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여중 학교아저씨 이소웅씨
옥천여중 학교아저씨 이소웅씨
함께사는 세상 [26]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3.10 00:00
  • 호수 5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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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여중에서 30여년을 근무한 이소웅씨
소풍 가기 전날 학교 운동장에 밝게 웃는 해를 커다랗게 그려놓고 `제발 비가 내리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도 다음날 하늘은 잔뜩 찌푸려 심술을 부리곤 했던 기억이 그렇지 않았던 기억보다 많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선배들로부터 익히 들어온 `전설'을 마치 자신만 알고 있는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풀어놓곤 했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적당히 화자의 과장과 개성이 섞이면서 전설의 내용은 각각 차이를 보였지만 대부분은 `학교 아저씨'와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였다.

학교 아저씨와 이무기, 학교 아저씨와 뱀... 등등, 당시 학교 아저씨가 너무 무서워서였는지... 아님 너무 친밀해서인지 전설의 한 가운데는 항상 아저씨가 있었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유난히 무서웠던 선생님 혹은 유난히 고마웠던 선생님들이 가물가물 떠오르지만 한 구석에는 등사실에서 등사기를 밀고 있던 학교 아저씨... 망치를 들고 부서진 의자를 멋지게 고쳐 주던 학교 아저씨의 모습도 떠오른다.

옥천여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이소웅(58·이하 아저씨)씨도 바로 학교 아저씨다. 공식 명칭은 기능직 공무원이지만 그냥 어릴 때 부르던 `아저씨'라는 칭호가 더욱 익숙하다.

1969년4월14일, 당시 여고와 함께 있었던 옥천여중에서 아저씨 생활을 시작해 91년 옥천공고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원초등학교를 거쳐 처음 근무했던 옥천여중으로 지난해 6월30일 돌아왔다. 어쩌면 32년 동안 정들었던 교육계를 떠나는 아저씨에 대한 교육청의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가보니 학생과 교사, 그리고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의 고향은 옥천읍 죽향리(구읍) 정지용 생가의 맞은편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밑에서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이 그리 풍요롭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아저씨는 평생 한 번을 겪기도 힘든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다.

어린 나이인 7살에 겪어야 했던 한국전쟁과 청년이 된 후 맹호부대 전투병력으로 찾아가 겪었던 베트남 전쟁. 가난 때문에 두 번을 자원해서 갔다는 베트남 전쟁에서 아저씨가 느낀 것은 지옥이었다.

다시 회상하는 것이 싫은지 아저씨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피했지만 `이 세상에서 정말 없어져야 할 생지옥'이라는 말로 전쟁의 참혹함을 정리했다. 어수선했던 시대에 제대가 늦어지면서 있었던 신병교육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아저씨와 학교의 인연을 맺어 주었다.

"당시에 옥천여중 교장 선생님 자제를 신병교육대에서 만났는데, 저를 잘 봤는가봐요. 그 분 추천으로 첫 직장이 학교가 되었죠." 그렇게 26살의 청년 이소웅씨는 학교에 첫발을 내딛었다.

"여고생들 사이에서 `젊은 양반이 뭐 먹고살게 없어 여기(학교)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그런 저런 이유로 직업에 대한 갈등을 많이 했죠." 하지만 주위에서 권유해준 사람들을 생각해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것이 아저씨의 설명이다.

▶마주치는 중년 부인들의 반가운 인사가 큰 기쁨
그렇게 마음의 갈등을 넘어서 30년 넘게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아저씨가 얻을 수 있는 보람들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저씨에게 학생들은 모두 자식 같은 존재들이다.

큰 대회에 나가서 학생들이 상을 타오면 자신의 일처럼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돌이켜 보면 기쁨만큼이나 가슴 아픈 기억도 떠오른다.

"70년대 말인가... 보충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학생들이 지금의 농협군지부 사거리에서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려고 처마 밑에 들어가 있다가 과속하던 덤프트럭에 치어 두 명인가 사망했던 사건이 있었어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죠."

아저씨는 모든 직장생활이 그럴 것이라고 얘기한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며 살았던 직장이 가정만큼이나 소중하지 않다면 어떻게 계속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또 퇴직할 무렵인 지금에는 버스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중년 아주머니들의 `반가운 인사'가 최고의 보람으로 다가온다.

사은회 등을 통해 학창시절 선생님들을 찾아보는 모습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학교 아저씨 존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며 반갑게 아는척하는 중년 부인들의 인사가 더욱 인상깊고 고맙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의 인성교육이 중요
지금 옥천여중에는 아저씨가 69년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 학생들의 자녀가 다니고 있다. 아저씨의 눈에 비친 30년 전 학생들의 모습과 지금 학생들의 모습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저씨가 얘기하는 차이는 크게 빈곤과 풍요로 나누어지는 같다.

"당시만 해도 한국전쟁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모든 것을 아껴 쓰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요롭게 자라서 그런지 아낄 줄을 몰라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버려지기 일수거든요."

그만큼 아저씨는 가정에서의 인성교육이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이 발랄해지고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밝히는 것은 좋지만 핵가족시대에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라는 것은 조금 아쉽다는 것이 아저씨의 생각이다.

`무서운 아저씨' 혹은 `맥가이버 아저씨'라는 별명을 달고 학교 구석구석을 누볐던 이소웅 아저씨... 아저씨는 지금 58세(만 57세)다. 정년이 57세로 단축되고 3년까지 허용되었던 정년 연장제도도 없어지면서 생각보다 일찍 학교를 떠나야 하는 현실이 아쉽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30년 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있다.

"학교 건물이 신축되면서 그만큼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후배들에게 남겨 놓은 채 떠나려니 영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네요" 크게 표나지도 않으면서 손에 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이 더 많이 떠오르는 학교 아저씨를 고마운 선생님과 함께 기억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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