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7] 청산면 삼방리-웃가사목, 아랫가사목
신마을탐방[17] 청산면 삼방리-웃가사목, 아랫가사목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1.02.24 00:00
  • 호수 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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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4년 삼방리와 경북 상주시 모서면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주민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나섰다. <사진은 74년 도로건설모습>
주막 터 아랫 가사목, 법화.명티.갈전의 연결고리
5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는 아랫 가사목은 삼방리의 입구이면서 법화리, 명티리는 물론 보은군 갈전 마을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사목이라는 지명이 암시하듯 이곳은 과거 주막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청산장을 이용한 법화리, 명티리, 보은 갈전 주민들은 이곳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만 4곳의 술집이 모여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번성을 뒤로한 채 지금은 5 가구 중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육상수(63)씨를 제외하면 농사를 짓는 농가도 없는 형편이다.

소백산맥의 길목, 6.25 당시 북한군의 퇴각로
6.25전쟁 당시 아랫 가사목 주민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남아있다. 법화리, 명티리, 보은 갈전과의 연결지역이면서 숲이 우거진 지역적 특성 때문에 퇴각하던 북한군에 의해 마을주민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최 이장은 이렇게 전한다.

"북한군이 한참 이곳을 지나며 후퇴할 때였어. 어느 날 새벽에 아랫 가사목에 사는 장덕용씨 집에 북한군이 몰려들었지. 장씨의 집에 몰려들어온 북한군들은 마로(속리산 방면)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장씨는 덧마루(덕지리)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줄 알았나봐"

장씨의 말에 따라 북한군들은 덧마루 쪽으로 향했고 한참을 가다보니 청산면 소재지가 보이자 북한군들은 장씨가 자기들을 밀고하려고 한 줄 알고 다시 돌아와 장씨를 살해했다고 최 이장은 설명한다.

▶남원양씨 집성촌 웃가사목
10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웃 가사목에는 6가구가 남원양씨로 가장 큰 문중을 이루고 있다. 이밖에 박씨 2가구, 설씨와 신씨가 각각 1가구씩을 이루고 있다.

10가구 중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가구는 5가구이며 이들은 자급자족할 분량의 벼농사를 짓고 있고 4농가가 고추농사를, 마을에선 유일하게 양기현씨가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남원양씨 집성촌인 만큼 이 곳에는 남원양씨 34대조를 기리는 충효각이 세워져 있다.

웃 가사목에 처음 정착한 것은 12대조부터지만 34대조의 산소를 잃어버리자 그 분의 넋을 기리기 위해 6. 25전쟁 이후 충효각이 세워졌다. 충효각을 세운 후손들의 정성 때문인지 남원에서 34대조의 산소를 다시 찾게 돼 그 의미를 높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을 화합' 삼방리의 자랑, 74년 주민들의 힘으로 도로 건설
지난 74년 삼방리와 경북 상주시 모서면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모든 삼방리 주민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나섰다. 출향인들도 한 몫을 담당했다.

길이 닦인 후 78년 출향인들은 성금을 모아 포장을 위한 시멘트 200여 포를 구입해 주었다. 출향인들의 성금과 행정기관의 도움으로 주민들의 정성으로 닦여진 길 위에 깨끗이 도로가 포장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노동력으로 건설된 도로는 삼방리 주민들의 화합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옥천 지역의 경제활성화에도 큰 몫을 차지했다. 상주시 모서면을 연결하는 이 도로는 경상도지역의 주민들이 청산장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최종훈 이장은 "그 당시 경북 모서면지역에는 방아찧는 비용이 무척 비싸고 시설도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경상도 주민들이 경운기에 고추를 싫고 청산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영동쪽으로 교통수단이 좋아지면서 다시 경상도의 상권을 영동에 빼앗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민들의 노력에 비해 행정기관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아쉬움이다. 현재 경북 모서면까지 연결되어 있는 도로를 확, 포장 한다면 영동에 빼앗긴 상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최 이장은 설명한다.

"경북과의 도로포장 문제는 청산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행정기관이 담당해야할 몫이고 주민들은 장록골까지 단 한 회라도 버스가 운행되기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청산장을 이용하기 위해서 주민들은 2km 거리를 1시간에 걸쳐 아랫 가사목까지 걸어서 내려가 버스를 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고령화돼 1시간을 걷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로를 건설한 것은 주민들이었지만 이제 버스 운행을 위해 도로를 넓혀주는 것은 행정기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곳을 운행하는 보은교통에서도 도로만 넓혀진다면 버스를 운행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군내 유일한 창호지 제작소, 전수자 사망 후 사라져
청산면 삼방리는 군내 유일의 창호지 제작소로도 알려져 있었다. 대대로 삼방리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창호지 제작은 양씨 성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는 최후 전수자가 100여 년 전 세상을 뜨자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그 맥을 잃기 위해 외지에서 창호지 제작자를 불러 계속 창호지를 제작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인건비가 비싼 관계로 창호지 제작소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 삼방리에서 제작되는 창호지는 연간 20만장에 달했으며 생활이 어려운 마을 주민들이 각 마을을 방문하거나 청산장을 이용, 많은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고 최 이장은 전한다.

외롭게 살다간 노인을 위한 제사
삼방리 마을 주민의 따뜻함은 외롭게 살다 세상을 떠난 노인을 위한 배려에서 잘 나타난다. 매년 음력 10월20일이면 마을 주민들은 마지막 창호지 전수자를 비롯해서 자손 없이 삼방리 마을에 거주하다 세상을 떠난 노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최 이장은 "처음엔 홀로 계신 노인들이 돌아가시며 남겨놓은 조그마한 땅을 반장으로 있던 주민이 함께 농사를 져 그분 묘의 벌초와 제사를 함께 지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지요. 하지만 마을 곳곳에 묵혀있던 그분들의 땅을 6년 전 매각해 400만원을 마련했고 그 돈이 이제는 700만원이 정립되어있습니다. 이 돈의 이자를 이용해 지금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다 돌아가진 분들의 묘를 정리하고 매년 제물을 차려놓고 넋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삼방리 주민의 따뜻함으로 외롭게 살다가 일생을 마친 노인들이 세상을 떠난 후,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제사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산삼을 캐는 주민들이 많아요. 악한 사람의 눈에는 절대 발견되지 않는 다는 산삼인 만큼 주민들의 따뜻함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 까요?" 최 이장의 눈에 비친 선한 마을주민의 모습이다.

매년 봄 놀이 등 화합 위한 행사 가져
어느 마을보다 주민의 화합이 돈독한 삼방리는 매년 주민화합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계획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봄 놀이 행사를 갖고 있고 마을 어른들을 위해 여행이나 잔치 같은 행사를 벌이고 있다. 또 출향인들과의 밀접한 유대관계도 삼방리의 장점이 되고 있다.

지금은 모두 고령화돼 90년대 이전의 활발한 활동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안양의 박영호씨, 부산의 최종기씨, 파주의 최대용씨, 대구의 최학기씨 등이 고향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지며 자주 고향을 방문해 고향에 대한 걱정과 노인들의 입장에서 고향 노인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또 대구에 거주하는 최경호(35)씨가 젊은 출향인으로 매년 고향을 방문할 때면 삼방리 출신의 출향인들과의 새로운 모임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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