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3)>일제강점기 군수 '자발적 친일의 대명사'
<기획 -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3)>일제강점기 군수 '자발적 친일의 대명사'
우리고장 친일군수 9명 일본 앞잡이 노릇
일제 맞서 만세운동 이끈 독립운동가 탄압
  • 권오성 기자 kos@okinews.com
  • 승인 2013.08.02 10:55
  • 호수 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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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1945일제강점기,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

1회: 잊히는 옥천 일제강점기 역사를 되찾자
2회: 빨갱이 오욕 딛고 항일역사 되찾은 소안도
▶3회: 옥천지역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상)
4회: 옥천지역 친일파와 독립운동가(하)
5회: 옥천의 친일언론인과 항일언론인
6회: 옥천출신 전국구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7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상)
8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우리고장 친일군수는 9명입니다. 이번호에서는 우리고장 주민들을 탄압하며 조선총독부의 지역 장악력을 높이는데 일조한 옥천군수 출신 친일파를 살펴봅니다. 이와 함께 친일파에 대항해 이원면과 청산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지역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 일제강점기 하동군수였던 이항녕 박사의 고백
일제강점기 당시 지역의 대표적 친일파는 군수였습니다. 군수는 고등공무원인 동시에 지역에서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일제의 조선 지배를 지역차원에서 강화해나간 인물들입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에 철저히 부역하는 조선인을 고르고 골라 군수로 임명했습니다. 친일파로 일제강점기 당시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낸 이항녕(1915~2008) 박사는 저서와 기고를 통해 '일제 때 고등관인 군수가 뭘 하는 자리인 줄 알고 맡았다면 모두 친일파'라며 스스로를 친일파라 밝힌 동시에 사죄했습니다. 그만큼 군수는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으며 나라의 독립을 방해한 부류인 셈입니다.

 ■ 친일군수, 중일전쟁 물자공급·학도병 지원 독려

일제강점기  친일군수와 재임기간
성명 재임기간 출신지
신현구 1908~1918 미상
윤석필 1918~1920 미상
윤수병 1920~1924 충남 논산
이경식 1924~1930 충북 제천
김옥현 1930~1935 충남 연기
장 훈 1935~1938 충북 영동
최병협 1938~1941 함경북도 경흥
이종태 1941~1944 충북
김학응 1944~1946 충북 괴산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우리고장에서 친일을 한 군수는 총 9명이다. 한일합병 이전인 1908년부터 옥천군수를 하면서 일본을 도운 신현구(1867~?) 군수가 1918년까지 일제강점기 초대군수로 재직했다. 이러한 친일흐름은 해방이 되는 해인 1945년 김학응(1899~?) 군수까지 이어지게 된다. 신현구 군수는 한일합병 공로로 1912년 한국병합대례기념장을 받았고 퇴임 뒤엔 군서면장을 지냈다. 당시 고등 친일관료는 퇴임 후에 면장으로 일하도록 배려했다.

신현구 군수의 후임인 윤석필(1808~?) 군수는 1888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판관과 좌포청 종사관 등을 거쳐 평안북도관찰도 창성군수를 지낸다. 한일합병 후인 1910년 10월, 한일합병에 큰 공로를 세워 창성군수를 그대로 유임하고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한다. 1918년 옥천군수로 발령받은 그는 재직중이던 1919년 3·1(삼일)운동이 이원과 청산 등지에서 일어나자 옥천군내 각 면을 순행하면서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자제단은 3·1운동이 일본군과 경찰 차원에서 진압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자 지역주민을 부추기거나 동원해 일본의 통치를 도운 관변단체다. 이 활동으로 윤석필 군수 재직 시 가장 많은 주민들이 투옥되거나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윤석필 군수가 전북 장수군수로 간 뒤 윤수병(1876~?)군수가 부임한다. 그는 충남 노성(현 논산시)군에서 태어났으며 1896년 일본 게이오의숙 보통과에 입학하는 등 일본유학생활을 했다. 1908년 2월부터 한일합병의 전위대 역할을 했던 대동학회(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자금 2만원을 지원받아 조직) 회원으로 활동했다. 합병 후엔 일본의 한국지배에 적극 협력한 공로로 군수가 되었으며 옥천군수로 재직할 당시인 1921년 4~5월에 도 참여관과 군수로 구성된 '내지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 나가사키와 가고시마, 오이타, 도쿄 등의 관공서와 신사를 시찰했다. 당시 내지시찰단은 관광의 형태로 이뤄지긴 했지만 신사참배 등을 통해 일본정신을 고취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1924년 부임한 이경식(1883~1945) 군수는 조선인으로서 최대의 명예직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1912년 청산군 서기를 지내기도 했다. 옥천군수로 활동한 기간은 6년으로 상당히 길지만 그 당시 구체적 친일행위에 관한 자료는 없다. 대신 옥천군수로 퇴직한 1930년부터 중추원 참의가 되어 연간 600~2천400원(당시 소 한 마리가 70원이었음)을 받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송축시와 글을 '중추원통신'외 여러 잡지와 관보에 쓰는 등 활발한 친일활동을 했다. 해방 뒤인 1945년 11월3일 미군정에 의해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고 다음날 사망했다.

이경식 군수의 뒤를 이어 1930년 부임한 김옥현(1888~?) 군수는 한일합병 전후 통신과 회계 공무원으로 활동했다. 5년간 옥천군수를 했으며 1937년 2월 사상범의 보호관찰을 맡은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로 임명됐다. 촉탁보호사의 업무는 주로 항일운동가인 사상범들이 출옥 후 독립운동을 재개하지 못하도록 황국신민으로 교화하는 일이다.

