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48)옥천읍 죽향1리>옥천의 옛 중심지, 한적한 시골마을이 되다
<마을탐방(48)옥천읍 죽향1리>옥천의 옛 중심지, 한적한 시골마을이 되다
  • 황민호 객원기자 webmaster@okinews.com
  • 승인 2013.05.31 11:37
  • 호수 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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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입구의 죽향1리 자랑비
죽향리는 말하자면 옥천의 광장이고 시장이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가장 번화한 곳으로 옥천의 중심지였다. 면 청사가 있었고 학교가 있었으며 시장이 있었던 번화가였다. 9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태봉기 이장이 옥천의 모든 행정리동의 번지수가 죽향리부터 가장 먼저 시작하며 전화번호부에도 죽향리가 가장 먼저 나온다는 자랑을 한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죽향리, 문정리, 상계리, 하계리, 교동리까지 5개 마을을 구읍으로 통칭해 부르지만 죽향리는 옥천의 오랜 전통을 상징하는 '자존심'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자존심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관아터와 시장터도, 학교터도 표식자체가 없어 나이든 이들의 오래된 이야기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는 기와집도 고색창연함을 뽐냈지만 그것의 역사성은, 세월의 더께로 덮여 있는 이야기는 그대로 숨겨져 있었다. 

문정리와 더불어 구읍의 관문 구실을 했던 죽향리, 죽향리는 옥천군의 오래된 전통 1번지이면서도 이장과 몇몇 어른들의 그 충만한 자부심을 다 채워주지 못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도가 현재의 읍 중심지인 신읍으로 나고 1919년 즈음 군청사 및 각종 기관이 삼양리와 금구리로 옮겨지면서 무게중심은 그렇게 이동됐다. 

골목길을 찬찬히 걸어보니

지금 충북인력개발원 자리 '잣밭산' 밑에 '도뜰너머'라는 도랑이 흐르는 뜰이 있었지만 지금은 인력개발원과 향수아파트와 옥향아파트가 그 자리를 차지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죽향1리 경로당 도로건너 편에 위치했던 관아터는 흔적도 없고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 옛날에는 군수가 새로 마련한 사택과 관아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머물렀던 객사 자리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없다. 객사 자리는 일본에 의해 파란색 문을 가진 헌병지대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관아 앞에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실개천 양쪽으로 나무꾼들이 해온 나무장이 죽 들어섰고 구읍을 가르는 큰 길가에는 쌀이나 채소, 누룩전도 별도로 섰단다. '피천'이라고 지용 생가 밑으로 고기를 파는 곳도 있었단다. 풍수지리가 좋아 부자가 많이 살던 곳이기도 했단다.

죽향1리에는 조선 말 진주 부자 김기태씨가 이사 와 살던 기와집과 일제 강점기 군내 제 1의 지주이자 국유지 조합장, 관선도 평의원 등을 지낸 오윤묵이 살았던 기와집이 남아있다. 오윤묵의 작은 집으로 알려진 열두대문 집의 위용은 사라지고 기와집 한채만이 남아 '옥천관'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그 너른 터에는 유창유통이라는 회사가 임대를 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 죽향1리에는 오래된 기와집들이 많다. 사진은 '마당 넓은 집'

■ 죽향리 그 마을 이름의 유래 

죽향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 만들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옥천군 읍내면 저전리와 고증개리에 속해있던 마을이 후에 옥천읍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뉘어졌다고 전한다.

죽향리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후 여러 마을을 합쳐 새로운 이름을 만들때 마을 뒤에 대나무 숲이 있고 마을 앞에 큰 향나무가 있어 죽향리라 이름붙였다고 옥천문화원에서 2008년 발간한 '옥천의 마을유래'에 나오지만 실제 향나무의 존재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 사라진 돌사자, 옮겨진 돌탑

죽향리 이야기를 하자면 돌사자와 돌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선 돌탑 이야기부터 하자. 지금 돌탑은 죽향리에서 문정리로 옮겨진 꼴이 됐다. 원 위치를 찾지 못한채 다른 마을로 옮겨져 있는 것이다. 돌탑은 현재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51호로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이 돌탑의 정식 명칭은 '옥천 죽향리 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탑의 설명자료에도 '이 탑은 죽향리 탑선골의 절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죽향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전하였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옮겨진 배경에 대해 탑산사 주지인 해월스님(유태근)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월스님이 탑산사에 붙여놓은 안내판에는 "당시 일본인이 경찰서장, 지서장, 죽향초 교장일 때 지서장과 죽향초 교장이 동네를 찾아와 당시 동네사람들에게 여기 있는 불탑을 학교로 옮길 것을 요구하여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자, 이튿날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목에 총칼을 들이대며 협박한 후 이튿날 학교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는 해월스님이 2009년 지역 주민 4명의 고증을 얻어 공통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데 지금은 4명 모두 돌아가시고 없단다. 아무튼 해월스님의 고증이 옳다면 돌탑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옮겨진 것이 된다. 오랫동안 마을의 정신적 신앙의 중심 구실을 했던 불탑을 강압에 의해 빼앗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마을 전체의 의견으로 여전히 모아지지 못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고증되지도 않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라진 돌사자도 마찬가지다.

