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1)>친일과 항일이 공존한 일제강점기
<기획-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1)>친일과 항일이 공존한 일제강점기
공식 기록된 옥천 독립운동가는 35명, 친일파 9명
지역적 친일파 연구 전무, 독립운동사 연구도 미미
  • 권오성 기자 kos@okinews.com
  • 승인 2013.07.19 16:15
  • 호수 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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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1945일제강점기,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

1회: 잊히는 옥천 일제강점기 역사를 되찾자
2회: 빨갱이 오욕 딛고 항일역사 되찾은 소안도
3회: 옥천지역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4회: 옥천의 친일언론인과 항일언론인
5회: 옥천출신 전국구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6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상)
7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하)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고장과 같은 지역사회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투쟁 현장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주민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친일'과 '항일'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친일파와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일제강점기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현재 우리고장 근현대사 연구는 친일파는 물론 독립운동사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독립운동사의 경우 옥천군향토사학회나 독립운동가의 후손 등이 개별적으로 업적을 기념하거나 연구하고 있지만 업적을 과장하는 등 문제도 있습니다. 그나마도 친일사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친일청산이 흐지부지되면서 일부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충북에서는 친일파 민영은(1870~1943)의 후손이 청주시를 대상으로 친일행위의 대가로 받은 토지를 되찾기 위한 토지반환소송이 진행 중입니다. 또 우리고장 출신 친일파인 송지헌(1872~1934)의 후손은 2011년 행정소송으로 우리고장 국유 토지 일부를 되찾아 가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옥천신문은 7회의 기획취재를 통해 지역 일제강점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고장 출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와 신문기사, 관보 등을 바탕으로 보도할 계획입니다. 독립운동가는 제대로 기려야 하고 친일파는 누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게 이번 기획의 목표입니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가치를 지향했고 오늘날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는 옥천 근현대사의 주인공들입니다.

◆ 일제강점기의 두 세력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항일독립운동은 규모와 발생지역에 따라 전국적 운동과 지역적 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국적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처럼 일본 제국주의와 총독부에 맞서 국내외 항일단체들이 여러 지역에서 벌인 독립운동이며, 지역적 운동은 한 지역에 거주한 독립운동가가 일본인과 친일파에 맞서 싸웠던 항일운동이다. 군서면에서 항일운동을 한 김순구 선생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동력들이 모아져 1919년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이 싸움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며 독립운동세력의 승리로 끝났지만 친일파와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작업이 흐지부지 되면서 오늘날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민영은 사례나 송지헌 사례가 대표적이다.

친일파 청산을 못한 점도 문제지만 독립운동가의 평가나 대우도 변변찮다.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업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도 없을뿐더러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후손들을 위한 지원도 빈약한 수준이다. 국가보훈처 전체 예산 중 독립운동가 관련 예산은 2%가 채 되지 않는다. 중앙정부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반면 한국전쟁 피해자의 경우 국가가 나서 유해발굴을 하고 참전유공자 지원을 하고 있다. 옥천군의 경우 지역에 거주하는 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매월 보훈명예수당 5만원을 지원하는 게 전부다.

▲ 지역의 친일역사는 물론이고 독립운동사에 대한 발굴도 아직은 미미한 실정이다. 사진은 2011년 6월 독립유공자탑 제막식 모습.
독립운동가나 후손들이 겪는 어려움은 경제적 소외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찾고 인정해줘야 할 독립운동가 업적을 본인이나 후손들이 증명하도록 하고 있다. 자신이나 조상이 조국독립에 공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서류등 증거를 거의 남겨두지 않아 재판을 받거나 투옥 되지 가지 않는 이상 입증하기 어렵다. 우리고장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김규흥 선생의 경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에도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지금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국가가 독립운동가를 외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독립운동가 관련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입증책임을 당사자에게 둔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자국의 독립운동가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라고 하는 곳은 없다"라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자에게 네 업적을 찾아서 보고하라는 식은 말이 안 된다. 프랑스는 독립운동가와 반역자들을 나라가 직접 조사한다"고 말했다. 또한 방 사무국장은 "나설 의지가 없는 국가를 대신해 주민들이 지역 차원에서 일제강점기 연구와 기록을 시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선대의 독립운동도 후손이 직접 증명해야 인정

우리고장에서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35명이고 민족문제연구소의 기준에 따른 친일파는 9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점기 당시 지속적으로 친일을 하거나 군수, 경찰서장 이상 고위관료를 했던 인물 중 객관적 자료로 입증되는 인물에 한 해 친일파로 분류했다.

