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5)>옥천에서 태어나 다른 길 걸어간 일제강점기 언론인들
<기획 -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5)>옥천에서 태어나 다른 길 걸어간 일제강점기 언론인들
매일신보 논설부장으로 일하며 친일행위 선전한 홍승구
독립신문 창간 기자 조동호, 미 언론에서 민족정신 세운 김현구
  • 권오성 기자 kos@okinews.com
  • 승인 2013.08.16 11:05
  • 호수 119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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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1945일제강점기,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

1회: 잊히는 옥천 일제강점기 역사를 되찾자
2회: 빨갱이 오욕 딛고 항일역사 되찾은 소안도
3회: 옥천지역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상)
4회: 옥천지역 친일파와 독립운동가(하)
5회: 옥천의 친일언론인과 항일언론인

6회: 옥천출신 전국구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7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상)
8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하)

조선총독부는 언론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통치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언론을 홍보수단으로 이용할 경우 조선통치가 용이해지지만, 조선 언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사실대로 보도한다면 대규모 저항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 초대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내재임기간 1910~1916)는 총독 취임 이후 약 40여개의 언론사를 폐간했습니다. 살아남은 언론사도 사전검열을 해 저항을 부를 수 있는 기사들은 모두 삭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의 나팔수 역할을 한 매일신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고장 출신 언론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유정 조동호(1892~1954) 선생과 김현구(1889~1967)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언론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조동호 선생은 독립신문 창간 큰 공로를 세웠을 뿐 아니라 실제 독립신문 기자로도 활동했습니다. 김현구 선생은 미국에서 언론활동을 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일제가 두려워하는 항일언론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우리고장 출신인 홍승구(1891~1961)는 매일신보에 입사해 논설부장을 역임하면서 일제 찬양 글과 황국신민화를 부추기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1918년부터 26년까지 8년간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며 일본의 조선통치를 합리화하는 기사를 써냈습니다. 옥천이라는 한 고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친일과 항일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 홍승구는 매일신보 재직시는 물론 퇴직 후에도 다수의 친일찬양글을 신문과 잡지에 게재했다. 사진은 1936년 8월11일자 매일신보 1면으로 홍승구가 쓴 '오는 총독, 가는 총독'이라는 제목의 총독찬양글이 실렸다.

■ 친일파 홍승구 '언문(조선어)은 없어져도 좋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언론인은 44명. 이중 우리고장 출신 친일 언론인이 홍승구(1891~1961)다. 홍승구는 1891년 군서면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옥천읍에 있는 사립 진명학교에 입학했으나 1906년 중퇴했다.

이후 홍승구는 관료의 길을 걷는다. 1년 뒤인 1907년 3월 공무원이 되었으며 한일합병 이후에도 직책을 유지해왔다. 1915년 5월부터 충북도 제1부 서기로 근무했으며, 1914년부터 18년까지 주민의 토지수탈기관인 충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의 통역업무를 했다. 이 공로로 1915년 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본격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1918년부터다. 1918년 9월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그 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한다. △1920년 초 경제과장 △1920년 말 도쿄특파원 △1922년 논설부 사사(司事:언론사 내 기자의 직책으로 행정에서는 사무관 급) △1923년 논설부장 △1924년 편집국 사사 등을 역임하며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조선총독의 조선통치를 찬양하고 일제의 식민 정책을 정당화하는 글을 썼다.

대표적인 글을 살펴보면 1925년 잡지 '신민(臣民)' 12월호에서 시모오카(下岡忠治) 정무총감(총독 바로 아래 직급으로 군통수권을 제외한 행정 사법권을 지휘하는 계급)을 '성실한 위정가'라 칭송했다. 같은 잡지 1926년 1월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한 매일신보를 두고 '이상적인 기관지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평가기사도 보도했다. 자신의 친일 언론행위를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승구는 1926년 매일신보를 사직한 뒤에도 친일찬양 일색의 글을 매일신보와 잡지에 지속적으로 게재했다. 1936년 8월8일부터 12일까지 '오는 총독 가는 총독'을 4회 연재하며 역대 조선총독의 통치를 찬양했다. 1937년에는 일본 천황과 만주국 건설을 칭송하는 글을 쓰고, 1938년 5월에는 매일신보 좌담회에 참석해 '언문(조선어)은 점차 없어져도 좋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1937~1945)을 두고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치는 우리의 사명'이라고 선동하는 글을 게재했다.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친일언론인의 해악이 친일관료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다고 지적했다. 김상웅 관장은 "친일관료들은 특정분야나 사람들에게만 해악을 끼친 반면 친일언론인은 민족 전체에 해악을 끼치고 언론의 기회주의적 문제를 야기했다"며 "이러한 친일언론의 기회주의적·사대주의적 행태가 지금까지도 한국 주류언론을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46년 3월 해방이 된 이후 홍승구는 청주에서 창간된 국민일보(충청일보 전신) 편집국장으로 취임해 언론활동을 이어갔으며 1961년 11월12일 사망했다. 국민일보는 당시 청주대학교를 설립한 김원근씨가 초대사장을 맡았으며 부사장 겸 편집인은 김동환씨가 참여했다. 국민일보는 해방 후 한강 이남에서 발행한 최초의 지방지였다. 국민일보는 1960년 충청일보로 제호가 변경된다.

