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54)청산면 교평리>농악도, 단결력도 으뜸이었던 교평리 이야기
<마을탐방(54)청산면 교평리>농악도, 단결력도 으뜸이었던 교평리 이야기
  • 이슬기 기자 seul@okinews.com
  • 승인 2013.08.23 11:19
  • 호수 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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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향교가 있어 '향기' 혹은 '생기'라고 불렸다는 청산면 교평리. 본래 청산현 현내면 지전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지전리와 분리된 마을로, 향교의 교(校), 경주김씨 집성촌인 자연마을 평상목의 평(平)이 합쳐져 '교평리'가 되었습니다. 21일 오후, 청산향교, 정월대보름 풍경, 그리고 정순철 선생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가득한 교평리를 찾아갔습니다.

▲ 지난해 5월 세운 마을자랑비. 교평리 마을의 유래가 적혀있다.
교평리는 청산향교를 중심으로 윗말, 아랫말로 구분된다. 윗말과 아랫말은 마치 다른 동네처럼 외적으로도 확연히 구분되는데, 윗말이 여느 농촌마을처럼 농가들이 모여 있다면 아랫말은 슈퍼, 주유소, 식당 등 상가들이 형성되어있다. 그래서 180여가구, 약 400명이 거주하는 마을사람들의 소득원도 다양하다. 벼농사, 고추농사 등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80여가구로 가장 많고 상가를 운영하는 가구가 60여가구, 직장에 다니는 가구가 40여가구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교평리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향교다. 교평리 중심에 위치한 청산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세워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선조 35년(1602년) 백운동에 다시 세워졌고 그 후 효종 5년(165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198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기도 한 청산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청산향교의 영향으로 교평리는 예부터 '전통 있는 마을'로 불렸다. 비교적 옛 정월대보름 풍경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 교평리 중심에는 청산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청산향교는 198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다.


■교평리 정월대보름은 강줄다리기, 지신밟기로 풍성 

교평리 주민들에게 정월대보름은 명절만큼이나 큰 잔치로 여겨지고 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교평리 사람들은 정월대보름이 되면 짚으로 강줄을 엮어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 속에는 '윗마을이 이기면 풍년이고 아랫마을이 이기면 흉년' 혹은 '윗마을이 이기면 벼가 풍년이고 아랫마을이 이기면 보리가 풍년'이라는 속설들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승패는 중요치 않다. 모두가 함께한다는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줄다리기를 끝낸 후 모든 사람들은 강줄을 어깨에 들쳐 메고 한다리(청산대교)를 건너는 '다리밝기'를 한다. 다리 끝에 다다르면 강줄을 태우며 밝은 보름달 아래서 풍년, 마을의 안녕, 개인적 소망 등을 기원한다.

또 정월대보름은 교평리 농악대가 실력을 뽐내는 날이기도 했다. 지금도 대보름날은 하루 종일 농악소리가 끊이질 않을 정도로 우리 소리를 사랑하는 교평리는 농악으로 명성을 떨쳤다. 교평리 농악대는 모든 집을 방문해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며 마을의 안녕과 풍작, 가정의 다복을 기원하는 민속놀이인 지신밟기를 했는데 옥천군 대표로 도대회에 3차례 가량 출전해 상을 타는 등 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하지만 주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최근에는 지신밟기 재연에 성공해 지난해 도대회 우승을 일궈낸 청산면민속보존회(회장 김기화)가 자리를 메워주고 있다.

▲ 1965년부터 1988년까지 24년간 이장을 맡았던 김종철씨.
1965년부터 1988년까지 20년이 넘게 마을이장을 맡았던 김종철(82)씨는 당시 농악대를 이끌었던 고인들의 이름을 찬찬히 기억해냈다.

"내 또래 농악대 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죽었지. 충북에서 꽹과리는 우리가 1등이었어. 그 중에서 정지환씨가 꽹과리를 아주 잘 쳤지. 정순창, 김일봉, 고독중, 안도열, 손경옥씨, 아주 많았지. 대보름날에는 한 집도 안 빼놓고 돌아다니면서 행운을 빌어줬어. 옆 동네 지전리에서도 와달라고 해서 돈도 많이 벌어오고."

강희순(67)씨 역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저녁 먹고 설거지도 안 해놓고 모여서 연습했어요. 그 때는 옷도 직접 다 만들고. 그래도 그 때가 제일 재밌었어요. 사람 사는 마을 같기도 하고. 이제 그 시절은 다시 안 오겠지만요."

