에 대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개인전이 화제가 되어 당시 경상북도 교육위원회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한 교사연수과정에 박씨를 강사로 한 목공예 과목을 신설하기도 했다는 회고이고 보면 '재능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라는 말이 맞는 듯 싶다.

본래 박씨의 고향은 대구로 개인전 이후 영남대 입구에 공방을 냈다가 뒤늦게 군에 입대, 대전 육군통신학교에서 군생활을 했다. 통신학교 법당 안의 조각을 박씨가 모두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정석모 충남지사와 정득만 3관구 사령관 등 고위층 인사들과도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곧 박씨를 충청도 사람이 되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박씨의 사회 초년생활은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비참함 그대로였다. 방바닥의 담요를 쳐들면 몸의 온기와 바닥의 냉기로 인해 물이 흐를 정도인데도 연탄 한 장 사지 못해 불을 못 땔 정도로 어려운 시기가 있었으므로 그때의 어려움을 잊지 않는다.

특히 마땅한 스승도 없었을 뿐 아니라 기록 하나없이 눈으로 보며 기예를 익혀야 했던 만큼 목공예 계통에서 이름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각고 끝에 '구봉 박종덕'이란 이름이 관심있는 이들에게 알려졌고 현재는 백퍼센트 주문생산으로 연간 총매출액이 6천만원 정도에 이른다.

소정리로 이사오면서 농사도 함께 짓기 위해 4천평의 포도밭을 사들여 직접 가꾸는 농사꾼으로서도 살기를 원하는 박씨는 지난해 첫수확을 거둬 '줄데 주고', '가져갈 데 가져가라'며 인심을 쓰고도 남은 것을 팔아 6백만원의 소득을 거뒀다. 앞으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농촌실정에 맞는 '목공예품 가공공장'을 소정리의 민속공예를 하는 다른 두사람과 힘을 합해 설립하는 것이 희망으로 충분히 타산성이 있다고 자가진단한다.

"우리 것, 우리 도자기는 스스로 숨을 쉽니다. 바이오 세라믹 같은 것은 플라스틱 등 현대화된 인공품에만 필요한 것이지 순수한 우리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우리것의 우수성에 흠뻑 빠진듯한 박씨는 아들에게 어릴 적부터 옛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땅까지 우리나라 경계였음을 알리며 지도를 그려주었을 정도였다.

선산이 있는 경북 상주로 정착하기 위해 시외버스로 상주에 가던 도중 대청호에 비치는 햇빛이 너무도 아름다워 상주행을 포기하고 소정리에 정착했다는 구봉. 특별히 주문생산품의 재료가 수입목이지 않는 한 모든 재료를 우리나라 나무를 쓰는 박씨는 '또다른 희망을 주는 농사'를 짓기 위해 오늘도 순수한 우리 것을 지키며 가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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