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5] 청성면 궁촌리
신마을탐방[15] 청성면 궁촌리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1.02.10 00:00
  • 호수 5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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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성면 소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궁촌리. 마을 뒷산이 활과 같이 생겼다 하여 활골이라 불리었던 이곳은 청성과 심천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활시위 모양을 하고 있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마당바위, 부처바위, 행상바위가 한결같이 온 마을을 에워싸고 지켜준다고 전해지는 청성면 궁촌리.

청성면 소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궁촌리는 청산현 남면에 속해 있다 1914년 옥천군에 편입되었고 1929년 청남면과 청서면이 청성면으로 통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란 전 은진송씨 첫 거주, 37가구 63명 거주
약 700여년 전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문중은 은진송씨라 전해진다. 하지만 은진송씨는 현재 모두 이주했고 김용수(62)씨 12대 조부로부터 영산김씨 문중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경주이씨가 12가구로 마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이밖에 한씨 5집, 정씨 4집, 최씨 2집, 장씨 2집, 박씨 3집, 홍씨 2집을 비롯해 영산김씨, 성주이씨, 단양이씨, 김해김씨 등이 각각 1가구씩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이제는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고 있는 청성면 궁촌리에는 총 37가구 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18가구가 할머니 홀로 가구를 꾸려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며 5가구가 인삼재배, 2가구가 담배, 1가구가 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활의 모양을 한 마을
지난 2일 마을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간 궁촌리 노인회관. 농한기를 맞아 1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 얼큰한 찌개 국물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며 동전 몇 잎을 놓고 `화투' 놀이를 즐기는 소박한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을 자랑거리라 해봐야 마을이 생긴 이 후 단 한 건의 도난사고도 없었다는 거지"
주민들이 한 마디씩 마을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자 한수길(62) 이장이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얘기는 이규옥(77) 원로회장이 전한 마을 곳곳에 위치한 바위와 지명에 관한 전설이었다.

"과거 궁촌리의 지명은 활골이었어. 마을 뒷산이 꼭 활과 같이 생겼거든. 그래서 지금의 궁촌리도 활(弓)과 골(村)을 따서 궁촌리라 불리게 되었지"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듯 청성과 심천을 연결하며 마을 앞을 지나는 지방도는 활시위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30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묻혀 있다는 건지산과 말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검화산이 있지. 예로부터 이곳에는 한 장수가 검화산 말 등을 타고 장군봉으로 향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지. 하지만 도로가 놓여 그 맥이 끊기는 아쉬움은 있지만 활 줄이 매어져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지" 이 회장은 마을 앞 도로가 이곳에 전해 내려오는 많은 전설과 묘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마당바위·부처바위·행상바위 마을을 둘러싸 재앙 막아
궁촌리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선돌이다. 마을 주민들은 과거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해 왔다.

이 선돌과 함께 마을 앞 절터에 남아 있다는 부처바위와 마을에서 바라보면 꼭 행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행상바위, 소백산 정기를 이어받은 명장이 다듬어 놓고 발자국을 남겨놓았다는 마당바위는 마을을 둘러싸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 특히 마당바위와 장수둠벙에 관한 전설은 마을 주민들의 입을 통해 쉽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마당바위를 찾아 나서며 한수길 이장은 "이 마당바위는 소백산 정기를 이어받은 속리명장이 활골에 들어와 마당바위를 다듬고 발자국을 남겨 놓은 후 장수둠벙에서 멱을 감고 장군재를 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며 마당바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마을 앞 도로를 따라 심천 방향으로 향하다 왼쪽에 위치한 산을 오르다 보면 과거에 서당이 위치해 있었다는 서당골에 들어서게 된다. 이 서당골에 들어서면 발견할 수 있는 마당바위는 장수가 다듬었다는 전설을 반영하듯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바위의 모양이 마치 욕조와 같았다고 전해지는 장수둠벙은 이곳에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묻혀 마을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마당바위와 함께 이곳에는 `젊은 아낙이 아들과 딸을 두고 품에 촛불을 켜고 정성을 모아 기원, 모든 바람이 이루어 졌다'는 촛대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또 이곳 서당골에는 은진송씨가 처음 정착했던 송명지골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노동력부족, 힘든 농촌현실
마을이 생겨나면서부터 마을의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마을 앞 느티나무처럼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마을의 안녕과 후손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기원하는 조상의 훈훈한 숨결과 얼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다른 농촌의 상황처럼 희망적이지는 않다. 70년대 초 80호 이상의 가구가 생활하던 마을이 이제는 36가구, 학생들이라고 해봐야 초등학생 1명, 중학생 5명, 고등학생 1명이 전부다. 이처럼 젊은 층이 점차 농촌을 떠나면서 노동력 부족을 실감하고 있다.

한 이장은 "너도나도 도시로 떠나 이제 농촌에는 나이 먹은 사람들 밖에 남아있지 않아 인력이 크게 부족한 실정"이라며 "그나마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해 주던 농기계도 급등한 유류비로 사용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수입 농산물도 농촌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눈만 오면 끊기는 버스도 궁촌리 주민의 생활을 힘들게 하고 있다.

"조금만 눈이 와도 버스가 청성 고개를 넘지 못해 교통이 두절될 때가 많아. 옥천버스가 다니는 것이 당연하지만 눈이오면 보은에서 버스가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보은 쪽에서는 높은 고개가 없어 버스가 들어오기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한 주민의 말속에서 주민들의 고충과 함께 아직도 남아있는 농촌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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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희 2011-02-25 06:14:51
5가구가 인삼....2가구가 담배....1가구가 배농사.......우리집은 세개 다 했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