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주공아파트 2단지 이일남 경비반장
문정주공아파트 2단지 이일남 경비반장
함께사는 세상 [29]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4.07 00:00
  • 호수 5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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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을 근무한 옥천담배원료공장을 정년퇴직하고 작년에 아파트 경비원으로 사회에 복귀한 이일남씨.
▶"안녕하세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저씨!!!"
사방에 높은 건물이 솟아있고 적막하기만 한 한낮의 아파트 광장에서 `이 곳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베란다에 햇볕을 쬐기 위해 널려 있는 이불 정도다.

문정주공아파트 2단지 경비반장인 이일남(60·옥천읍 삼청리)씨와의 첫 만남은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다. 아저씨는 집 주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빨간색 고무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프라스틱 용기를, 한 손에는 잘못 분류된 깡통을 들고 분주히 손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뭐 할 얘기가 있간디... 나 같은 사람도 신문에 나고 그러나?" 낯선 이방인에 대한 직업적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경비실로 안내하는 아저씨가 툭툭 던진 얘기였다. 자리를 잡고 앉은 경비실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한 쪽에는 화장실도 있었고, 냉장고며 카세트라디오, 전기스탠드까지 웬만한 사무실에서 갖추어야 할 비품들은 모두 갖춰놓아 그럴 듯 했다.

하지만 구색을 갖추고 있는 비품들이 어딘지 모르게 영 어색하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용도에 맞춰 구입한 것이 아니라 아파트 입주자들이 용도폐기 한 것 중에 쓸만한 것들을 골라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주자들이 버린 것들을 하나, 둘 모은 거야. 내가 주워 놓은 것도 있고 전임자들이 주워 놓은 것도 있고... 모두 쓸만한 것들인데 저렇게 버려져있으면 아깝잖아" 이날 경비실에서 만난 이일남씨는 문정주공아파트 2단지의 경비반장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임금은 박해지고
지난 99년 30년 동안 근무했던 옥천담배원료공장을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농사일로 소일거리를 했던 이 반장은 작년 8월20일 아파트 경비원으로 사회에 복귀했다.

"집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농사일하고 있으면 뭐해. 이렇게 나와서 용돈이라도 벌어 쓰면 좋잖아. 이틀에 한번씩 근무를 하니까 농사일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구..."

이 반장은 아침 8시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꼬박 근무를 서고 다음 근무자와 교대를 한다. 집에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고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쯤 일어나 집안 일을 돌보다가 다음날 아침 8시면 다시 아파트로 출근을 한다.

이 반장의 나이에 2교대 근무가 체력적으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낮과 밤 24시간을 한꺼번에 몰아가며 일을 하고 이 반장이 손에 쥐는 돈은 한 달에 50만원이 조금 넘는다.

어지간한 다른 직장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물가 인상폭에 맞춰 임금도 오른다지만 어떻게 된 것이 아파트 경비직은 해가 갈수록 당연한 것처럼 임금이 내려간다.

구조조정이다 경비절감이다 하면서 과거 직접 운용하던 아파트 경비부분을 용역업체에 위탁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조류와 함께 경비용역업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입찰경쟁이 치열해지자 업체입장에서는 수주를 위해 저가로 위탁입찰에 응하고 그만큼 낮아진 입찰가는 결국 일선 경비들의 임금에서 충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박한 임금에도 아파트 경비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다음 계약에서 소속되어 있는 경비업체가 다시 계약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자신의 자리가 남아있을지가 오히려 걱정이다.

"그냥 저냥 소일거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거지 뭐, 집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나와서 돌아다니면 아무래도 건강에 좋을 거 아냐?" 하지만 때로는 그냥 저냥 소일거리라고 하기엔 너무 힘든 일도 벌어진다.

▶간혹 입주자들이 건네는 따뜻한 말과 커피에 힘 얻어...
이 반장이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세대는 2단지 475세대. 475세대를 경비원 둘이서 관리하는 것만도 그리 쉽지 않을 텐데 때때로 겪어야 하는 봉변(?)은 경비아저씨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아파트의 경비라는 직책 때문인지 간혹 오토바이가 없어지거나 입주자들의 주차 중 실수로 차에 흠집이라도 나면 책임을 묻는 주민들의 항의가 거셀 때가 많다.

그 속 쓰린 마음을 마땅히 풀 곳이라곤 경비실밖에 없고 일정부분 경비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긴 하지만 경비 두 명이 475세의 모든 곳에 눈길을 주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이 반장의 바람이다.

이 반장의 얘기대로 경비반장이라는 그럴듯한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역시 경비절감 차원에서 청소원을 별도로 채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경비아저씨들이 담당해야 할 몫은 많아진다.

잘못 분리된 쓰레기들을 제 자리에 분리해야 하는 일부터 아파트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일까지 아파트 구석구석을 순찰해야 하는 일에 추가되는 이런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만만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 반장은 입주자들이 쓰레기 분리수거나 제자리에 주차하기, 쓰레기 버리지 않기, 엘리베이터 발로 안차기 등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얘기한다.

간혹 술에 취해 경비실 문을 발로 차며 행패(?) 부리는 입주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경비아저씨들을 힘들게 만든다.

"사방이 꽉 막힌 아파트에서 제대로 하소연 할 곳이라고는 여기 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냥 듣고 있지. 거기서 대거리 해봤자 괜히 싸움만 커지는 거지 뭐"

그래도 삭막하기만 할 것 같은 아파트에 아직 따뜻한 정이 살아있다고 이 반장은 말한다.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커피도 타다 주고 지나가면서 수고하신다고 인사라도 해주면 정말 힘이 나지..."

박봉과 과다한 업무에도 입주자(이 반장에 따르면 주로 우리 고유의 정을 잃어버리지 않은 할머니들이다)들의 이런 관심과 애정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아파트 경비실.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다면 오늘을 한 번쯤 반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음료수라도 한잔 건네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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