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34) 동이면 상촌리>풍요롭진 않아도 정 없이 살지 않았던 상촌 이야기
<마을탐방(34) 동이면 상촌리>풍요롭진 않아도 정 없이 살지 않았던 상촌 이야기
시집오던 날, 비탈길 오르던 가마에 앉아있다
뒤로 자빠진 이야기에
깔깔 웃는 소녀 같은 할머니들
  • 정순영 기자 soon@okinews.com
  • 승인 2013.01.18 11:45
  • 호수 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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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을로 들어갑니다

<옥천신문>은 1989년 마을탐방, 2000년 신마을탐방에 이어 2011년 2월 '안녕하세요'라는 이름으로 세 번째 마을탐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은 '지면 사정'이라는 궁색한 핑계를 이유로 마을을 찾는 데 조금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2013년부터는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고 부지런히 마을을 찾아가 '안녕하세요?'라며 힘차게 인사드리려 합니다. 마을탐방을 하다보면, 때론 밝게 인사하는 기자의 목소리만이 너무 크게 울려 퍼진다 싶을 정도로 텅 비어버린 마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마을탐방이라는 기획이 마을에서 지역의 희망을 찾는 길인지 쇠락해가는 농촌마을의 현실을 확인하는 길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옥천'이 있기 전에 마을이 있었습니다. 뿌리는 그 생김새의 곱고 미움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존재의 이유입니다. 마을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마을탐방은 <옥천신문>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다시 마을로 들어가는 편집국의 마음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 독자들과 나누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이번 호 주인공은 구한 말, 고종황제의 승하와 국권침탈을 슬퍼한 시골 서생 이기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높이 있어 더 아름다운 마을 동이면 상촌리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시인 나태주의 <풀꽃> 전문 -

▲ 마을 뒷산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동이면소재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상촌리의 숨은 명소. 이철종 이장이 옮겨 심은 나무와 누군가 가져다 놓은 작은 나무 의자가 그럼처럼 놓여있다.
까딱하면 마을을 찾지 못하고 동이면소재지 일대를 뱅뱅 돌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이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해 동이보건지소와 동이파출소 앞을 지나는 평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평촌리가 나오는데 '바로 옆'이라는 상촌리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사방을 둘러봐도 이정표 하나 찾기 쉽지 않다. 결국 지나가는 주민을 붙들고 상촌 가는 길을 물으니 '과연 저 길로 가면 새 마을이 나올까' 싶을 만큼 좁은 골목길을 손으로 가리킨다. 하지만 의심도 잠깐, 오르막길을 조심조심 따라가다 보니 너른 마당과 함께 상촌 마을회관이 기자를 반긴다.

상촌리는 법정리 상 평촌리, 소도리와 함께 평산리에 속한다. 얼핏 보면 평촌리와 굳이 구분이 필요할까 싶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그래도 상촌은 상촌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 상촌(上村)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마을이 산마루 바로 아래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의 추억담도 마을의 앉은자리에 얽힌 것이 많다. 우선은 예부터 아무리 큰물이 나도 마을이 물에 잠길 걱정은 없었다는 것. 반면 여전히 농사철이 돌아오면 논에 물 대는 일이 걱정이라는 이야기부터 시집오던 날 타고오던 가마가 비탈길을 올라와야하는 바람에 신부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는 이야기까지,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은 어느새 추억담을 한 아름 풀어놓는다.

"지도를 보면 우리 마을 자리가 꼭 한반도 지형의 백두산 자리 바로 거기에요. 지대가 높긴 하지만 마을을 산 날망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어 볕이 잘 들고 참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을에 빈 집이 너무 많아요. 서른아홉가구가 사는데 주민이 45명 안팎이니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태반이란 소리죠. 그래도 망북비가 있는 마을 뒤쪽으로 농지가 꽤 있어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짓고요 어르신들이 밭 조금 부치는 거랑 저랑 몇몇이 복숭아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나락이 워낙 제 값을 못 받으니 주민들 형편은 뭐 예나 지금이나 팍팍하죠. 지금 앉아있는 마을회관 짓는데도 고생이 적지 않았어요. 마티리에 있던 마을 산 팔고 주민들, 출향인들이 조금씩 정성을 모아 마련한 것이죠."

 
25년 전 고향 상촌리로 돌아와 올해 4년 째 마을 일을 보고 있는 이철종(53) 이장의 마을 소개다. 처음엔 '시골 마을 별다를 거 있나'라 하더니만 마을 곳곳을 소개하는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런 이 이장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가리킨 곳이 바로 마을 한 가운데 있던 우물 자리.