■'단합은 우리 마을이 최고지' 

예부터 교평리는 협동과 단합이 잘 되는 마을이었고 여전히 이것만큼은 마을자랑들 중 주민들의 가장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청산면민체육대회에서도 씨름 등 각 종목에서 우승을 도맡을 정도로 단합이 최고였다고. 2012년 5월 세워진 마을유래비에도 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 마을은 효와 예로 웃어른을 공경하고 단결력이 강한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주민들의 단합은 1970년대 시작된 새마을운동에도 스며들어 새마을사업 우수마을이 되기도 했다. 골목골목 벽을 허물어 좁았던 길을 넓히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는 등 일 참 많이 했다는 그 시절.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무엇보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2층 규모의 마을회관이 들어섰던 것이다. 당시 이장을 맡았던 김종철씨는 교평리 마을회관이 옥천군내에서 가장 먼저 생겼고 이후 하나 둘 각 마을에 회관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특히나 2층 건물이 드물었던 그 때, 면지역에서 2층 건물로는 유일했다고. 회관 내에는 목욕탕도 있어 목욕을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신식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또 현 마을회관 한편에는 유아원, 지금의 유치원도 있었다고 한다.

김종철씨는 "원장 1명, 선생 1명이 있어서 청산면소재지에 사는 아이들 30명 정도가 다녔었다"며 "지금은 학교에 유치원이 생기면서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 마을회관 안에 걸려있는 상조회 명단. 장례식장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역할이 작아지고 있다.
교평리 단합은 다양한 마을조직들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가장 활발했던 조직 중 하나인 향우회. 매년 7월 셋째 주 토요일 마을주민들과 출향인들이 한다리 밑에 모여 잔치를 벌였던 향우회는 2006년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외지에 나간 출향인들도 모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향우회 역사는 2006년에 멈췄다. 향우회 뿐 아니라 이제는 50~65세가 주를 이루는 청년회도, 현 고래일 이장이 2005년 구성한 상조회 역시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 마을사람 중 누군가 상을 당하면 함께 슬픔을 나누기 위해 구성했던 상조회는 장례식장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그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

"마을조직들이 사라지니까 그게 아쉬운 거죠." 고래일 이장의 말에 사라져가는 마을 고유의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교평리 

교평리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다. 최근 많은 마을에서 벽화사업이 이뤄졌지만 교평리 벽화는 특별한 점이 있다. 다양한 노래가사들과 한 인물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작곡가 정순철 선생과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다.

▲ 작곡가 정순철 선생의 모습과 그가 지은 노래들은 교평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불러봤을 두 노래의 작곡가 정순철 선생이 교평리 출신이라는 사실이 2006년부터 알려지면서 마을은 정순철 선생의 고향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어린이들을 위해 수많은 동요들을 작곡한 정순철 선생은 1901년 9월13일 교평리 310-1번지에서 아버지 정주현과 어머니 최 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그동안 교평리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실은 도종환 시인을 통해 밝혀졌다. 이후 정순철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짝짜꿍 동요제 등이 열리는 등 선생의 흔적을 찾고 그를 기리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비록 아직까지 정순철 선생의 출생지라는 사실 이외에 선생과 관련해 마을차원에서 사업이 진행되고 있진 않다. 하지만 '교평리 자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민들이 교평리 농악대, 단결력과 함께 '정순철 선생의 고향'이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것은 이미 정순철 선생이 우리고장을 비롯해 교평리를 알리는 중요한 문화적 자원임을 보여준다.

▲ 고래일 이장
한편 교평리는 청산면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을 통해 내년부터 마을 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이뤄진다. 주민편의시설 마련 등 청산면 발전을 위해 총 100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계획에 교평리 뒷골천 소하천 정비와 마을회관 재건축이 포함되어 있다. 새마을운동 당시 지어져 30년 간 주민들과 함께한 마을회관은 곧 새로운 모습으로 주민들과 함께할 예정이다.

고래일 이장은 "매년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하는 소하천을 정비하면 이제 물난리 걱정은 없을 것"이라며 "낡은 마을회관도 재건축되면 교평리 굵직한 일들은 마무리된다"고 말했다.

 

 

 

 

▲ 교평리는 지전리, 백운리와 함께 면소재지에 속한다. 사진은 지전리와 교평리의 경계.

 

 

▲ 햇빛이 뜨거운 한낮, 커다란 나무 아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마을 주민들.
▲ 햇빛이 뜨거운 한낮, 커다란 나무 아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마을 주민들.

▲ 정순철 선생의 생가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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