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과 시민의 자부심이 통영을 음악도시로
윤이상과 시민의 자부심이 통영을 음악도시로
옥천에 살아 옥천을 빛는 그들-이제는 지역인물마케팅이다(2)
  • 정순영 기자 soon@okinews.com
  • 승인 2013.09.13 18:19
  • 호수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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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에 살아 옥천을 빛낸 그들, 이제는 지역인물마케팅이다

1회: 인물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2회: 윤이상은 어떻게 통영의 보배가 되었나
3회: '현모양처'에 갇힌 육영수 다시보기
4회: 정지용과 향수, 옥천 최고의 브랜드
5회: 인물 최고의 지역 자원(상) 미국 살리나스시
6회: 인물 최고의 지역 자원(하) 미국 오크파크시

지난 1회 보도(8월23일자 1199호 옥천신문 '인물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참고)에선 지역인물마케팅이 갖는 의미와 인물마케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전국의 각 지자체가 지역홍보에 경쟁적으로 나서는데 있어 지역과 연관 있는 인물을 홍보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인물'이라는 개체가 갖는 유일성과 인물에 얽힌 다양한 스토리, 또 해당 인물이 예술가일 경우 그 창작물 등이 지역홍보에 필요한 특정이미지와 브랜드를 만들어내는데 매우 유용한 소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란 점을 짚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물이 단지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되면 그 생명력이 오래 또 깊게 가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해당 인물의 매력을 가장 크게 느끼고 지역의 현재에 맞게 인물자원을 가꿔나가지 못하면 결국 그 인물은 책 속에서나 기념관 속에서 박제된 채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물자원 활용이 단순히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만이 아닌, 인물자원의 발굴을 통해 주민들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시기를 달리했을지언정 그 인물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역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는 좋은 상상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이해해야할 것 같습니다.

2회 보도에서 소개할 경남 통영시와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이야기는 지역이 인물자원 활용을 통해 어떤 성과들을 일궈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로 보입니다. '윤이상'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통영의 보배가 되었을까요?  

고속도로를 나와 통영시내로 들어가는 국도를 달리다보면 한 노년의 신사가 커다랗게 자리한 통영시 홍보간판을 볼 수 있다. 거기엔 '예술의 도시 통영'이라는 글과 함께 '윤이상'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다. 한반도 남쪽의 항구도시 통영을 상징하는 인물이 곧 '윤이상'임을 알 수 있는 홍보물이다.

윤이상은 현대 클래식음악을 대표하는 세계 5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그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선 해마다 3월이면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다. 2002년 시작 돼 올해 12회째를 치른 통영국제음악제를 두고 통영 사람들은 그 시작도 끝에도 윤이상이 있다고 말한다. 시인 정지용이 있기에 옥천에서 '지용제'라는 문학축제가 가능하듯, 윤이상이 아니었다면 수산업이 주업인 항구도시 통영에서 '클래식 음악'을 주제로 한 축제가 가능했겠냐는 것.

통영시민들은 '윤이상'이라는 인물이 1967년 동베를린 간첩 사건으로 수감생활까지 한,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인물이었음에도 사상ㆍ주장을 떠나 '작곡가 윤이상'이라는 인물이 통영 출신이란 것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에 공감하고 그를 통영의 자부심으로 내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 통영시내로 들어가는 국도변에 서 있는 통영시 홍보간판. 윤이상 선생의 생전모습을 담고 있다.

■ 팀프(TIMF) 통영을 음악의 도시로 이끌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제'로 불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개최 12년 만에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 데는, 또 통영에 '음악의 도시'라는 지역 브랜드를 가져다 준 데는 그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해온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영어명 Tongyou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통상 재단의 영어명 약자인 팀프(TIMF)라 불림)의 활약이 있어왔다. 

▲ 통영국제음악제 공연모습 (출처: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 누리집 timf.org)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Tongyou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TIMF 팀프) 소개

(출처: 재단 누리집 timf.org)
아시아의 클래식 음악의 메카로 성장한 통영국제음악제는 2000년과 2001년 '통영현대음악제'를 통한 준비과정을 거쳐 2002년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2002년 3월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 (초대 이사장: 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 그룹 명예회장)를 설립한 이후, 2002년과 2003년 '통영국제음악제'를 통해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고전 음악,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국제 음악제로서 입지를 굳혀, 명실상부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수준의 음악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는 조직 전체를 총괄하는 이사회, 재단 주관 행사의 프로그램구성을 결정하는 운영위원회와 행사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지난 2003년 4월에는 재단 사업의 제반 여건을 조성하고 후원하는 목적의 후원회 (회장: 김원기 국회의장)가 창립되었다. 이렇듯 조직의 구성이 체계를 갖추고 여러 해의 국제음악제 경험이 더해져, 국제음악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다.

2003년부터는 국내유일의 국제음악콩쿠르인 경남국제음악콩쿠르를 개최, 재단의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고, 2004년부터는 1년 중 단 회에 걸친 일주일 간의 음악제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년 중 다수의 음악제와 관련행사를 기획, 운영하는 선진형 음악제의 모습으로 시즌화를 단행하였다.