도랑을 메워 길을 내느라 지금은 시멘트로 입구를 막아버렸지만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진 온 마을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던 귀한 샘물이었다 한다. 또 그 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이 물을 먹고 자란 출향인 중 판사가 된 이도 있다는 것이 마을 이장의 설명이다. 주민들은 매일 한 번씩 이곳에서 물을 져다 나르며 하루의 안부를 묻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짓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넉넉지 않아 요즘도 모내기철이 되면 마을 공동 양수기를 돌려 장찬저수지 물을 끌어다 논에 물을 대고 있다. 하지만 이는 5~6월이면 한 밤 중에도 요청이 있는 집에 찾아가 물을 대어줘야 하는 봉사정신이 필요한 일. 요즘은 옥천읍 구일리 귀화마을 출신으로 스물다섯 살 때 상촌에 와 정미소(현재는 없음)를 운영하며 주민이 되었다는 황한구(72)씨가 그 일을 보고 있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지. 양수기 시설도 정부에서 해준 것이고 전에는 양수기 돌리는 전기세를 마을이 내야했는데 요즘은 전기세랑 수리비를 나라에서 지원해주잖아. 전엔 상촌이 정미소도 있던 마을이었어. 밀을 빻아 밀가루도 만들었다니까. 그 땐 정부가 쌀 사주고(공공비축미) 그런 것도 없었지. 마을 정미소에서 나락을 쪄서 이고 지고 옥천읍 오일장에 나가 상인들한테 직접 팔았지." (주민 황한구씨)

옥천읍까지 20리쯤 되었으니 걸어서 왕복 두 시간 거리란 것과 밤에 산마루를 넘어 마을로 돌아올 때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았다는 추억담을 이야기하던 끝에 10년 후에도 마을회관에 앉아 이런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까란 대목에선 이철종 이장과 황한구씨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네가 가팔라서 시집오는데 가마에서 뒤로 벌렁 자빠졌지 뭐야. 신랑이 좋아서 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시골이더라고. 그래도 그 땐 마을에 사람이 꽉 찼는데 말이지."

▲ 1997년 마을회관 건립을 위해 정성을 모아준 주민과 출향인들의 이름이 회관 거실 벽에 쓰여져 있다.
보은군 원남면이 고향이라는 양귀성 할머니가 가마 타고 시집오던 이야기를 꺼내자 마을회관에서 담소를 나누던 할머니들이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마침 기자가 찾은 날 회관에서 만난 김정임(71), 양귀성(74), 한상모(64), 이송자(78) 할머니들 모두 상촌이 고향이 아닌 금산, 보은, 영동, 공주를 친정으로 둔 터라 상촌으로 처음 왔을 때 '얼마나 시골이었는지'를 주제로 이야기는 두런두런 이어진다. 그래도 친정 떠나온 지 벌써 50년도 전이라 이제는 누가 뭐래도 할머니들의 삶은 상촌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예전엔 정월대보름 같을 때 마을 사람들끼리도 깽맥이(꽹과리) 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잔치를 벌이고 그랬어. 그럼 주민들이 쌀을 모아주니께 그걸로 마을기금을 쓰고 그랬지. 다른 건 몰라도 이 마을이 살긴 참 좋아. 비탈져도 날망에 올라앉아 있으니까 떠내려갈 일이 없잖여.(웃음)" (주민 황한구씨)

▲ 이철종 이장이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마을을 먹인 샘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는 모습.
할머니들이 타 주신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다 비우고 이철종 이장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마을회관을 나섰다. 회관에서 마을 뒷산 방향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다 왼쪽 길로 가면 이기윤망북비(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좁다란 오르막길을 오르면 동이면소재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숨겨진 명소가 나온다.(맨 위 큰 사진) 버려질 뻔했던 것을 이철종 이장이 옮겨 심었다는 나무 한 그루와 그냥 가지 말고 잠시 쉬어가라는 듯,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작은 나무 의자가 그림처럼 놓여있는 멋진 전망 장소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저 반대편 날망에 예전에는 집들이 있고 사람들도 다 살았지만 이제는 다 뜯기고 그나마 있는 집도 빈 곳이 많아 아쉽죠. 그래도 지금 서 있는 여기는 우리 마을이지만 제가 봐도 참 끝내주는 전망 장소에요.(웃음) 널찍하게 터를 닦아놨으니 날이 좀 풀리면 마을 어르신들 이곳으로 산보도 나오시고 경치도 구경하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1994년 촬영한 상촌리 전경
▲ 2013년 현재의 전경


▲ 이기윤망북비
[이기윤망북비] 하늘 잃은 유생의 슬픔 서린 곳


동이면 상촌리는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해봐도 지도에 지명이 나오지를 않아 동이면사무소까지 와서 묻지 않고선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혹시 상촌리를 방문하고자 한다면 마을 지명보다는 '이기윤망북비'(李箕允望北碑)를 검색하는 것이 오히려 수월할 듯. 상촌리 뒷산 마루에 위치한 이 비는 1996년 1월5일 충북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것이다.

1993년 망북비가 발견될 당시의 <옥천신문> 보도 및 관련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 망북비는 상촌리와 평촌리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던 성주이씨 문중의 이기윤이 1921년 세운 것으로 1919년 고종 승하 소식을 전해들은 시골 유생의 비통한 마음을 비석에 새겨놓았다. 망북비가 세워진 산마루는 예부터 국상을 당할 때마다 유림은 물론 주민들이 북향재배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망북비 앞면에는 '太皇帝崩日月無光'(태황제붕일월무광)이라 새겨져 있으며 이는 '태황제(고종)가 돌아가시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구나. 온 국민이 상을 당하니 망극하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었음에도 민족자존의 의지를 꺾지 않은 유생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 안내표지판은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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