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56)동이면 평촌리>1992년, 2000년 그리고 2013년 다시 평촌리 속으로
<마을탐방(56)동이면 평촌리>1992년, 2000년 그리고 2013년 다시 평촌리 속으로
  • 이슬기 기자 seul@okinews.com
  • 승인 2013.09.27 12:53
  • 호수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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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 마을의 유래는 언제인가?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고 또 속히 해결해야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고장, 우리 마을을 모르고서야 어찌 대한민국을, 아니 세계를 알고 있다고 할 것이며 어떻게 내가 사는 이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지방자치시대 우리이웃, 우리 마을이 중요한 이 시기, 옥천신문이 군내의 2백8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자랑스런 우리 마을을 소개한다.'(1992년 7월18일 4면)

옥천신문은 1992년 7월18일자에서 '자랑스런 우리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첫 마을탐방을 시작해 마을사람들의 입으로 직접 듣는 마을의 뿌리부터 그들이 사는 이야기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8년 후 2000년 9월30일 '다시 쓰는 마을탐방'이라는 이름으로 조금 더 자세히 마을을 들여다봤고, 2011년부터 시작한 세 번째 마을탐방에서는 그동안 변화된 마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마을탐방을 나설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은, 이미 두 번 돌아본 마을이지만 흐른 세월만큼 20년 전, 10년 전 마을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1992년과 2000년에 이어 13년 만인 24일 세 번째 동이면 평촌리를 찾았습니다.

▲ 동이면 행정의 중심 평촌리. 평촌리에는 면사무소, 우체국, 옥천농협 동이지소, 동이보건지소, 동이파출소 등 각종 관공서가 있다.

■ 세 번째 마을탐방,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옥천신문이 평촌리를 처음 찾은 것은 1992년. 당시 7월25일자 옥천신문 동이면 평촌리 마을탐방에서는 '성주이씨 80가구 모여 사는 집성촌, 면소재지이면서도 개발 소외되어 낙후, (적하리에) 농공단지 들어서면서 농외소득 증가'라는 말로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그 해는 평촌리에도 기념이 되는 해여서 기자가 마을탐방하러 왔던 것이 기억난다며 입을 뗀 당시 이장 이병렬(69)씨. "92년도에 평촌리 마을자랑비를 세웠어요. 동이면 마을 중에서 최초라고 알고 있어요. 그 때 석재에도 좋은 돌이 없어서 마을 어른들이랑 돌을 찾으러 한참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하천에 박혀있는 좋은 돌을 몰래 가져다놨죠.(웃음)"

▲ 1992년 첫 마을탐방 당시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던 김광자씨.
그 당시 새마을부녀회장이었던 김광자(70)씨도 잊고 있었던 그때 이야기들을 끄집어냈다. 마흔 즈음부터 10년 넘게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던 김씨는 대전에서 시집와 집안 어른들 얼굴도 익히고 살림도 배운 후 분가할 생각이었지만 나이 드신 시부모님을 두고 나갈 수가 없어 '눌러 앉게' 됐다고.

"도시사람은 시골에서 못산다고 했었는데, 3남매 낳고 기르면서 새마을부녀회장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경로잔치는 부녀회에서 하지만 그 당시에 마을잔치 같은 일들을 부녀회에서 다 했어요. 예전에는 시골이 다 어렵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농촌일손돕기도 하고 우리 힘으로 기금을 마련해서 견학도 다니고 좋은 일도 했고, 안 해본 것 없이 열심히 뛰었어요. 그 때 우리 마을 부녀회가 단합이 참 잘됐거든요. 그렇게 정 붙이고 마을일에 취미 붙이다보니 여기가 제2의 고향이 됐네요."

 

 

■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한 성주이씨 집성촌 

동이면소재지에 해당하는 평촌리는 상촌리, 소도리와 함께 법정리인 평산리에 속한다. 마을자랑비에 '평촌'이라는 이름은 들 가운데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들뫼'라 불리던 옛 이름이 한자화 되어 평산리로 부르다가 상촌리, 소도리와 구분해 산 아래 마을을 따로 평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면사무소, 동이초등학교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평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그래서 예부터 평촌은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지금도 논농사가 주작목. 하지만 쌀 생산만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진 탓에 80년대부터 조금씩 포도나 복숭아 등의 과수농사를 짓기 시작해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느 농촌마을처럼 고령화로 인해 농사를 짓는 가구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평촌리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성주 이씨 집성촌이라는 것. 마을자랑비 옆에 나란히 세워진 성주 이씨 세거지비가 이곳이 성주 이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마을자랑비에서 조선 개국공신인 이직 선생의 증손자인 이석현공이 이곳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대대로 옹기종기 정답게 모여 살게 됐다는 마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성주 이씨가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상촌리와 평촌리 경계 즈음에 위치한 성주 이씨 사당에서 종친들이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다.