이는 멀지 않은 장래에 통영에 들어설 통영음악당 건립 사업의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며, 나아가 통영국제음악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제적 음악 도시, 통영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는 음악제의 이름 아래 세계와 아시아 음악문화의 중심축이 되는 음악 축제를 확립하고, 동양의 작은 항구도시 통영을 세계의 음악문화를 품는 문화도시로 성장시켜 세계의 음악교류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
2005년 7월 이홍구 제2대 이사장의 취임과 함께, 그 확고한 의지는 지금부터 서막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 2013윤이상콩쿠르 공식포스터

옥천도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시인 정지용을 내세우며 지용제와 같은 크고 작은 사업들을 벌이고 있지만 통영과 옥천의 가장 큰 차이점을 든다면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이하 팀프)와 같은 기관이 있느냐 없느냐일 것으로 보인다.

통영의 팀프는 2002년 설립된 재단법인으로, 봄에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와 이 음악제의 쌍둥이행사라 일컬어지는 가을의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한국과 아시아의 재능 있는 음악인재들을 선발ㆍ육성하는 △'팀프아카데미', 국내외 젊은 연주자들이 모인 전문연주단체로, 통영국제음악제의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있는 △'팀플 앙상블' 지원 등을 총괄하고 있는 단체이다. 옥천으로 치면 오직 '지용제' 하나만을 전담하는 전문기관이자 단순히 축제를 개최하는 것을 넘어 시인 정지용이라는 자원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ㆍ운영하는 기관이 있다고 여기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물론 재단법인 팀프가 통영 지역사회의 힘만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어온 것은 아니다.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으로, 생전에 예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는 1998년~2001년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맡은 뒤 2002년부터는 팀프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팀프의 초반 운영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팀프의 이사장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맡고 있으며 유족 대표 및 홍준표 경남도지사, 고건 전 총리, 윤석화 월간객석 대표 등 국내 정치, 경제,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이사를 맡고 있다. 이 같은 이사진 구성만 봐도 통영국제음악제가 갖는 국내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단의 실질적 운영책임자인 팀프 사무국 이용민 사무국장은 통영이 음악도시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조건으로, 첫 째는 당연히 윤이상이고 둘째는 팀프 이사진들과 같은 명망가들의 후원이 아닌 '통영 시민'이라고 꼽았다.

자칫 윤이상과 클래식을 사랑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머물 수 있었을 국제음악제가 이처럼 지역민 모두의 축제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주민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통영시민들의 열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통영국제음악제 기간 함께 열리는 '통영 프린지(fringe, 비주류의) 페스티벌'이다.

'국제음악제 성공 일등 공신 통영시민들'

문학에 특별히 관심 없는 옥천 주민들이 지용제를 즐기는 유일한 방법은 지용제 부대행사로 열리는 노래자랑이나 대중가수가 출연하는 축하공연에 참석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시를 읽고 '좋다'라고 감탄사를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 통영 시민들에게 역시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윤이상이 클래식 애호가들을 위해서만 작곡을 한 것이 아니듯, 그의 정신이 녹아든 음악제는 장르를 불문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고민했고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통영프린지 페스티벌이다.

프린지 페스티벌은 연령 불문, 지역 불문, 장르 불문을 내세우며 국내외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 모두에게 열린 무대를 제공한다. 2002년 개최 첫 회에는 통영시민을 비롯해 부산ㆍ서부경남 일원의 아마추어 음악인 26개 팀, 약 200명이 참가했지만 올해 3월 축제에는 161개 팀, 2천 명의 공연 출연이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물론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오는 음악인들에게는 별도의 출연료 같은 것이 지급되지 않는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가를 사랑해주는 통영이라는 지역에 반한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참가를 하는 것이다.

▲ 통영프린지페스티벌 공연모습 (출처: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 누리집 timf.org)

프린지 페스티벌을 주관하는 것은 통영음악협회. 재단 팀프 이용민 사무국장은 "협회 회원들이 행사전문가들도 아닌데 자원봉사로 그 많은 출연팀 신청을 받고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라며 "하지만 전문성의 부족함을 뛰어넘는 애향심이 지금의 프린지 페스티벌 성공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프린지 페스티벌이 클래식 애호가들에서 일반 대중들로까지 통영을 방문하는 이들의 범주를 넓혔다면 지난해 첫 대회를 치른 윤이상 동요제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까지 통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고장의 정순철동요제처럼, 이미 전국 각지에서 여러 동요제가 열리고 있는데 다소 후발주자라 할 수 있는 윤이상 동요제가 과연 그만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 이용민 사무국장
섣부를지 모르나 이미 윤이상 동요제는 그만의 차별화된 전략을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참가팀 모두가 윤이상이 생전에 남긴 70여 곡의 동요 중 하나를 선택한 후 각자의 개성에 맞게 편곡해 부른다는 것.