독립운동가 수는 충북도 내에서 영동 58명, 청주 49명, 제천 47명, 괴산 44명 다음으로 많은 편에 속한다. 반면 친일파는 청주 19명, 충주 11명에 이어 세 번째지만 충북도 내 군 단위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다. 옥천은 독립운동가도 많고 친일파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지역적 연구는 빈약하지만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의 생몰년과 주요 업적 등 기본 자료를 갖추고 있다. 그 외 인물의 삶을 시대와 함께 살필 수 있는 자료나 지역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몇몇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나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발굴되는 것 정도다. 해방이 된 지 68년이 지났지만 지역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행적을 총망라한 자료는 없다.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출처: 독립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가 친일파
옥천 35 9
영동 58 8
보은 22 4
괴산 44 6
음성 31 5
증평 5 0
진천 16 4
단양 14 3
청원 33 2
청주 49 19
충주 26 11
제천 47 4
380 75
독립운동사는 생몰년과 주요업적 등 최소한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친일사 연구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지자체장의 특별한 의지가 있지 않은 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고장에서는 향토사료전시관 입구 황국신민서사비로 사용되던 바위에 설명문을 부착하거나, 명치천황추모비가 최근 발견되어 보고된 것 정도다. 친일문제의 핵심은 인물에 있지만 친일파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는 어디서도 살펴볼 수 없다.

지역에서 친일문제가 거론되지 못하는 건 자료가 없는 탓도 있지만 역사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 근본적 원인이다. 광복 당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후 논하기에 무리가 있는데다 자칫 주민간 감정의 골만 깊어질 수 있어서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A씨는 지역차원에서 역사청산은 개인이 해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A씨는 "해방이 되고나서 바로 친일청산을 했으면 몰라도 지금은 서로 다 아는데 어떻게 친일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라며 "친일을 말하려면 개인은 할 수 없다. 향토사학계나 옥천군이 나서서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고장의 친일사는 물론 독립운동사 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점은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구전과 문서 등 역사시대 기록 중 가장 많은 자료가 남아있으면서도 지역 근현대사를 총망라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향토사료전시관 전순표 관장은 지역의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정리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를 이해하는 첫 번째 방법이 인물을 중심으로 지역사를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모은 근현대사 인물정리가 필요하단 거야 절실하고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친일파 후손들에게 지나치게 책임을 묻거나 하는 건 거부감도 크고 지역을 분열하는 거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독립운동가의 업적, 친일파의 과오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남기되 주민이 화합할 수 있도록 봉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합을 목적으로 한 역사청산이 시작돼야 합니다."

▲ 근현대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사는 물론 친일사도 알아야 하지만 관련 연구와 기록은 독립운동사로 한정되어 있다. 사진은 옥천군향토사료전시관 내 독립운동 전시물을 보고 있는 아이들 모습.


미래세대 위한 첫 걸음 '친일사 연구'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책임연구원

▲ 박수현 책임연구원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친일사와 독립운동사 발굴이 지역 미래세대를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근현대사는 오늘날 주민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왜곡된 경우가 많아서다.

"최근 들어 지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모지 수준인데다 왜곡도 심한 편입니다. 지역 근현대사는 지역 주민들이 실제 체험하고 전해 들었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역사인 만큼 상세하고 정확히 기록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록은 지역의 미래세대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박수현 연구원은 자랑스러운 역사와 인물을 내세우는 만큼 부끄럽고 반성해야 할 역사도 성실히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편향적으로 내세우기만 하면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발생해서다. 실제 상당수 지역사 연구가 지역 정치인과 후손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미화되고 있다고 한다.

"역사가 그대로 평가되거나 기록되지 못하고 지역 정계나 일부 세력의 사적인 욕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지역사는 지역공동체와 동떨어진 죽은 역사에 불과합니다. 자랑스럽든 수치스럽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역사가 지역주민을 비출 때 살아있는 지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지역에서 시작된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발굴은 왜곡된 지역사를 바로잡고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를 바로 세울 것이라는 게 박수현 연구원의 생각이다. 지역에서 시작되는 역사청산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친일연구를 한다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지역주민들이 겪었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잘 기록하는 작업은 큰 의미를 가질 겁니다.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지역 근현대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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