▲ 성주이씨 사당. 성주이씨 옥천군종친회는 매년 사당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 '사람 좋은 마을, 평촌리'

▲ 3번에 걸쳐 10년이 넘게 이장을 맡았던 이병렬씨. 1992년 첫 마을탐방과 2000년 두 번째 마을탐방에 모두 등장한다.
평촌리 속에는 가장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들미와 단 한 가구만이 거주한다는 갈골, 과거 쌍봉서원이 자리해있었다는 성골(서원골), 여기에 시장터까지 모두 4개의 마을로 나뉜다. 그 중 시장터는 들미 현재 성주 이씨 사당터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기기 전 잠깐 동안 장이 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에 장이 설 수 있도록 마을에서 땅을 희사해 장옥까지 설치됐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고. 대신 지금은 면사무소를 비롯해 농협, 우체국, 보건지소, 동이파출소, 119동이지역대 등 각종 관공서가 모여 있는 동이면 행정의 중심이 됐다.

"사람들이 조금씩 물건을 내와서 팔기도 하고 집안에 있는 물건으로 물물교환하고 그랬어요. 근데 옥천읍이나 이원장이 가깝다보니까 장사꾼들이 들어오지 않고, 또 장보러 오는 사람들도 없어서 사라졌어요. 이름만 남게 된 거죠." 이병렬씨가 설명했다.

▲ 이종혁 이장
실제로 옥천읍과 가까운 동이면소재지인 평촌리는 다른 면소재지들과 달리 행정기관 외에 식당을 비롯한 가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새참을 주문할 식당 2~3곳만 남아있을 뿐.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 자연히 찾아드는 사람들도 적어 어느 면소재지보다 차분하고 조용하다. 그래서 '술 한 잔 걸칠 곳' 마땅치 않다는 푸념들도 흘러나온다. 이 같은 면소재지가 발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평촌리 사람들의 아쉬움은 20년 전, 10년 전 마을탐방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 고령화와 함께 계속 줄어드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도 더해진다. 이종혁 이장이 말했다. "주민등록상 110가구가 넘는 것 같은데 (실제 거주하는) 사람은 없어요.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기도 하고요. 예전에 비해서 그게 제일 많이 변했죠."

사람도 줄면서 마을도 조금씩 변해가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이직 선생의 '계자손시'라는 글에 나와 있는 '나라에는 충성을, 부모에는 효도를, 형제간에는 화목을, 생활은 검소함을 가훈으로 정하고 가난해도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 잊지 않고 살아가는 평촌리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종혁 이장이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좋은 마을'이라고 자신하는 것에는 여기에 있는 듯했다.

▲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정자는 평촌리 어르신들의 쉼터. 오후 2~3시가 되면 약속이나 한듯 정자로 모여 텔리비전도 보고 장기도 두며 시간을 보낸다.

 

간판은 없어도 알 사람 다 아는 '들미방앗간'


▲ 들미방앗간 주인 이종형씨가 오랜 단골손님들의 고추를 빻고 있다.
마을을 아무리 둘러봐도 어르신들이 찾아가보라는 방앗간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 몇 번이고 묻고 물어 찾아간 곳은 그저 주인 핸드폰 번호만이 적혀있는 건물. 문을 여니 그제야 방앗간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40년 간 같은 자리에서 운영된 들미방앗간은 적하리에 방앗간이 생기기 전까지 동이면에서는 유일한 방앗간이었다고. 지금은 30년 전 아버지 고 이교복씨에게 방앗간을 이어받은 이종형(75)씨가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간판이 없어도 '들미방앗간'으로 통하며 동이면 사람들은 물론 인근 옥천읍 구일리 사람들까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서 찾아온단다.

"옛날에는 여기서 국수도 많이 빼고 떡도 엄청나게 했어요. 그 때는 차가 있기나 했나. 머리에 이고 오고 짊어지고 왔지. 설에는 가래떡을 보통 2~3말씩 할 정도로 떡도 많이 했고 추석에는 여기서 쌀을 빻아가서 며느리들이랑 둘러앉아 오순도순 송편도 빚고 했지요. 또 그 때는 잔치도, 초상도 모두 집에서 해서 떡을 해가니까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다 알았어요.(웃음) 그런데 이제는 시골에서도 다 조금씩 시장에서 사다 먹잖아요."

마침 직접 농사지은 고추를 빻으러 금암리 황새골에서 온 염종희(84), 김희님(86)씨는 '엄청 오래 댕겼지, 40년이 넘으니께'라고 말하며 들미방앗간의 오랜 손님임을 증명한다.

이종형씨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한 방앗간 앞 긴 의자를 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던 그 당시 들미방앗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줄지어 사람들이 붐빌 일도 없을뿐더러 어느새 일흔이 넘는 나이가 돼 이종형씨는 간간히 찾아오는 손님들의 일만 해주고 있다.

"방앗간 문 닫게 되면 서운하지 않을 것 같으세요?"라고 묻는 기자의 말에 "서운해도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내가 몸 안 아플 때까지 계속 해야지요."라고 답하는 이종형씨. 그의 말에서 평생을 함께해온 이 공간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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