영동에서 태어난 장 훈(1893~1940) 군수는 1919년 옥천군 서기를 거쳐 1935년 옥천군수로 부임했다. 재직당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여론환기와 국방사상 보급, 군수물자 공출, 전사 사상자 위문, 군대·군인 유가족 후원, 국방헌금 모금 등 전시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 공로로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렸으며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8년에는 괴산군에 신사를 설립하는데 2만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 이경식 군수.
▲ 장 훈 군수
▲ 김학응 군수

■  20대 옥천청년에게 꾸지람 들은 친일군수

친일옥천군수 최병협(1896~1966)은 20대 옥천 청년에게 친일행위를 하다 꾸지람을 받기도 했다. 1938년 옥천군수로 부임한 최병협 군수는 전형적인 친일 지식인이었다. 일본을 찬양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반도문화의 장래에 대하여 △아시아의 재건시대 △조선의 여명 등 다수 글을 언론사에 기고하거나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이러한 활동은 옥천군수로 활동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939년 7월11일자 경성일보에 우리고장 출신 조선인 지원병 이인석의 전사를 두고 '그 부모에 그 아들이다. 최 옥천군수, 이군의 유족을 말한다'는 기사를 낸다. 대담 형태의 이 기사에서 최병협 군수는 이인석의 죽음이 애국행위라 찬양했다. 당시 이인석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희생양일 뿐이었다.

이 기사를 본 옥천 독립운동가 유재혁(1911~2008, 당시 28세)은 '늙은 부모와 처를 둔 이인석을 흉계로 전장에 보내 전사시켰음에도 일본의 노예로 아첨한다'며 꾸짖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로 인해 유재혁은 1년 5개월의 옥고를 치렀지만 옥천주민들의 깨어있는 정신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1941년 최병협 후임으로 발령받은 이종태(1903~?) 군수는 중일전쟁 전시업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옥천군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군수인 김학응(1889~?) 군수는 괴산 출신으로 1930년 옥천군 공무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종태 군수와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전시업무를 잘 수행해 군수로 영전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미군정에 의해 1946년 9월까지 군수직을 유지했다. 이후 1960년 3·15 부정선거에 개입해 구속된 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 독립운동가, 이원·청산·군서·옥천 만세운동 주역들

이 같은 군수의 친일행위 반대편에는 지역적 독립운동이 크게 일었다. 우리고장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고장에서는 이원독립만세운동과 청산독립만세운동이 크게 번졌다. 옥천읍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확대되지 못했다.

이원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27일 이원면 장터에서 열렸으며 300여명이 모였다. 이 운동에서 큰 공로를 세운 △공재익 △김용이 △배용석 △육창주 △이금봉 △이면호 △이호영 △최덕용 △허 간 △허상구 △허상기 △허상회 △허 찬 등 13명이 독립운동 서훈자로 지정되었다. 당시 이원독립만세운동은 육창주와 허상기, 김용이, 조이남, 이호영, 공재익, 최덕용 등이 함께 준비했으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독립만세'라 쓴 깃발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시내를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육창주, 허상기, 김용 등이 헌병주재소에 현행되자 남은 주민들이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군 헌병과 맞서 싸웠고 최덕용 등이 숨지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당시 이원면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 기념비. 1946년 이원역 앞에 세워져 있던 기념비는 1958년 새로 만들어지면서 이원면 개심저수지가에 옮겨졌다.
청산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26일부터 4월4일까지 일어났다. 3월26일에는 주민들이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 해산했으며 4월2일에는 당시 청서면과 보은 삼승·마로면, 영동 용산면 등에서 모인 시위군중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가장 큰 집회는 4월4일로 밤 8시경 수천명의 주민들이 독립을 부르짖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집회로 청산면에 살던 5~6호의 일본인들은 헌병 주재소로 도피했고 헌병들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민 김지수와 김철수 등이 사망하는 등 많은 주민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 사건으로 △고한주 △김인수 △김지수 △김철수 △김한주 △박재호 △안병하 등 7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자로 지정됐다.

군서면에서는 옥천읍내와 청주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김순구(1867~1919) 선생이 25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기도 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취재지원: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군청만 가면 보는 친일군수

▲ 옥천군청 상황실에는 친일파로 분류된 김학응 군수 사진이 별다른 설명없이 다른 군수 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옥천군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군수의 사진을 별다른 설명 없이 역대군수 사진과 함께 걸어둔 것이 취재 과정에서 확인됐다. 옥천군청 2층 상황실에는 역대 군수 사진이 걸려있는데 이 중 1명이 친일파였던 것.

문제의 인물은 김학응(1899~?) 대한민국 초대 옥천 군수. 김학응 군수는 1899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관료생활을 했고, 1937년 청주군과 진천군에서 중일전쟁 관련 전시업무를 적극 수행해 군수로 승진했다. 1944년 11월 옥천군수로 부임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에 의해 1946년 1월 옥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은승 기획감사실장, '군수께 보고 뒤 조치할 것'
이후 도 내무국장을 역임한 뒤 1955년 충북도지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1960년 이승만정부에 의해 자행된 3·15부정선거에 개입한 점이 확인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친일을 한 것은 물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도 개입한 인물이 별다른 설명 없이 군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 주민 A(50대,옥천읍)씨는 "군청에 갔을 때 역대 군수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중에 친일파가 있을 줄을 상상도 못했다"라며 "당장 사진을 내리던지 친일파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옥천군은 초대군수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당혹해 하는 입장. 이은승 기획감사실장은 "역대 군수 중에 친일군수가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라며 "자료를 파악해 검토하고 군수님께 보고 드려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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