이렇게 윤이상의 음악을 재해석한 참가곡들은 대회가 끝난 후에도 통영시의 문화자원으로 남게 되며 통영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목소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불리우고 있다. 통영에서 윤이상은 과거의 위대한 작곡가가 아닌 지금의 통영시민들, 통영 어린이들의 일상 속에 녹아든 무엇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재단 팀프 이용민 사무국장은 "통영이 음악도시로서 일군 이 모든 성과는 윤이상이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었다"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의 전신이 경남국제음악콩쿠르인데, 그 때 외국인들은 경남이 사람 이름인지 도시 이름인지도 몰랐을 만큼 외국 특히 서양에서는 '윤이상'만이 통용되는 이름이었고 통영에 윤이상이 있었기에 통영국제음악제가 아시아의 중심음악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윤이상의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다 있는 통영

지용제가 개최되는 기간이 아닐 때 옥천을 찾는 방문객들은 정지용의 과거만을 보고 느끼기 십상이다.

구읍 정지용문학관과 정지용생가에 남아있는 유물들은 과거의 정지용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지용을 현재로 불러낸 지용제 기간에도 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은 별 인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축제 기간이라고 주민들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 방문객들을 불러 모을 만큼 우수한 콘텐츠를 가진 문학프로그램이 마련되는 것도 아닌 것이 지금의 지용제 현실이다.

통영의 경우는 어떨까. 일단 윤이상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윤이상기념공원을 방문하면 된다. 윤이상기념공원 내 전시실에는 그가 남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기념품 매장에 가면 윤이상 관련 도서와 기념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 윤이상기념공원 운영자가 방문객들에게 전시실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

윤이상을 현재로 불러오는 것은 봄, 가을 시즌제로 개최되는 음악제. 3월에는 일주일 간 통영국제음악제와 통영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며 11월에는 열흘 안팎의 기간 동안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린다. 봄, 가을의 축제 모두 국내외에서 촉망받는 음악가들이 윤이상의 정신을 기리고 예술적 기량을 뽐내며 제2의 윤이상이 되길 꿈꾼다.

여기에 최근 통영시는 윤이상과 음악이라는 자원을 명실공이 지역의 미래발전 동력으로 삼을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바로 올 7월 통영국제음악당이 문을 연 것. 520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자된 통영국제음악당은 클래식전용공연장으로서 국내 최고의 시설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통영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통영국제음악당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명소가 되어 통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현재 통영시가 2016년을 목표로 추진 중인 유네스코 창의 음악도시 가입에 아시아 최초로 성공한다면 통영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음악도시와 어깨를 견줄만한 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윤이상이라는 인물 자원에 대한 지역적 자부심의 바탕 위에 '팀프'라는 구심체를 중심으로 일궈 온 통영시민들의 노력들은 현재 많은 항구도시 중 하나였던 통영을 '365일 음악이 흐르는 미항'으로 바꿔놓고 있다. (끝)

▲ 통영국제음악당 전경. 520억원을 투자해 지은 것으로 올 7월 준공식을 가졌다.
▲ 통영국제음악당의 전경. 통영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통영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통영국제음악당 내부. 최상의 클래식공연이 가능한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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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현대클래식음악계의 거장,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 작곡가 윤이상. 현대클래식음악에 있어 세계 5대 작곡가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클래식음악 작곡가 윤이상은 1917년 9월17일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으나 곧 부모님을 따라 통영으로 이주, 78세로 눈을 감는 날까지 고향 통영의 바다를 그리워하며 살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작곡가이자 음악교사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윤이상은 마흔 살이던 1956년,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늦깎이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이 길이 곧 고국 땅과의 평생 이별이 되는 길일 줄은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윤이상이 현대 클래식 음악계와 독일 사회에서 갖는 위상은 그가 1967년 동베를린 간첩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할 당시 더 선명히 확인됐다. 미국의 스트라빈스키와 독일의 카라얀 등, 세계적 명성을 가진 음악가들이 윤이상의 석방을 촉구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낸 것은 물론, 당시 서독 정부는 '윤이상 선생을 석방하지 않으면 서독에 파견된 한국 대사를 추방하고 한국에 지원하려던 차관을 취소할 것'이라는 서한을 보내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1969년 2월, 윤이상 선생은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음악대학의 명예교수가 된 윤이상은 뮌헨올림픽의 축하공연작인 오페라 <심청>을 작곡했다. 통영 출신의 한국인 작곡가가 독일에서 개최된 올림픽의 주제를 상징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짐작해볼 만하다. 독일정부는 1988년 그에게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큰 고초를 겪었음에도 국내 정치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던 윤이상 선생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자 독일과 일본에서 석방투쟁을 벌인 것은 물론, 1980년 신군부가 저지른 광주학살의 만행을 접하고는 <광주여 영원히!>라는 곡을 작곡해 유럽 일대에 광주 민중들의 정신을 알리기도 했다. 또 남북한 정부에 끈질기게 '남북음악제' 개최를 제안한 결과 1990년 10월19일 분단 45년 만에 평양에서 처음 통일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지만 그는 병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죽는 날까지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했던 윤이상 선생은 1995년, 민주화투쟁으로 산화해가는 한국의 젊은 청년들을 기리는 교향시 <화염 속의 천사> 등을 작곡했으며 같은 해 11월3일 독일 자택에서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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