   
▲ 과거 매일신보사로 사용되었던 건물. 지금은 서울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국토에서 왜적을 축출하고 말리라'

   
▲ 청산 출신 독립운동가 조동호

우리고장 언론인 중엔 홍승구와 같은 친일 언론도 있지만 항일언론인의 표상으로 불리는 인물도 있다.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을 꼽는다면 유정 조동호(1892~1954)를 빼놓을 수 없다.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난 조동호 선생은 서당에서 수학하다가 1905년 청산소학교(현 청산초등학교)에서 3년간 신학문을 배운다. 그는 몽양 여운형(1886~1947)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되고 1914년 식민통치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다.

조동호는 중국 망명뒤부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1차 대전 종전 뒤 열린 회의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간 간섭을 금하는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독립을 도울 것을 요구하는 '조선독립청원서'를 직접 작성했다. 조동호는 이때부터 글을 쓰는 실력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조동호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창간에 결정적 역할도 했다. 신문의 필요성에 공감한 임시정부는 도산 안창호(1878~1938)가 미국에서 가져온 2만5천 달러의 자금으로 독립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독립신문 창간업무의 중책을 조동호에게 맡겼다. 조동호는 그만큼 언론의 전문가였던 것이다.

조동호가 보도한 기사중 가장 유명한 건 1919년 11월1일자로 보도된 글이다. 평소 강직하기로 이름난 조동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1년 내에 독립을 못 하면 2년, 그도 못하면 3년 4년 내지 10년을 가더라도 2천만이 다 죽기 전까지는 맹세코 기필코 우리의 신성한 국토내에서 우리를 노예로 하는 원수의 왜 민족을 축출하고 말리라 함이 2천만 대한민족의 결심인 줄 알고 왜적은 전율할 지어다."

독립신문을 발간한 동시에 조동호는 1921년에 한·중 친선과 한국독립을 위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듬해에는 김구·최석순·여운형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창립했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 명의 일하는 병력과 백만 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다. 

1923년 귀국한 뒤부터는 국내에서 항일언론활동을 벌인다. 이 시기 조동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항일기사를 쓰게 된다. 그는 항일논설을 집필하면서 주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하고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했다.

항일언론인인 조동호를 일제가 곱게 볼 리 없었다. 1928년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1932년 출감한 뒤부터 조선중앙일보 논설부 기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도 한다. 하지만 항일논설기사를 쓰고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산다. 출옥 후인 1941년 건국 모임을 준비하고 1944년 여운형 등 10여명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나 8월4일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독립을 맞는다.

바라고 바라던 조선독립이 이뤄졌으나 계속된 징역생활로 조동호 선생의 건강은 크게 악화된다. 수원과 청산면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하다 1954년 9월11일 향년 63세에 사망했다.

■ 미국 항일언론의 핵심인물 김현구

   
▲ 김현구(1919년 당시 31세)

조동호에 비해 김현구(1889~1967)는 우리고장 주민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김현구는 김규흥(1872~1936) 선생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한 언론인이었다. 일본에 침탈된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미국에서의 언론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신문을 발간했고, '소년한국'을 집필해 한인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했다. 그 외에도 '전미학생월보'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미국에 있는 유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단합을 이끌었다.

1889년 옥천읍에서 태어난 그는 면암 최익현(1833~1907)을 스승으로 두고 서울의 명문 사립학교인 양정·배제·보성 중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06년부터 자강회(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에 가입해 활동하며 구국운동을 편다. 이후 1909년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본격 항일언론활동을 시작한다.

앞서 이야기한 언론사 창간과 항일언론활동 이외에도 세계에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고자 대조선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적극 조달하고 후원하는 등 전방위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김현구는 외교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27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활동하며 독재체제인 이승만의 독립운동세력을 몰아내고자 싸웠다. 이승만 1인 체제 독립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으로부터 테러를 당하기도 했지만, 1932년 이승만 일파를 축출하고 교민단을 대한인국민회로 바꾸고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내부 안정을 바탕으로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적극 후원 했다. 한국의 독립은 국내와 동아시아의 독립운동 외에도 미국 등지에서 지원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오한흥 전 옥천신문 대표이사

'조선일보 반대운동도 역사 바로세우기'
오한흥 전 옥천신문 대표이사


지난 2000년 오한흥(55) 전 옥천신문 대표이사는 지역에서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목표로 한 언론개혁운동을 시작했다. 2005년 대표이사직을 그만두면서 옥천신문을 떠났지만 13년째인 지금까지도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오 대표는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도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친일'이라는 말 대신 '반민족행위'라 표현해야 한다는 그는 조선일보의 친일행위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아 그 폐해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해방 이후에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았어요. 이건 역사가 바로 서지 못해서인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조선일보에 있다고 본거죠.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때 대표적인 친일언론사였잖아요. 해방 된 뒤에 이런 친일언론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니까 지역차원에서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시작 한 겁니다."

오 대표는 친일언론의 가장 큰 폐해로 왜곡된 사실을 전하는 악습을 꼽았다. 일제강점기에 반민족행위자의 대변자 역할을 한 친일언론이 해방 이후에도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알리기 위해 오 대표는 조아세(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농장과 조아세 식당을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조선일보 문제와 역사청산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세상을 보는 창인 언론이 바로서야 반민족행위 청산이 가능합니다.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이 역사 바로세우기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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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담 2014-08-10 15:33:41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