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아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는 희망과 함께 마을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학을 가르치던 마을 서성골
글자서(書), 소리성(聲)이라는 마을 이름과 선인독서(仙人讀書)의 명당자리라는 전설이 말해 주듯 이곳 서성골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강용(47)씨의 부친 강성대씨가 운영한 서당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학을 배웠고 제자들은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마랑골에 공적비를 세워놓았다.
충효사상을 중요시하는 한학을 공부한 주민들이 많아 서성골에는 무엇보다도 마을 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이 세워져 있어 다른 지역에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효성이 지극했던 한준이씨의 얘기는 마을 주민들은 물론 이웃 마을주민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
한주석(47)씨가 기억하는 아버지 한준이씨는 "9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면 주막 앞에 서서 끝까지 기다리다 모시고 나왔고 비가 오더라도 마당에서 문안인사를 올리는 정성을 보여왔습니다. 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간 묘를 지켰고 새벽마다 곡하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라고 전한다.
이런 효행으로 한씨는 효자상을 수상했지만 모두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을 뿐이라며 아버지의 비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서성골에는 웃어른을 모시는 전통이 살아있어 지금도 마을 청년들은 마을 원로들을 대하는 태도가 깍듯하다"는 것이 황중하(68)씨가 얘기하는 서성골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담배에서 포도로 작목 전환, 젊은 구성원이 마을 발전의 원동력
서성골 20가구와 마살미 6가구 등 이곳에 거주하는 가구 수는 모두 26가구다. 해방 전에는 마을의 모든 농가가 담배를 재배했고 7, 8년 전만 해도 15가구가 담배를 통해 소득을 올렸지만 이제는 이 마을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농가는 찾아볼 수 없다.
담배를 대신해 이제는 포도가 주 소득원으로 자리를 잡았고, 군 산림축산과에 근무하는 이승로씨의 도움을 받아 소를 사육하는 농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작목전환 등 마을 발전을 도모하고 주민들의 소득을 높이려는 노력은 젊은 구성원에서 나온다.
어느 곳이든 학생 수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서성골에서 학생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고등학생은 9명, 중학생 8명, 초등학생 5명 등 다른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학생 수는 서성골에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을 발전을 위한 다양한 시도도 젊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서성골 청년회(회장 한영석·50)와 부녀회(회장 이재분·58)의 활동은 다른 지역에 모범이 될 만하다.
청년회는 500여 만원의 자체 기금을 조성, 노인을 공경하는 행사나 마을에 주민들이 함께 축하해야 할 일이나 슬퍼해야 할 일이 생기면 기금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부녀회는 마을 주민들의 일이라면 손을 걷고 나서, 서성골에서 열리는 행사 때 제공되는 음식이나 상가음식은 어느 곳보다 정성이 담겨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청주한씨 가장 오래된 문중, 마을 발전 위한 출향인들의 관심
서성골에 거주하는 26가구 중 가장 오래된 문중은 청주한씨지만 집성촌을 이루고 있지는 않고 현재 2가구가 거주할 뿐이다.
8대조부터 거주한 한씨와 함께 7대조부터 거주한 장수황씨(1가구), 진주강씨(1가구), 마살미의 한양조씨(3가구) 등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문중이다.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출향인들의 고향에 대한 관심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다.
대전 신탄진에서 한중제약 대표로 활동하는 한성교(70)씨가 고향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으며 대전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는 안재왕(41)씨는 마을회관에 노래방 기계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밖에 대전에서 이주해 온 홍동의(52)씨는 마을의 농산물을 대전까지 무료로 이송해 주는 등 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어 `인심이 좋아 서성골에는 빈집이 없다'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골이 깊은 마을 백양골
골이 깊어 `뱀골'이라고도 불리우는 백양골. 50여 년 전 18가구가 거주하며 한 마을을 이루었던 이곳은 이제 6가구에 13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로 변하고 있다.
"못살겠다고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다들 돈벌어서 외지로 나갔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어" 아이들 교육과 불편한 교통을 해소하기 위해 외지로 나간 이웃들이 다들 잘 살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고 김계임(80)씨는 전한다.
백양골의 주 소득원은 포도다. 3가구가 포도농사를 짓고 있고 나머지 주민들은 콩이나 잡곡 등 주로 밭작물을 재배한다. 그러나 산짐승과 골짜기를 찾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인해 밭작물의 피해가 크다.
백양골은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대전시 등 3개 도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과거 금산군이 전라북도에 속해 있을 때에는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전라북도 3개 도를 연결하는 `천석다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전라도 사람들이 충청도로 쌀 천석을 메다 날랐다"는 다리의 명칭과 관련된 전설에서 찾아 볼 수 있듯, `천석다리'는 나라에 올리는 세금을 대전으로 전하는 길목이 되었다.
▶옥천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논골
대전과의 경계지점에 백제의 최전방 요새인 사양성지가 위치해 있는 논골은 옥천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포도하우스가 많은 곳으로 4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그중 3천평 가까이 포도하우스를 재배하는 전용복씨가 포도하우스 재배를 선도하고 있고 이밖에 개를 사육하는 농가도 4가구에 이른다. 또한 지난해 김명순(71)씨가 교포를 통해 시동생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진을 교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작권자 © 옥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