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구두 수선점 이근복씨
가방, 구두 수선점 이근복씨
함께사는 세상 [19]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1.13 00:00
  • 호수 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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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평의 작은공간 속의 이근복씨의 모습에서 기계의 발달과 그것이 가져온 생산력의 증가로 점점 막다른 변두리로 몰리는 이 시대 인간의 소외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느꼈다.
문을 열고 들어선 1평 남짓한 작은 공간.

흔히 볼 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재봉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한쪽에 놓인 작은 앉은뱅이 책상에는 구두를 수선할 때 쓰는 듯한 접착제와 휴대용 가스레인지 한 대가 놓여있다.

눈을 조금 높이니 출입문 맞은편에 만들어진 선반에 주인이 찾아가지 못한 흰색 여성용 부츠와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다.

유리창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발라진 벽지는 이미 처음의 고왔던 색깔을 잃어버리고 검은 세월의 때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어 작은가게의 세월을 짐작케 한다.

아무래도 매일 찾아오다시피 하는 인근 `마실꾼'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를 쉽게 정화시키기에는 가게의 크기가 너무 작아 나타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근복(53)씨가 20년하고도 4개월동안 옥천역 앞에서 운영하던 `화성양화점'을 정리하고 농협옥천군지부 사거리의 한 모퉁이에 `가방·구두 수선 전문점'을 개설한지는 이제 5년이 넘어서고 있다.

▶'티켓'에 밀려난 '양화점'
"집세 주고 인건비 주면 남는 것이 없어서 양화점은 접었지. 제 버릇 개 줘! 할 줄 아는 게 이건데"
이씨는 구두 수선집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양화점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현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전두환 정권 들어서면서 소위 `티켓'이라는 게 유행하기 시작했어. 관공서를 찾아가거나 부탁을 하러 갈 때 티켓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렸지. 그 당시 공무원들, 뒷주머니에 구두 티켓 안 넣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어디 있었나!"

결국 양화점의 최대 고객이었던 공무원들과 일반 회사원들에게 주는 촌지(?)로 구두상품권이 각광을 받으면서 수제 양화점은 퇴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씨의 분석이다.

그렇게 사회의 흐름에 밀려 구두 수선을 시작했지만 그것도 생각만큼 여의치 않다. 더군다나 읍사무소가 옮겨가면서 가방·구두 수선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줄어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 가게를 하면서 느낀건데. 아끼는 것은 오히려 가진 사람들이 더해. 신발 고치러 오는 사람들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보다는 그냥 살만한 사람들이 더 많아. 주민들 생각도 바뀌어야지"

한참 인정을 받으며 구두를 직접 제작할 때보다 흥이야 덜 나겠지만 구두 수선 틀에 낡은 구두를 올려놓고 정성스럽게 못을 박고 있는 이씨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그의 말대로 신을 수 있을 정도의 구두만큼은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 있게 고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30년 넘게 함께 해 온 구두에 대한 애정 때문인가 보다.

▶'기성화'는 '수제화' 못따라와
이 씨가 구두와 인연을 맺은 것은 35년 전이다. 당시 충청도에서는 꽤 알려진 구두기술자였던 큰 매형의 권유로 대전역 앞에 있던 `이화양화점'에서 처음으로 구두 기술을 배웠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기술을 배운 후인 70년대 초반에는 서울 종로의 멜본 양화점으로 일터를 옮겼다.
"당시만 해도 대전에서 구두 기술 배웠다고 하면 최소한 꿰매는 것은 최고로 알아 줄 때였어. 숙식도 제공해 주면서 데려가려고 난리였으니까."

그렇게 대우를 받으며 일했던 멜본 양화점에서 그는 특수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이야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전문 업체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당시만 해도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등산화, 승마화, 스키화 같은 어려운 신발을 만들어 보면서 좀더 전문적인 기술을 익혔다.

"선생님하고 둘이 하루종일 만들어도 스키화 같은 것은 하루에 2켤레 만들기도 힘들었었지. 그만큼 어렵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 어지간한 양화점에서는 만들지도 못했어."

그렇게 기술을 배우고 군대를 제대한 후 결혼과 함께 옥천에 `화성양화점'을 차리고 자신이 직접 구두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수제화만이 가질 수 있는 튼튼함이나 편안함은 지금 잘 나가는 기업들도 도저히 따라 올 수가 없지. 사람의 발 크기에 정확하게 맞춰서 만드는 구두를 많은 사람들의 평균 발 모양을 기준으로 만드는 구두가 어떻게 쫓아오나..."

수제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130가지가 넘는 많은 재료가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 들어간다고 그는 설명한다. 더군다나 그 많은 재료들은 사람이 가장 편안하고 튼튼하게 구두를 신을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한 위치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이씨는 지금보다도 옛날 사람들이 훨씬 기술적으로 치밀하고 훌륭했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런 수제 기술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규모로 만들어지는 지금의 물건들 속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장인 정신'이라는 측면에서 나오는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책임 그리고 애정을 함께 섞어 만들어냈던 제품에 대한 `그리움'도 엿볼 수 있었다.

▶'기계'에 밀려난 '인간'
한 때 편안하고 멋진 구두를 만들어내던 손으로 지금은 떨어지고 해진 구두를 수선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어 냈던 `구두'에 대한 자존심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것은 아주 가끔 이지만 지금도 구두 수선집을 찾아와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단골 손님들이 있는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자신이 직접 만든 구두를 신고 다닌다. 지금 신고 있는 구두는 만든 지 17년이 넘은 구두다. 구두 밑창을 세 번 갈았지만 아직도 가죽은 멀쩡하다.

"옥천에 있는 소장사 중에 내가 만든 신발 안 신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걸... 그만큼 편하고 튼튼한 것은 자부하니까..."

그때를 회상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기분 좋은 `고집'이 엿보였다. 대로변에 버티고 있던 전문양화점에서 네거리 한 귀퉁이의 조그만 가방·구두 수선점으로 일터가 바뀌어 버린 이근복씨.

그의 이런 모습에서는 기계의 발달과 그것이 가져온 생산력의 증가 속에서 점점 막다른 변두리로 몰리는 이 시대 인간의 `소외'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이 느껴지면서 그가 다시 한번 구두망치를 힘차게 들어봤으면 하는 소망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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