돌사자는 읍내주유소 가는 길 빨간 이층 기와 이성주씨 집 옆 밭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본시 탑 주위로 네마리의 돌사자가 있었다고 추정하지만 2000년 8월까지는 세마리만 남아있었고 그마저도 그 즈음에 도둑맞아 버렸다. 군의 허술한 문화 유산 관리 실태가 드러난 셈이다. 이성주씨는 당시의 기억을 끄집어 낸다. "그 때는 밭이 아니고 논이었거든요. 논둑위에 두 사람이 걸터 앉아 돌사자를 유심히 살펴보며 이야기하더라구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돌사자가 없어졌어요."

돌사자가 있던 그 자리가 바로 죽향리 절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제법 있지만 탑의 위치로 놓고 볼 때는 현 탑산사 인근에 죽향초에 있는 돌탑과 함께 있지 않았나 추정할 뿐이다. 그런 가정하에 생각해보면 돌탑도 옮겨지고 돌사자상도 옮겨진채 사라진 것이다. 돌사자를 받치고 있던 기단은 읍내 주유소 앞 죽향리 마을 표지석 주변에 옮겨져 마을 주민들은 정월 초사흗날에 거기에서 제를 지낸다 한다.

당시 돌사자는 서대산을 바라보는 쪽으로 서 있었는데 그 옛날 죽향리에 자주 불이 나서 서대산의 화기를 막아버린다 하여 불을 잡아 먹는다는 돌사자(해태)상을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내려져 온다.

▲ 돌사자를 받치고 있던 기단

■ 한적하지만 정이 흐르는 동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지만 살펴 들어가면 마을의 흐름이 보인다.

죽향1리 마을회관은 주로 할머니들이 가는 곳이다. 할아버지들은 마을 구분없이 구읍복지회관 뒷편 상계원로회관에 다 모여든다. 29일 방문한 날도 죽향1리 마을회관에는 할머니들이 잔뜩 모여 생활체육회에서 나온 강사와 함께 신나는 건강체조를 하고 있었고 길건너 상계 원로회관에는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니 경찰한테 주면 안 된다고 농을 치신다.

▲ 죽향1리 마을회관에서 매주 화,수요일마다 건강체조를 하는 할머니들이 '죽향1리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

죽향1리 터줏대감으로 옛 면청사 앞 집에 사는 이희목(86)씨는 "죽향1리는 그야말로 옥천의 뿌리"라며 "그 옛날 정말 옥천의 중심지로 제구실을 충분히 했지만 지금은 조용한 시골동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래도 풍수지리가 좋아서인지 지금도 조용하니 살기는 최고다"라고 말한다.

옛날 돌사자가 있던 밭의 주인인 이성주(77)씨 역시 "죽향1리는 조용하고 사람 살기에는 좋은 곳"이라며 "차도 많이 없어 동네 마실가기도 좋은데 돌사자가 사라져서 아쉽다"고 말했다.

9년째 이장을 맡고 있다는 태봉기 이장은 "죽향1리는 200여가구 480여 명이 사는데 여느 시골마을과 비슷하다"며 "고령화가 많이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볼거리도 많고 마을 사람 인심도 좋은 그런 곳"이라고 소개했다.

옥천군, 탑산사 주지에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마을에 대한 애정, 곳곳의 한줌 역사 찾기 진행

▲ 탑산사 주지 해월스님
리베라모텔 뒤에 숨겨져 있는 탑산사는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쓰여 있다. 그것 뿐 아니라 500년 된 남자 느티나무와 여자 느티나무, 굴참나무 숲을 이뤘던 흔적인 굴참나무 한그루의 역사와 절샘으로 사용했던 우물과 돌탑이 있던 위치, 옛날 대웅전 위치까지 여러 사람말을 들어 고증해서 직접 제작한 안내판으로 명시해놓았다. 이 주인공은 유태근(69) 탑산사 주지이다.

청성면 묘금리 쇠종골이 고향으로 죽향리는 외갓집이었단다. 13살에 죽향초로 전학 와 48회 졸업생이기도 한 그는 죽향리에 대한 굉장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태봉기 이장은 마을 일이라면 유태근씨가 열일 제쳐두고 나서서 많은 도움이 된다고 칭찬을 해줘야 한다 했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록해놓고 안내판으로 붙여 놓았다. 어찌보면 과잉이라 싶을 정도로 군데군데 역사의 흔적을 다 찾아 명시해놓았다. 그의 과잉 기록에 비하면 죽향리의 면 청사터, 옥천여중 옛 터, 시장 터, 옛 한옥의 역사 등은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이야기한다. 강요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죽향초등학교에 있는 돌탑도 원 위치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짓으로 마을로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강변한다. 또한, 길 명칭도 족보에도 없는 향수길이라 짓지 말고 옛 이름인 탑산이길로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낸다. 그가 2010년 1월에 쓴 글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500년 탑산길이 좋으신가? 향수길이 좋으신가. 향수길로 걸어가면 향수냄새가 날 것이고 탑산길로 걸어가면 500년 조상님들의 향취가 날 것인데. 조상님들께 묻고 싶소! 향수 냄새가 좋은가? 향취가 좋은가?" 그는 여전히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었다.

"죽향리는 옥천 역사의 뿌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지요. 그런데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지요. 제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약합니다. 같이 힙을 모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터 위치 바로 잡는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문화유산을 방치해 내버려두는 옥천군과 하나라도 기록하고 알리려는 탑산사의 주지 해월 스님과 묘한 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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